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86화
청하와 라이샤라는 엄청난 미인을 통해 컨텐츠를 만들어보자고 PD와 기획을 하던 진희를 발견한 라이샤가 끔찍하단 얼굴로 도망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단장님답게 조금만 더 무게감 있게…….”
현성이 평소처럼 잔소리할 것 같자, 진희가 회견장에 도착한 걸 소란스럽게 알리기 시작했다.
“저기 주차 비었어요.”
“……알았으니까 허벅지 좀 그만 치십시오.”
회견장은 이미 기자와 관계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안내원을 따라 회견장으로 들어간 진희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던 PD를 발견했다.
“지- 각.”
“미안.”
“새삼스럽네요.”
이미 방송을 진행하면서 진희의 지각에 신물이 난 PD가 피곤한 안색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기본 화장만 더하고 갈게요. 대본은 필요하세요?”
“괜찮아, 다 외웠으니까.”
“뭐, 말하는 거야 걱정 없긴 한데…… 괜한 이야기 꺼내지 마세요. 저번처럼 싸움 나니까.”
PD는 진희가 했던 이슈 발언들을 중얼거렸다. 진희는 듣는 척도 하지 않은 채 안쪽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간단한 코디가 끝나고, 진희의 차례가 돌아왔다. 수많은 기자 앞에 선 진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헌터, 기자, 일반인, 정부 관계자. 온갖 사람들이 진희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었다.
“파란 기사단의 단장, 서진희입니다.”
그녀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 * *
“멋지죠?”
“흠.”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는 진희의 모습을 보고 서혁이 말했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서 수저를 놀리던 이영한이 대답하지 않고 반찬을 집었다.
[앞으로 마석의 재생산 및 가공을 모두 국가 소관의 공기업에게 맡기는 정책을 실시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는 유럽 연합과 미합중국의 헌터 길드와 연계하는 범세계적 사업으로…….]
“기어코 나라마저 바꾸려 드는군.”
카르나와 괴짜가 사라진 지금, 진희를 무력으로 억제할 수단은 사라졌다.
국내에선 파란 기사단의 힘을 당해낼 단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파란 기사단에 대응해 헌터 단체들이 서로 연계하려 했지만, 기막힌 타이밍에 브리온이 해체가 되는 바람에 그 잔해를 취하기 위해 서로가 견제하던 상황이었다.
그 틈을 타 헌터 시장의 중심을 차지한 파란 기사단은 서서히 나라를 바꾸기 시작했다.
“마석으로 인한 민간인들 피해가 너무 많았으니까요.”
마석 채취를 위해 특별관리형 던전을 방치하는 기업과 정부, 세금을 내지 않으려 게이트를 등록을 피하는 헌터 파티들.
마석 관리 제도는 마석 이권 다툼 때문에 벌어진 안전상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였다.
“오히려 한국이 늦은 편이죠. 어느 기업 덕분에 말이에요.”
미국이나 유럽 쪽에선 진작 시행하고 있던 제도였지만, 금강의 힘이 지대하던 한국에선 안건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모든 유력자가 국내 마석의 5할을 유통하고 있는 금강의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강은 과거에 비해 유세를 떨치지 못하는 기업이 되었고, 진희는 그 빈틈을 이용해 정부와 기업들의 협력을 얻어냈다.
“이제라도 됐으니까 다행이지만.”
“……딸 한번 잘 키웠더군.”
“칭찬이죠?”
“그렇게 들리나?”
이영한은 자신이 저질러온 악행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금강을 위해 벌인 필요악이라 판단하고 있었는데, 진희는 그것을 지적하며 금강의 협력을 강요했다.
말이 협력이지, 반대하면 그간의 복수를 하겠다고 웃는 낯으로 협박해 왔다.
힘이 깡패다. 게다가 파란 기사단의 최근 명성을 생각하면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내 아들까지 채갈 줄이야.”
“자기가 좋다고 따라간 것 아닙니까?”
“…….”
할 말이 없던 이영한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후계자의 자리를 돌려주겠다 서한에게 말했지만, 그는 조금의 아쉬움도 없이 필요없다고 거절하곤 파란 기사단으로 돌아갔다.
“이세영도 있잖아요.”
“……녀석은 독립할 생각이야.”
“아하.”
최근엔 금강도 복잡한 상황이었다. 세영이 자신의 부하들을 데리고 퇴사할 조짐이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과 북미 쪽 금강을 통합하고, 중국과 한국에 거점이 있는 이영한의 금강과 대립할 양상이었다.
“시영이밖에 없네요.”
“흐음.”
최근 B급으로 올라간 시영이도 세간에 주목받는 후계자였다.
성장기에 들어선 건지, 최근엔 종혁의 키를 훌쩍 넘긴 시영이는 이제 어엿한 후계자가 되었다.
“나쁘지 않지. 아시아의 금강을 시영이에게 주고, 바다 건너의 금강을 세영이에게 주는 것도.”
이영한이 바라는 건 하나의 금강이 아니라 세계에서 활약하는 금강이었다.
후계자가 반드시 하나라는 법은 없었으니, 서로 경쟁하며 성장한다면 그게 최선일지도 몰랐다.
“물론 이세영은 금강을 박살 내고 자기 기업을 세울 성격이긴 한데.”
“꼭 초를 치는군.”
“제 성격이 그래서요, 반찬 더 드시겠어요?”
“흠, 그래. 이 초콜릿으로.”
“식성이 비슷한 건 다행이네요.”
초콜릿에 푹 담긴 고사리 삼겹살을 하나 더 꺼내주며 서혁이 말했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텐데, 제 요리 솜씨를 좀 보여드려야겠군요.”
“왜 내가 자네와 자주 보지?”
“그야 사돈…….”
“닥쳐.”
입맛 떨어진다며 숟가락을 거세게 내려놓는 이영한을 보며 서혁이 쯧쯧, 혀를 찼다.
* * *
“고생했어.”
“카메라 플래시가 눈 아프긴 하네요.”
진희가 눈가를 손으로 마구 비벼대자, 서한이 혀를 차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대신 차게 식은 물수건으로 그녀의 눈의 열을 가라앉혔다.
“항상 궁금했는데, 왜 그렇게 눈을 비비는 거야? 습관이야?”
“눈이 자주 건조해져서요. 어렸을 때 안 좋은 빛을 많이 쐐서.”
“괜찮아?”
“요즘은 괜찮아요. 서한 씨말처럼 그냥 습관이기도 하고요. 볼래요?”
진희가 눈꺼풀을 들어 올려 서한에게 내밀어 보였다.
진희의 눈을 자세히 살피려던 서한은 고개를 내려 진희와 시선을 마주했다.
가까이 가던 도중, 진희가 기습적으로 그의 입에 입 맞추려 했다.
“어딜.”
그러나 예상했다는 듯 그녀의 입술을 피한 서한이 씨익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럴 것 같더라.”
“헐.”
“내가 한두 번 당하냐?”
놀리기 좋아하는 진희의 얄팍한 수는 이미 서한에게 읽히고 있었다. 서한이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진희는 팔짱을 낀 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안 할 거예요?”
“……뭐?”
“자.”
진희가 삐죽 입을 내밀었다. 언뜻 삐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얼굴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서한은 석상처럼 굳었다.
이래도 안 할 거야? 진희가 눈으로 묻자 결국 서한 쪽에서 먼저 백기를 들었다.
짧은 입맞춤이 지나가고, 새빨갛게 달아오른 서한의 뺨을 보며 진희가 오늘도 보람찼다며 웃었다.
“아버지가 식사하고 계시던데, 갈 거냐?”
“안 가요. 그 밥 먹을 거예요?”
“……아니.”
“우린 집에 가서 애들이랑 먹죠?”
한 번 서혁에게 식사를 대접받은 적 있던 서한은 최악의 시간을 경험했다.
차라리 몬스터의 독으로 밥을 해먹겠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그에겐 얼마나 끔찍했을지 짐작이 간다.
익숙한 진희마저도 때때로 묵묵히 먹기 힘든 게 서혁의 음식이었다.
그걸 이영한이 먹고 있다니, 서한은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걸 어떻게 맛있다고 생각하지.”
“취향은 다들 다르니까.”
“취향이라고 속이기엔 너무 악랄한 음식이야.”
닭 비계 튀김과 섞인 아이스크림 와플이 떠올라 속이 뒤집혔다. 진희는 서한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둘은 천천히 보육원을 향해 걸어갔다. 오늘은 마침 월말마다 있는 아이들의 생일날이라, 삼인방도 찾아와 생일상을 차리고 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너도 나도 하는 일이 많아졌네.”
“그러게요. 그 징글맞은 녀석들하고 싸울 땐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는데.”
전생의 원수나 다름없는 적이나 세상을 멸망시키게 하려던 신을 징글맞은 녀석이라고 표현한 진희의 대담함에 서한이 설핏 웃었다.
서한은 파란 기사단의 부단장, 특별 관리형 던전의 총책임자, 국내 1위 업적의 S급 헌터였으며, 진희는 파란 기사단의 단장, 헌터 길드의 명예고문, 마석 관리 위원회의 회장까지 맡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신분은 헌터인데 직업은 기사란 것도 웃기네.”
“특이한 겸직이죠.”
사냥감을 쫓는 헌터란 직종과 명예와 정의를 위해 검을 드는 기사란 직종은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개인주의적인 헌터와 달리 집단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기사는 엮이기 어려운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들 그렇게 살잖아요?”
누구도 단순한 인생을 살아가지 않는다.
괴짜는 운명을 시나리오라고 비유했다. 시나리오를 벗어나는 배역은 없고,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게 사람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그럴 리 없다.
“멋대로 살아가는 게 제일 재밌는걸.”
하지 말라면 하고 싶은 게 사람이다.
네 운명은 정해져 있으니 반항하지 말라고 하면 더 이상한 짓을 벌이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였다.
“대체 저게 무슨 제목인지, 뭔 일을 하는지 짐작이 안 가면 재밌잖아요?”
“……설마 기사단 세운 게 그런 이유 때문이야?”
“네. 그냥 헌터 파티 하나 만들면 되는 걸, 왜 굳이 기사단이라고 말했겠어요?”
“난 네가 전생을 의식해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단장 노릇 하다가 술 먹고 중독사 했는데, 그럼 더 기사 노릇 하지 말아야죠.”
“어어…….”
“그냥 홧김에 저지른 일이에요.”
진희가 기지개를 켜며 서한의 앞으로 걸어갔다. 어느새 가람 보육원이 저 멀리 보였다.
왁자지껄한 기운이 벌써부터 느껴진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떠드는 소리, 싸우는 소리가 온 도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기사와 헌터를 겸직하고 있다니, 당최 무슨 인간인지 짐작이 안 가지 않아요?”
영웅과 악당을 겸직하는 것처럼.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아요.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법이니까.”
재수 없게 친동생한테 배신당할 수도 있고, 그러다 걸어다니는 시체가 되어 믿었던 주군의 목을 칠 수도 있고.
다시 태어나서 고사리 삼겹살에 한숨을 내쉴 수도, 다시 만난 주군에게 장난스럽게 키스할 수도 있는.
그런 엉망진창의 인생이 재밌는 법이다.
“아- 배고프다.”
저녁 시간이 되었다.
진희는 저편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아이들과 단원들에게 힘없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곰 가면 쓸 준비는 되셨어요? 애들 생일축하 노래 불러야 하는데.”
“너나 강아지 가면 준비해둬. 그 조잡한 거.”
“애들한테 이를 거라니까?”
“이르던가.”
둘은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걸어갔다.
이제 기사와 헌터의 겸직을 내려놓고, 아이들의 생일잔치 들러리가 될 시간이었다.
기사와 헌터의 겸직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