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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185화 (185/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85화

“그만해.”

“로칸이시여, 만물의 칸이시여. 당신의 통치 아래 저희는 행복했습니다. 저희를 구하기 위해 제 살을 깎아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을 살과 피를 취하며, 저희는 언제나 영광스러운 삶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러니 칸이시여. 우리의 어머니시어. 이제 그만…….”

“그만!”

“당신이 행복해지길 기도합니다. 당신이 저희를 버리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나이다.”

“그 얼굴로, 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지 마!”

“……아멘.”

“싫어어어!!”

로칸이 뒤를 돌아, 신관을 향해 뛰었다. 엉망진창의 발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간 로칸이 울부짖었다. 눈물이 흐르는 그녀의 뺨은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성경과 벽화에 그려진 아름다운 로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떠나가지 마, 날 버리지 마! 아직, 아직 기회가 남았어. 너희를 살릴 기회가……!”

“저희는 괜찮습니다. 이제 저희에게 얽매이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게 아니야, 너희가 내 전부인 걸, 내 모든 건……!”

로칸이 그를 껴안으려 했다.

저 안타깝고 사랑스러운 존재를 품에 안고 사죄하려 했다.

잘못한 선택을 한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고, 행복했던 과거를 회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변명하고 싶었다.

난 아직 너희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꿈은 행복했니?”

그러나 그녀의 걸음은 진희에 의해 멈추게 되었다.

딱 반걸음.

조금만 더 나아가면 아이를 껴안을 수 있음에도, 진희는 사정없이 로칸의 가슴에 신성모독의 추를 꽂았다.

“아, 아아. 제발, 떠나지 마.”

로칸은 흐느끼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강대한 저주가 그녀의 가슴팍에서 온몸으로 퍼져나가,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신관이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발끝부터 점점 사라지기 시작한 그는, 로칸의 손길에도 무정하게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왜, 왜 내게 이런 걸 보여준 거야? 왜? 진희야, 어째서?”

울부짖는 로칸이 고개를 돌려 진희를 바라보았다.

가슴팍에 꽂힌 공성추 때문에 똑바로 진희를 바라볼 수 없다. 진희는 로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로칸은 진희의 눈을 살필 수 없었다.

눈을 보여줘, 네 진심을 알 수 있게. 로칸은 중얼거렸지만, 진희는 허락하지 않았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왜?”

“그가 찾아온 건 내 뜻이 아니야.”

진희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마노가 만든 환상 마법인지, 혹은 레인이 만들어낸 인형인지, 현성이 귀신의 영혼을 실체화한 것인지, 어떤 그럴듯한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저.

“그는 네 행복을 바랐어. 그건 진실이야.”

무뚝뚝하게 로칸이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읊었다.

“로칸. 너는 사랑을 지켰어야 했어.”

카르나를 위해 자신의 신성력을 모두 바치고 죽음을 택한 솜니움처럼, 라이샤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수많은 세월을 견딘 카사처럼.

“신의 자리에 심취해 있던 건 너야, 로칸.”

“아아, 아아아…….”

로칸은 결국 최선을 다해 추락했다.

사랑하는 이들의 마지막을 함께 지키지도, 자신을 희생하여 사랑하는 이들의 수명을 늘리지도 못했다.

그녀는 도피했다. 어딘가에서 기적이 내려오길 바랐다.

기적 따위, 바란다고 해서 찾아오는 게 아님을 신인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틀렸던 거야? 진희야.”

“…….”

“대답해 줘, 응? 난…….”

진희는 천천히 추를 뽑았다. 카르나와 솜니움의 최후처럼, 신성력이 사라지기 시작한 그녀가 힘없이 무너졌다.

“난…… 내 아이들에게, 미움받는 신일까?”

그것만큼은 대답해 줄 수 있었다. 진희는 쓰러지는 로칸…… 니케를 향해 말했다.

“괴짜는 틀렸어. 모두에게 미움받는 악질이지. 하지만 로칸은 달라. ……신관은 이영한 회장에게 로칸을 ‘소중한 우리의 신’이라고 말했어.”

“…….”

[소중한 우리의 신을 본 적 없으신가요?]

귓속에 신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로칸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목은 저주로 타들어가고 있었다.

차갑고 메마른 대지에 쓰러진 그녀는 눈을 감았다.

[미안합니다. 이렇게 폐만 끼쳐서…… 혹시, 우리의 신을 만나게 된다면…… 전해주세요.]

“당신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처음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기나긴 악연이 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노래와 같은 기도와 함께.

41. 커튼콜

“일어났냐?”

아침이 찾아왔다. 햇살이 눈꺼풀을 간지럽힌다. 진희는 짜증 어린 목소리로 끙끙거리며 베개를 감쌌다.

“적당히 일어나라.”

그녀의 귓가에서 들리던 목소리도, 평소라면 듣기 좋을 텐데 오늘만큼은 신경질 날 정도로 날카로웠다.

“야.”

“우웩.”

결국 목소리의 주인이 진희의 허리를 낚아챘다. 침대로 파고들려는 그녀의 허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 사내, 서한이 혀를 찼다.

“대체 언제까지 잘래? 오늘 촬영 있는 거 잊었어?”

“대신 나가주면 안 돼요?”

“그건 상관없는데 세영이가 울걸? 네가 방송하는 순간을 엄청 기대하고 있을 텐데.”

“세영 씨가 우는 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나랑 상관있어. 내 남매 관계에 큰 문제가 생긴다.”

“지들 남매 관계를 왜 나한테 찾아.”

“사이좋게 지내라고 생일 파티에 둘만 남겨둔 건 기억 안 나냐?”

“안 나.”

“어쭈, 반말?”

“왜 욕이라도 해줄까?”

진짜 쌍욕을 한 바가지 뱉을 것 같은 진희의 매서운 눈매에 서한이 커흠, 하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하여간 씻고 준비해. 입에서 단내 난다.”

“씻겨줘요.”

“……싫어.”

“지금 고민했죠?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죠?”

“시, 시끄러워.”

놀리는 재미로 잠이 깬다. 진희는 키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한이 나가고, 마치 바통 터치하듯 카온이 들어왔다.

그는 평소처럼 수건을 들고 들어와 진희에게 말했다.

“씻겨 드립니까?”

“……싫어.”

다 듣고 있었구나. 진희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카온은 들으란 듯이 혀를 차며 수건을 침대 곁에 두고 나갔다.

이젠 용인도 혀를 차면서 불만을 표하는 시대가 되었다.

“민주주의인가 이거?”

진희가 투덜거리며 욕실로 향했다.

씻고 난 후, 그녀가 향한 곳은 숙소의 1층 입구였다.

그곳엔 정장을 입은 현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진희가 도착하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 빨리 와서 놀랍군요.”

“제가 좀 빨리 일어났죠?”

“예. 3분 정도 늦었으면 회견을 취소하라고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보다 빨리 오다니 대단합니다.”

“어? 지금 취소돼요? 내일 할 수 있나?”

“차 좀 타시죠?”

농담이 안 통하네, 진희가 또다시 입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그건 그렇고 방위대 소장님께서 운전을 해주시다니 영광이네요. 왜 굳이 직접 오셨어요? 나윤수 씨나 보내지?”

“윤수는 바쁩니다. 관리본부한테 인수인계 받을 일들이 하도 많아서요.”

진희에게 안전띠를 매라고 당부한 그는 곧장 시동을 걸었다.

“아, 그래서 유나가 요즘 안 오는 거예요?”

“그쪽도 난리죠. 길드장인 조혜수 님이 비례대표로 당선되기도 했으니까, 차기 길드장도 뽑아야 하고요.”

“그분은 대통령이라도 되고 싶대요?”

“글쎄요, 워낙 야망이 큰 분이시다 보니.”

괴짜와 카르나가 죽은 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완벽히 해체된 브리온과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은 금강 때문에 한국의 헌터 시장은 크게 휘청거렸고, 그 틈을 타 정부 기관인 헌터 길드와 방위대의 위상이 크게 상승했다.

그간 기업 위주로 돌아가던 시장의 칼자루를 점차 정부가 쥐기 시작한 것이다.

“잘 봐둬요. 너무 엇나가면 안 되니까.”

“알겠습니다.”

하지만 결국 한 진영이 고삐를 가져가게 되면, 또 다른 문제가 속출하게 마련이다.

세간에선 진희가 헌터 기업을 혐오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지만, 그녀는 애당초 어느 한쪽을 옹호할 생각이 없었다.

금강과 브리온을 무너뜨린 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필요에서였다.

“어제 늦게 주무셨나 봅니다.”

“네, 이영한 회장이랑 할 말이 있었거든요.”

“제법 많은 사람과 만나신 것 같습니다만.”

“예전에 우리가 미국에서 만났던 마법사 있잖아요. 이름이 루카스던가? 그 사람이 세영 씨의 후원인으로 나타났거든요. 그 사람하고 이영한 회장, 정책기획위원회 쪽 사람하고 만났어요.”

“……진희 씨도 출마할 겁니까?”

“미쳤어요? 전 그런 귀찮은 일은 질색이에요.”

“이미 귀찮은 일 많이 하고 계시잖아요.”

“그러게요, 이번 생도 틀려 먹었나 봐요.”

현성과 진희가 서로 웃음을 터뜨렸다.

어제저녁, 진희는 이영한 회장을 만나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 자리엔 루카스와 정부의 인사도 함께했다.

현성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 자리는 사실 진희가 협박을 위해 만든 자리나 다름없었다.

‘전 악마예요. 수틀리면 기사단이고 뭐고 세상부터 망하게 고사 지낼지도 몰라요.’

‘뭘 원하십니까?’

‘일단 금강의 후계자인 서한 씨랑 방위대 소장인 현성 씨를 저 주세요.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진 말고.’

‘……그들은 물건이 아니다.’

‘제 거란 이야기예요. 건들지 말란 뜻이고요.’

‘혹시 이거 상견례였나요?’

서한과 현성을 가지겠다는 비합법적인 성명을 받아내고, 앞으로 기사단이 시행할 정책에 대해 토론을 나눴다.

할 말이 끝난 진희는 귀찮다고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영한 회장이 이를 빠득빠득 갈며 그녀를 보내주지 않았다.

결국 새벽이 돼서야 잠이 든 그녀가 오늘 늦잠을 자게 된 것이다.

“소라 애들이 잘하고 있나 봅니다.”

“아, A급 시험 잘 봤대요?”

“예. 소라는 A급, 종혁이랑 민혁이는 B급입니다. 청하도 곧 B급이 될 것 같고요.”

“소라가 요즘 이선이한테 계속 진다고 투덜거리더니, 그래도 시험은 잘 봤나 보네요.”

“라이샤가 소라 연습을 많이 봐줬거든요.”

소라는 이미 A급 헌터란 면허를 가지기 충분한 실력이었지만, 진희는 A급 승급 시험을 치르기 전 그녀에게 한 가지 조건을 더 강요했다. 이선에게 대련을 이겨보란 것이었다.

이능력에 의존하는 소라의 기본기를 성장시키기 위한 진희의 시험이었는데, 최근에서야 그것을 통과한 소라는 파죽지세의 기세로 승급시험마저 합격했다.

“라이샤가 소라를 특별히 아끼다 보니, 훈련도 온종일 하더군요.”

“라이샤는 조교로 썩긴 아쉬운 실력인데.”

라이샤는 기사단의 조교로 임명받았다. 남의 주목을 받고 싶어 하지 않던 라이샤는 매일 숙소에 틀어박히기 일쑤였고, 진희는 라이샤에게 단원들의 훈련을 봐주라는 임무를 내려주었다.

“그러게 적당히 하시지 그랬나요.”

“그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죠.”

라이샤가 더욱 바깥으로 나가기 싫어하게 된 건, 파란 기사단 아이돌 기획이라는 술김에 저지른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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