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83화
“너도 괴짜를 믿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잖아.”
서혁은 진희에게 호출기로 괴짜의 일행이 ‘서로를 믿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괴짜는 자신만의 계획에 심취해 있었고, 나이아도 카르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판국이었다.
상처 입은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에반은 누군가 자신의 상처를 돌봐주길 기다려왔다.
그 사실이 진희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 누나가 한 짓을 외면하지 마.”
“…….”
“적어도 이 모든 일의 시작이 네 누나라는 것 정도는 알잖아.”
클로이가 에반에게 어떤 설명도 하지 않은 것이 배려인지, 배척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클로이가 아무리 에반에게 숨기려고 한들, 에반은 그녀가 어떤 악행을 일삼았는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무자비한 실험, 비인증 헌터를 양산해 내는 약, 금강과 비밀스런 거래를 일삼던 브리온. 클로이는 이 모든 일에 관련되어 있었다.
에반은 외면한 것뿐이다. 자신의 누나가 이런 짓을 할 리 없다는 근거 없는 희망을 품고서, 진희라는 복수의 대상에 시선을 고정했다.
갈 곳 잃은 분노와 허망함을 진희라는 대상에 집중한 것이다.
“네가 날 미워하는 건 상관없어. 좋아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하지만 네가 옳다곤 생각하지 마. 네 남매는 중범죄자야. 네가 몸을 담았던 브리온도 마찬가지야.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박정인은 말했지만, 그건 곧 네가 아무것도 ‘모르고 싶었던’ 녀석이라고 말하는 거잖아.”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혼자만 태평했다. 아니, 태평한 척한 것이다.
“똑바로 봐. 넌 피해자야? 아니면 방관자야?”
“나는…….”
에반은 대답하지 못했다. 송곳처럼 파고든 진희의 말이 그의 사고를 정지시켰다.
대답할 말도, 변명할 근거도, 울분을 토할 힘도 그에겐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가슴팍에서 발을 뗀 진희가 단원을 불렀다. 그리고 누워 있는 에반을 지나치며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제대로 생각한 다음 찾아와. 그때도 복수하고 싶다면 상대해 줄 테니까. 하지만 다음에 내 앞에서 검을 들면, 다시는 봐주지 않아.”
두 번은 없다. 허울 좋은 무지를 봐주는 건 이게 마지막이다. 진희는 그 말을 끝으로, 폐교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서한은 에반을 돌아보곤, 진희에게 말했다.
“살려줄 셈이야?”
원한 관계는 빨리 정리해 두는 게 옳다. 곁에 있던 카온은 명령만 내리면 당장에라도 대신 죽이겠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됐어요.”
진희는 힘없이 손을 흔들며 폐교의 문을 열었다.
“요즘 검을 너무 많이 썼거든요.”
진희의 약한 목소리에 서한은 아차 싶어 인상을 찌푸렸다. 최근 진희가 피곤해하고 있음을 모르던 그가 아니었다.
“……너무 보채지 마세요.”
“알아, 내 실수야.”
서한의 뒤에서 현성이 진희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한은 변명하지 않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앞에서 걸어가는 진희의 등이 평소보다 더 작게 보이는 것은 착각이었을까. 모든 사건을 자신의 손으로 매듭지으려는 그녀의 고집에 일행은 안타까운 눈길을 보냈다.
* * *
“오랜만이네.”
폐교의 한 사무실, 소파를 늘어뜨려 마치 거대한 로비처럼 보이는 그곳에서 괴짜와 진희는 마주했다.
단원들은 입구를 지키고 있었고, 그들에게 말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문을 닫고 진희가 방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아빠는?”
“위층에 있어. 나중에 찾아가.”
“널 죽인 다음에?”
“그러든가.”
괴짜가 키득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언뜻 보인 그녀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평소에도 산발이었던 녹슨 금발은 이젠 윤기도 느껴지지 않았고, 녹색의 눈동자가 메말라 핏줄이 서 있었다.
진희는 주변을 둘러보며 방의 중앙, 괴짜의 건너편 소파에 앉았다.
“이거, 서혁이 가지고 있더라.”
괴짜가 주머니에서 호출기를 꺼내 던졌다. 숫자 암호를 이용해 간단한 문장을 주고받을 수 있는 호출기는, 어느새 손때가 타서 칠이 벗겨져 있었다.
“놀라워. 솔직히 이런 삐삐로 연락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마야를 탈출시켰을 때도 참 대단하다 싶었는데, 이런 수단까지 숨기고 있다니, 어떤 의미에선 비범한 영웅답네.”
“넌 알고 있나 봐?”
“네가 악당이고, 서혁이 영웅이란 걸? 응, 알아. 얼마 안 됐어.”
만약 좀 더 일찍 알았다면 계획을 수정할 시간이 있었을 텐데. 괴짜의 눈엔 후회가 가득했다.
“너도 서혁도 입이 근질근질했을 텐데 용케 참았네. 얼마나 재밌었어? 나랑 카르나가 아등바등 계획하고 있을 때, 너희 둘은 결말을 모두 알고 있었겠네? 좋다, 재밌었겠다.”
키히히, 괴짜가 바람 빠진 목소리로 웃었다. 폐교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사뭇 공포스러웠다.
진희는 다리를 꼬고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 응?”
괴짜가 진희에게 다가왔다.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며 다가온 그녀가 진희의 어깨를 붙잡았다. 단내가 풍기는 입이 진희를 집어삼킬 것처럼 벌어졌다.
“너는 네 존재에 의심을 가져본 적 있니?”
“뭔 개소리야?”
예상치 못한 추상적인 질문에 진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괴짜는 진희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퍼부었다.
“네가 환생한 이유가 뭘까? 누가 널 이곳으로 환생하게 만든 걸까? 왜 널 악당으로 지목했지? 네 아버지를 영웅으로 간택한 이유는?”
“떨어져. 침 튀기니까.”
“넌 왜 태어났지? 그렇잖아, 네 어머니를 생각해봐. 그녀는 너를 낳는…… 악!”
“떨어지라고 했지.”
괴짜를 밀어버린 진희는 곧장 허리춤에 검을 뽑아 그녀의 턱에 겨눴다.
괴짜는 거센 기침을 하며 다시 앞으로 나섰다. 검이 그녀의 목을 찌르기 직전에 멈춰 서, 짐승처럼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세상에 우연은 없어. 누군가 설계한 거야. 그게 운명이니까.”
“누가? 신이?”
“그래, 가짜 신이 아니라, 진정한 창조주가.”
그녀는 검을 감싸 쥐었다. 검에 담긴 카사의 신성력이 괴짜의 손아귀를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뼈가 보일 정도로 검을 꽉 쥔 그녀가 강렬한 눈빛으로 진희를 노려보았다.
“운명이란 시스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어?”
“없어.”
“왜? 이상하지 않아? 이 세상은 시나리오가 아니야. 생물에겐 감정이 있고, 불규칙적이고 변칙적인 사물이 존재해. 하지만 운명과 성벽이란 시스템이 이 모든 걸 하나로 통제하고 있어. 존재 사건은? 진리는? 이 운명이란 완벽한 시나리오 아래서 통용되는 변수가 있긴 해?”
괴짜는 지금껏 자신을 괴롭혀 왔던 의문을 한꺼번에 털어놓았다.
“내가 앞으로 살아갈 삶과 죽음의 순간, 태어난 계기가 정해져 있다면, 그걸 정한 창조주의 의도는 뭔데? 왜 신을 만들었어? 감정을 가지면 세상을 무너뜨리는 이 불합리한 존재는, 대체 누가 왜 만든 건데?”
“……너, 대체 뭘 원하는 거야?”
“창조주를 보고 싶다고!!”
콰득, 이윽고 괴짜의 손아귀가 뜯겨나갔다. 너덜거리는 손아귀를 신경조차 쓰지 않고서, 괴짜가 소리 질렀다.
“너와 카르나를 싸우게 만들면 볼 수 있다고 생각했어. 영웅을 희생시키거나 악당을 물리치면 반드시 신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너는, 너희는 내 예상을 빗나갔어.”
삼라만상을 가지고 있다 한들 미래를 완벽히 예측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읽을 때마다 영혼이 깎여나가는 삼라만상은 괴짜라고 해도 쉽게 다룰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배역을 숨기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내 아이들을 돌려받아야 해.”
“……로칸.”
“나 때문에 무너진 세상의 아이들을 돌려받겠어. 창조주라면 가능해. 수천 명의 신을 만들어낸 그 작자라면.”
괴짜가 검에서 손을 놓았다. 그리고 아귀가 벌어져 형편없는 몰골이 된 두 손을 위로 들었다. 마치 신에게 비는 듯한 몸짓으로, 그녀는 주문을 외웠다.
괴짜, 로칸이 가지고 있는 막대한 신성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 하늘 아래 나의 대지를.]
그 순간, 폐교의 사물이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마치 도화지에 물감이 적셔지는 것처럼 주변 환경이 로칸의 색으로 물들었다.
녹이 슨 책상이 말라비틀어진 나무가 되고, 진희가 앉아 있던 소파는 부서진 바위가 되었다.
‘아니, 변한 게 아니야.’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본 진희는 이게 일종의 소환 마법이란 걸 깨달았다.
현실 위에 가상의 세상을 만드는 로칸만의 마법이다. 서혁과 마야를 가두던 저택처럼, 부실한 성벽을 가진 세계가 진희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황량했다.
광야로 보이는 이곳은 모든 자연이 시들어 생기마저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대지는 말랐고 하늘엔 태양이 사라졌다.
멸망한 세계. 성벽이 사라진 세계의 결말.
지평선 너머엔 정체불명의 수백 개의 게이트가 열려 있다.
“굉장한 광경이지?”
그곳에서 로칸이 웃었다.
“이게 내 세계야.”
로칸의 모습이 바뀌었다. 소매가 떨어진 후드티와 반바지가 사라지고, 거적때기가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진희는 그 옷이 신관의 복장이란 걸 깨달았다. 헐어버린 금속의 증표와 천의 그림이 로칸을 상징했다.
“나도 다른 신들과 똑같아. 감정을 깨닫고, 인간들에게 애정을 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멸망을 부추겼지. 어떻게 참을 수 있겠어? 내가 사랑하는 아이가 물에 빠져 죽으려 하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와중에 자연재해가 터지려 하는데,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잖아?”
신이 운명을 거스르는 기적을 행사한다는 이야기는 곧 자신의 존재를 깎아낸다는 것과 같았다.
로칸은 인간을 위해 자신을 버렸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운명을 거슬렀다.
“네 신자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
“아하, 이 세상에도 왔나 보구나? 날 찾는 아이가.”
“맞아, 네가 세상을 떠난 이유를 모르고 있더라. 왜 네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지, 그걸 조사하기 위해 찾아왔어.”
로칸은 입술을 깨물었다. 울 것 같은 눈과 달리, 애써 미친 척 웃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연기에 실패한 초보 배우 같았다.
“아쉽네, 한 번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이것도 운명이겠지.”
운명이란 단어를 입에 담을 때, 그녀의 입술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창조주를 찾아서, 세상을 고치기 위해서 떠난 거야.”
로칸이 발로 땅을 구르자, 거대한 기둥 하나가 바닥에서 하늘로 치솟았다.
“아빠.”
그 기둥의 꼭대기엔 그녀의 아버지, 서혁이 묶여 있었다. 기절한 상태인지 눈을 감은 그는 마력의 밧줄로 꽁꽁 묶여,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기둥 끝에 매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