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84화
“악취미네. 이런 뻔한 인질극을 원했어?”
“인질극?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인질극이 아니라, 영웅과 악당의 대결이야.”
로칸이 키득거리며 기둥의 곁에 섰다.
“하여간, 난 창조주를 곧장 찾을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도 그럴 게 다른 신들에게 물어보면 답이 나올 줄 알았거든. 그 대상 중 하나가 나이아야.”
그녀가 손가락 튕겼다. 이번엔 기둥의 끝에서, 나이아가 등장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잠에 빠져, 기둥 끝에 두둥실 떠올랐다.
“불쌍한 나이아. 카르나가 죽는 꼴을 보고 충격을 받아 저렇게 기절해 버렸어. 게다가 마지막 신자인 에반마저도 신앙을 잃었으니, 곧 존재가 사라지고 말겠지.”
하긴,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만, 하고 로칸이 덧붙였다.
“근데 나이아도, 주변의 신들도 다 창조주에 대해서 모르고 있더라. 애당초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가진 적이 없었어. 그저 자신이 전지전능한 존재인 척 구는 가짜들뿐이었지. 고까워서 멸망하게 놔뒀지, 뭐야.”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말았다. 로칸은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의 감정은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신이 사라진 세상의 운명은 뻔하지. 내 세계는 이렇게- 보다시피, 멸망하게 되었어.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하고, 다른 세계의 자원을 착취하거나 운명을 잡아먹으려는 타락한 신들이 침략해 왔지. 반항도 못 하더라. 내가 너무 곱게 키운 탓인지, 제대로 된 방어도 못 하고 멸망했어.”
이미 인간의 영혼과 융합하여 반푼이 불로불사를 얻은 로칸은 그녀의 세상이 멸망했음에도 죽지 못했다.
카르나의 신성모독처럼 신을 죽이는 무기가 없는 이상, 그녀는 언제까지고 세상을 방랑할 수밖에 없었다.
창조주를 찾을 때까지, 그녀의 기약 없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그 창조주란 작자가 이 모든 걸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야?”
진희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리고 검을 다시 허리춤에 꽂곤, 공성추를 뽑아 들었다. 신성력에 반응하는 카르나의 무기가 로칸의 신성력에 반응했다.
“응. 물론 해결해 주지 않아도, 이유라도 들을 수 있다면 족해.”
내 존재의 이유.
신의 탄생의 이유를 듣고 싶었다.
왜 이런 불합리한 이별을 경험해야 하는지, 굳이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고통받게 하는 그의 의도가 미치도록 궁금했다.
“너 정말, 사람 같구나.”
진희는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로칸의 고민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고민이었다.
자신의 존재의의를 신에게서 찾고, 삶의 방향을 신에게 의지하며, 과거의 후회를 신에게 용서받으려는 인간의 성질이 로칸에게서 보였다.
너무나 인간다웠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몰랐어? 우리는 결국 인간과 같은 결말을 맞이해.”
카사는 라이샤를 사랑하기에 자신을 버렸다.
바르그의 아버지인 정령왕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백성을 잡아먹었다.
나이아는 동생을 질투하고, 인간을 애증하여 미쳐버렸다.
로칸은 자신의 아이가 죽는 걸 방치할 수 없어, 결국 운명을 거슬렀다.
“그렇다면 대체 왜, 우릴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지 않은 거야? 이 세상에 신이 정말 필요해? 그런 비정한 역할은 창조주 혼자 하면 되는 것 아니야?”
그토록 대단한 힘을 가진 자라면 굳이 신과 성벽, 운명이란 잔혹한 시스템을 만들 필요 없을 텐데.
“난 그 작자를 용서할 수 없어. 그러니까 만나야겠어.”
로칸이 눈을 돌려 기둥의 끝을 바라보았다.
“나이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신은 인간을 해치지 못하니까. 하지만 난 반쯤 인간이니까 가능하지.”
“무슨 짓을 하려고?”
“나이아와 내 힘을 합치면, 너를 붙잡아 둘 수 있지 않을까?”
나이아의 몸에서 신성력이 빠져나왔다. 붉은빛의 신성력은 기둥을 타고 내려와, 로칸의 손아귀에 휘몰아쳤다.
박살 난 그녀의 손바닥 위에 어마어마한 신성력의 폭풍이 맴돌았다.
아무리 반신으로 전락한 나이아라고 해도, 신격에서 내려오지 않은 그녀의 힘의 총량은 감히 카르나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진희야, 선택지를 줄게.”
지문은 두 가지다.
“첫째, 네 아버지를 죽여. 그럼 널 살려줄게.”
“둘째, 대신 네가 죽어줘. 그럼 네 아버지를 살려줄게.”
진희는 퉤, 하고 침을 뱉으며 대답했다.
건조하고 세차게 부는 모래바람 탓에 입안이 쓰렸다.
“아빠를 놔주고 나이아도 내려놔. 그럼 목숨만은 살려줄게.”
“내 말을 안 듣는구나?”
“들으라고 하는 부탁인지, 웃으라고 한 농담인지 모르겠네.”
로칸이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그럼 자동으로 두 번째 선택지를 선택해야겠네.”
동시에, 카르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신성력이 진희를 향해 날아들었다.
* * *
‘영웅은 죽일 수 없나 보네.’
수백 발의 화살을 피하며 진희가 서혁을 올려다보았다.
악당인 진희를 노리는 것보다 영웅인 서혁을 죽여 조건을 달성하는 게 더 편할 텐데, 로칸은 진희를 공격해 왔다.
‘화신이기 때문이겠지.’
이유는 짐작이 갔다.
영웅은 신의 화신이라고 했다. 아무리 신의 자리에서 벗어난 로칸이라고 해도, 화신이나 다름없는 영웅을 죽이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이건 위험하긴 하네.”
진희는 혀를 차며 신성력의 화살을 검으로 튕겨냈다.
로칸의 마법은 근본 없는 마구잡이 공격이었다. 카르나처럼 세련되지도, 클로이처럼 체계적이지도 않은 단순한 마법들의 향연이다.
그럼에도 진희는 그녀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끝이 안 보여.”
그래봤자 수십 개의 화살을 쏴대는 카르나와 달리, 로칸은 정말 수백, 수천 개의 화살을 쉴 새 없이 퍼부었다.
하늘이 검붉은 화살로 가득 찰 지경이었다. 마치 유성우처럼 내리꽂히는 화살은 하나하나가 막강한 살상력을 지니고 있었다.
카사의 갑옷조차 통하지 않는다. 단 한발이라도 맞는다면 방어고 뭐고 폭사하고 말 것이다. 마력을 무시하는 신성력의 특징은 진희를 지독히 괴롭혔다.
그럼에도 진희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조금도 당황하는 일 없이, 화살의 비를 완벽하게 피해냈다.
이 과정에서 조바심이 생긴 건 로칸 쪽이었다.
나이아와 로칸의 신성력은 이 화살 비를 온종일 지속하는 것도 가능했다.
진희가 아무리 초인이라 한들, 긴 시간동안 퍼붓는 이 공세를 한 번의 실수도 없이 피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불안감이 떠오르는 건 그녀가 ‘악당’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신은 로칸이 창조주라고 의심할 정도로 강력한 성벽을 가지고 있다.
카르나와 미카일이 오랜 시간 공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흠집조차 나지 않은 이 성벽의 주인이, 진희를 악당이라 규정했다.
창조주가 진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란 것을 공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진희를 이런 막무가내 공격으로 막을 수 있을까?
‘아냐,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로칸은 걱정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궁지에 몰린 이상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이대로 서혁을 내주면, 진희는 결코 로칸에게 다음 기회를 내주지 않을 것이다.
카르나와 솜니움이 죽은 이 시점에서 나이아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미 살 의지를 잃은 그녀를 어떻게든 꼬드긴다 한들, 영웅과 악당이 서로 대적할 생각이 없다면 로칸의 계획이 언제 실행될지 알 수 없었다.
강제적으로 싸움을 유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진희를 죽이진 못하더라도, 큰 상처를 입혀 악당의 운명을 비트는 것만으로도 소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
그때, 로칸은 문득 시선을 느꼈다.
황량한 세상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럴 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생명체라곤 자신과 진희뿐이다. 서한과 현성, 카온은 바깥에 있고, 헤르메스의 총서가 아닌 이상 침입할 방법은 없다.
이 끔찍한 세상에 누군가 있을 리 없었다.
“뒤 안 돌아봐도 돼?”
“……무슨 소리야?”
폭풍과 같은 화살의 세례 속에서도 진희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똑똑히 들렸다. 진희의 도발에 로칸이 인상을 찌푸렸다.
“뒤에서 널 기다리고 있는걸?”
“거짓말하지 마. 이곳엔 아무도 없어.”
“아니, 진짜야. 네가 그리워하는 얼굴일 텐데?”
진희의 웃음소리가 로칸을 괴롭혔다. 무시하기엔 계속해서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로칸은 진희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 그녀의 뒤편으로 마법을 행사했다.
자신의 착각일 것이란 생각과 다르게, 로칸의 마법엔 누군가 맞은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결국 참지 못하고 로칸이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얼굴을 맞이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로칸과 똑같은 옷을 입은, 그녀를 따르던 신자 한 명이 그곳에 서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신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이시여.”
언제나 자신을 부르짖던 사랑스러운 아이 중 하나.
그녀를 찾기 위해 이 세상을 찾아온 순례자였다. 이영한을 만나 로칸의 행방을 찾았지만, 결국 영혼에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고 죽어버린 신관.
이건 함정이다.
로칸은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생각했다.
그가 살아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이 장소에, 이 순간에 등장할 이유도 없다.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로칸은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두 팔을 들어 올려 신에게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 채, 로칸에게 사과의 말씀을 올렸다.
“저희가 부족한 탓에, 당신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왜…….”
왜 그런 소리를 해?
로칸은 차마 다그치지 못하고, 억지로 고개를 돌려 진희를 바라보았다.
진희는 차근차근 로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가 집중력을 잃을수록, 진희는 그녀의 빈틈을 따라 검을 들이민다.
“저희는 당신을 찾으려 했습니다.”
이영한은 신관이 ‘로칸이 세상을 떠난 이유’에 대해서 묻고자 찾아왔다고 했다.
언뜻 듣기엔 로칸을 원망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당신에게 자유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는 로칸에게 멸망한 세상에 돌아올 이유가 없다고 말해주려 했다.
“당신은 저희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모든 역경 속에서 지켜주었고, 일용한 양식을 주었으며, 죄를 사하며 악에서 구하였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저희 모두가 느끼고 있습니다.”
“그만…….”
“그렇기에, 저희는 당신을 이만 놓아드리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