기사와 헌터의 겸직 188화
“드라고노이드의 모든 용인은 가주님의 ‘제국을 보호하라’란 명령에 따라야 하는 걸 알고 있겠지?”
“직접 들은 적 없습니다. 그 명령은 제가 가주님을 섬기기 전에 내려진 명령입니다.”
“하하, 말장난 솜씨가 괜찮네. 나도 이야기꾼이지만, 너도 제법 훌륭해.”
카온은 다른 용인과는 생각하는 방식이 달랐다. 융통성 없이 주군의 명령을 오로지 따르는 용인과 달리, 그는 명령을 다르게 해석했다.
“제국을 지켜야 함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주님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가주님이 곧 제국의 검입니다.”
“음, 군인으로선 명령을 멋대로 해석하는 것 같아 허용할 수 없지만, 마음에 드는 대답이긴 하네.”
홉킨스는 특유의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카오톨로메오, 난 너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어. 알다시피 용인의 인사 배정은 오로지 가주님의 영역이고, 네 부족장을 설득할 자신도 없거든.”
“가주님은 수도에 홀로 계십니다.”
“어쩌겠어? 당신이 원하신 건데.”
“…….”
“응? 뭐라고 했어?”
홉킨스는 카온이 중얼거린 말을 똑똑히 들었지만, 마치 듣지 못한 척 귀를 가져다 대었다.
‘가주님이 그딴 걸 원할 리 없습니다.’
자칫 하극상으로 보일 수도 있는 발언이었기에, 카온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입을 다물었다.
“흐음.”
의자 위에서 다리를 꼬고 카온을 위아래로 훑어본 홉킨스가 웃음기를 참으며 물었다.
“가주님 곁에서 일하고 싶나 봐?”
“예.”
“왜? 그분이 위태로워 보이나?”
“……예.”
“어떤 점이? 그분은 이 대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실력자야. 신성 왕국의 성기사단도 눈을 못 마주치고, 북방의 이민족들은 신이라고 칭송하는 지경이지. 그런 그녀를 왜 지키고 싶은데?”
카온은 홉킨스에게 들리지 않도록, 하지만 명백히 보이도록 이를 갈았다.
혀를 씹을 것처럼 턱을 누르는 카온을 즐거운 듯이 바라본 홉킨스가 대답을 재촉했다.
“전장의 적들은 목을 베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중앙의 귀족들은…….”
그러나 말재주가 없었던 카온은 이후 어떤 말로 바제트의 상황을 표현할지 막막했다.
그가 말을 끊자 오히려 더 흥미로운 얼굴로 경청하는 홉킨스를 보며, 카온은 얼떨결에 진심을 말했다.
“그녀를 외로움으로 죽일 셈입니다.”
“……외로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홉킨스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작게 벌어진 그의 입은 천천히 호를 그리며, 폭소로 변했다.
“푸, 푸하하하! 바제트 님이? 그 가주님이 외로워서 죽는다고? 아하, 아하하하하!”
주변 막사에 들리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크게 폭소하는 그를 앞두고 카온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카온의 모습은 또래의 소년의 그것과 닮았다.
어른스러운 말투와 태도가 아닌, 처음으로 소년다운 모습이 나타나 홉킨스는 더 크게 웃었다.
“아, 아하하. 진짜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와, 찾아오길 잘했네. 이런 애가 용인 중에 진짜 있나 싶어 와본 건데, 오길 정말 잘했어.”
“……다 비웃으셨다면,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훈련해야 합니다.”
하극상이나 다름없는 무례한 언사였지만, 큰 웃음을 준 덕에 너그러워진 홉킨스는 느긋하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냐 아냐, 비웃는 게 아니야. 대단해서 그래. 이야, 다른 기사단원들은 가주님께 가서 반란을 일으키자고 꼬드기려 하는데, 일개 소년이 지켜주겠다면서 포부를 밝힐 줄 누가 알았겠어.”
반란이란 단어에 카온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
기사단원들이 바제트에 대해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가 있었다.
“설마 제국을…….”
“응? 아, 걱정 마. 반란은 일어나지 않아. 그 양반이 그런 과격한 수단을 바랄 리 없으니까. 강인해 보여도 온건파거든.”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가주님도 자신을 누더기의 기사라 부르던 중앙 귀족들에게 복수심을 가질 수 있지 않습니까?”
“확신해. 그럴 운명이니까. 그리고 가주님이 어릴 적부터 보살펴왔던 게 또 나거든.”
바제트가 어릴 적 검술을 배웠을 때 체력 훈련을 담당하던 게 홉킨스였다.
홉킨스는 바제트가 유혈 사태를 일으키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녀는 자신의 반란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피해 입을 것이란 계산 아래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가주님은 지금 상황에 만족하고 계신단 말씀입니까?”
“아니? 그럴 리 없지. 그저 납득하고 있을 뿐이야. 전쟁 영웅이 욕받이가 되어야, 제국이 평안을 얻을 거란 걸.”
승전국임에도 제국은 전쟁의 배상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황태자의 독단으로 시작된 정복 전쟁은 ‘과하게’ 많은 성과를 이뤘으며, 이로 인해 주변 국가의 경계와 질투를 받기 시작했다.
“차라리 전쟁을 시작했을 때, 다른 나라가 더는 허튼소리 못하게 아예 밟아버렸어야 했어. 다시 살아날 건더기를 남겨놓으니까, 결국 덜미를 잡히잖아. 지금 제국에겐 승전의 책임을 물 대상이 필요해. 그게 바로 가주님이고.”
외교란 국가 간 힘의 천칭을 판가름하는 일이다. 제국은 분명 대륙에서 가장 강한 국가지만, 제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이 연합하면 제국이라 한들 쉽게 나설 수 없다.
승전국인 제국이 호전적으로 나오는 순간, 모든 국가는 연합을 맺어 제국을 압박할 것이다. 공동의 적이 생긴 연합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결국 온건한 외교를 펼쳐야 하는 제국의 입장에서 패전국들의 본보기로 전쟁 영웅의 희생이 필요했다.
“우린 더 이상 침략하지 않습니다. 적당히 나눠 갖고 서로 평화롭게 지냅시다- 라는 의미로, 적국에서 가장 두려워한 전쟁 영웅을 제국 내에서 바보 취급하는 거지.”
결국, 정치쇼란 이야기다.
“중앙엔 왜 아무도 가주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겁니까? 전우들도 많다고 들었습니다만.”
“귀족이란 그런 거란다, 용인 도련님. 전쟁터와 정치판은 비슷하면서 다르거든. 그곳의 목숨과 이곳이 명분은 동일 선상에 둬야 해. 아까 말했던 외교와 똑같아. 중앙 귀족도 연합하기 위해, 가주님이란 공동의 적을 만들어낸 거지.”
“……황태자도 마찬가지입니까?”
“황태자‘님’이라 불러야지. ……같은 생각이겠지? 돌아가는 꼬라지 보면 알잖아. 그분도 혼자 정치할 거 아니거든.”
바제트가 황태자에게 얼마나 충성스러운 기사였는지 모르는 이가 없었다.
소년소녀 시절부터 우정을 돈독히 해온 그들 또한, 정치판에선 한낱 정적(政敵)에 불과했다.
카온의 입장에선 당최 이해되지 않는 일투성이였다. 전쟁터의 전우들은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배신자가 되었고, 충성을 맹세한 주군은 부하를 먼지투성이의 저택에 버려두고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 와중에 바제트의 부하라는 용인들은 명령이 최우선이라며 제 주인이 말라가고 있음에도 헛된 고지식함을 뽐내고 있다.
“그렇다면 더더욱 가주님의 곁에 누군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가서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홉킨스가 과정스레 팔을 벌리며 말했다.
“정적을 암살이라도 해볼래? 아니면 가주님을 노리는 암살자들을 막아? 고작 스콰이어 한 명이 곁에 생긴다고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아? 아니면 뭐야, 가주님 마음의 짐이라도 덜어주겠단 이야기인가? 네가 그녀를 위로해 주려고?”
끈질기게 추궁하는 홉킨스에게 대답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홉킨스의 비아냥을 반박하고 싶었지만, 카온은 자신이 바제트에게 도움이 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가고 싶습니다.”
“…….”
근거는 없고, 증명할 수단도 없지만, 하고 싶은 말은 이게 다였다.
분노한 듯이 미간이 움찔거리는 카온이었지만, 끝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짓궂은 어조로 카온을 몰아세우던 홉킨스는 입을 다물고 웃음을 멈췄다.
“넌…… 꼭 인간 같네.”
고지식한 용인이 할 말은 아니었다. 그의 태도는 오히려 인간에 가까웠다.
“흠.”
무언가 생각에 빠진 홉킨스는 턱을 괴곤 카온을 위아래로 연신 훑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 하나를 꺼내더니, 펜으로 정체불명의 주소를 적었다. 그는 한 페이지를 뜯어 카온에게 내밀었다.
“직접 가주님의 호위로 네 이름을 올릴 순 없지만, 이런 방식으론 가능하지.”
“이게 뭡니까?”
“가주님이 계신 구역의 치안 담당 기사로 발령시켜 줄게. 이 주소로 가면 내가 알던 후임이 네 자리를 마련해 줄 거야. 부족 쪽엔 심부름 좀 보낸 걸로 둘러대면 되니까, 두세 달쯤 지내봐. 가주님 곁에 있진 못해도 모습을 보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수도의 기사가 하는 일이라곤 귀족들이 다니는 도로를 순찰하거나, 주민 신고에 대응하는 정도다.
전방 기사에 비할 바가 못 되는 허접한 일이었지만, 바제트를 지켜보고 싶다는 카온의 요구엔 어느 정도 부합되는 자리였다.
“그래도 됩니까?”
반색하는 카온을 보고 쓰게 웃은 홉킨스가 말했다.
“들키면 안 되긴 하지. 드라노이드 가문의 기사가 몰래 수도에 잠입한 꼴이 되니까. 하지만 넌 성인식도, 서임식도 안 했으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아직 수습 기사인 카온은 기사단의 명부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았다. 큰일이라도 나지 않는 이상 그를 알아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신 ‘이쪽’ 가주한테는 들키지 마. 귀찮아져.”
“도련님 말씀이십니까.”
“도련님이라 불리다 걸리면 제명이야. 조심해.”
이쪽 가주라 하면, 바제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가주 노릇을 하고 있는 제니트를 뜻했다.
가신들은 바제트를 드라노이드의 가주라고 인정하고 있었지만, 아직 가주 취임식을 거행하지 않아 공식적인 가주로 부를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취임식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황궁에서 곧장 바제트를 수도방위 기사단으로 불러버린 탓이다.
제니트의 이야기가 나오자 카온의 표정이 사납게 굳었다. 표정관리 하라며 그의 미간을 툭툭 건드린 홉킨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발은 사흘 후에. 내가 보냈다고 하면 그쪽에서 알아서 배정해줄 거야. 가주님이 네 얼굴을 알고 있을 것 같진 않지만, 마력을 쓰면 용인인 걸 알아볼 테니 주의해.”
“알겠습니다.”
“두 눈으로 잘 확인하고 와라.”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홉킨스는 막사를 떠났다.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경례하고 있던 카온은 손에 쥔 쪽지를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드디어 그분을 만날 수 있다.
카온은 부품 마음으로,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 * *
바제트가 있는 저택엔 어떤 경비도 보이지 않았다.
세계 최고의 기사를 누가 암살하겠냐마는, 주변의 호화로운 저택들 사이에 있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허름한 숙소라니, 지나갈 때마다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