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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182화 (182/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82화

“……둘 다 아니야.”

괴짜는 손을 내렸다.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눈가엔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신의 등장이야.”

“신?”

“그래.”

괴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정처 없이 거실을 맴돌며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모든 세상엔 신이 있어. 성벽을 세우고 인간들을 만들어낸 신이 하나씩 존재하지. 그게 정령의 형태든, 인간의 형태든, 혹은 자연의 형태든 상관없이. 나도 그중 하나였어.”

니케 로만, 과거엔 로칸이란 이름을 쓰던 신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 존재의 시초는 무엇이었을까?”

인간은 신을 본떠 만든 생물이라 했다. 하지만 모든 세상에서 인간의 탄생은 신의 의도가 아니었다.

“신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운명을 느낄 수 있어. 이 세상의 구조와 인간이란 생명체의 운명, 시간과 자연, 존재의 진리…… 애당초 자아가 없는 신은 곧 무생물과 같으니까.”

“생각이란 걸 하게 되면서 세상을 볼 수 있단 거야?”

“맞아. 그전까지 신은 존재하되. 자신을 인지할 수 없어. 웃기지 않아? 완벽한 신일수록 자아가 없어. 반대로 망가진 신일수록 인간처럼 감정이 생겨나지. 그리고 감정이 생겨난 신의 세상은 반드시 성벽이 무너져. 멸망의 길에 빠진다고.”

필요에 따라 ‘악당’이 등장해서 세상이 멸망하곤 하지만, 그걸 제외하고도 신이 인간의 감정을 가짐으로써 자연적으로 멸망하는 세계가 수없이 많았다.

카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라이샤를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세상을 직접 무너뜨린 신이 되고 말았다.

“왜 신이 이토록 불합리하게 설계되어 있는지, 그게 궁금했어.”

“……신이 자연적으로 탄생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군.”

“당연하지!”

괴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신이라고 지칭하는 것들은 다 가짜야. 나도, 나이아도, 모두 다! 인간이 말하는 신이라면 전지전능해야 하고, 모든 운명과 성벽을 초월하는 존재여야만 해. 그리고 그런 존재가 있어야만, 우리(신)의 존재를 증명받을 수 있어.”

인간을 탄생시킨 것이 신의 뜻이라면, 신이 탄생하게 된 계기 또한 있을 것이다.

괴짜는 확신했다.

“이렇게 불합리하게 우릴 만든 자를 만나고 싶었어. 성벽처럼 조잡한 시스템을 만들고, 불완전한 가짜 신들을 탄생하게 만든 존재. 난 우연을 혐오해. 이 세상에 우연은 없어. 모든 건 운명이고, 계산이며, 누군가의 음모야. 그리고 그걸 모두 안배한 자가 존재해.”

“그게 우리 세상의 신이라고?”

“아마도.”

괴짜는 과장스럽게 팔을 벌리며 말했다.

“그거 알아? 내가 지금껏 봐온 모든 세상을 통틀어, 이 세상만큼 자연을 완벽히 정복한 케이스는 없었어. 자연을 정복하고 세상의 끝을 관찰하며, 진리에 대해 깊게 탐구한 인류는 여기가 처음이야. 그것만이 아니야.”

그녀가 거실에 있는 창문의 커튼을 열어 젖혔다. 운동장에서 열심히 훈련하고 있는 에반이 보였다.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 하는 인간이 이토록 많은 것도 처음 봐. 다른 세상이었다면 운명을 뒤바꾸는 인간들은 극소수고, 그마저도 대부분은 세상의 억제력에 굴복해. 세상의 규모는 지금껏 봐왔던 세계 중 가장 크고, 인간들의 힘도 가장 강해. 이 세상의 신은 분명 다른 신들과 달라.”

“어떤 점이?”

“성벽에 아무런 흠집도 없다는 점이. 모르겠어? 다른 세상이라면 진작 멸망했어. 게이트는 수천 개가 넘고, 마력 덕에 운명을 개척한 사람들은 억이 넘어가. 그런데도 이 세상의 성벽은 상처 입은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아.”

대체 얼마나 광대한 세상을 가지고 있길래 이런 성벽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 세상의 신이라면, 그녀가 모르는 진리에 대해 알고 있을지 모른다.

“창조주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어. 난 이 복잡한 세상의 시초를 알고 싶을 뿐이야.”

“……호기심이야?”

“아니, 내 존재 의의야.”

괴짜가 숨을 크게 쉬었다.

“너희 인간들은 언제나 고민하잖아. 내가 왜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가, 내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내가 태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가. 인간이기에, 그리고 운명을 타고난 존재이기에 할 수 있는 고민이지. 하지만 신은? 우리는? 우리의 존재 이유는 대체 뭐야?”

속사포처럼 내뱉는 괴짜의 말에 서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존재하는 것에 이유가 필요해?”

“필요해!”

그 말이 역린이라도 된 듯, 괴짜가 서혁의 어깨를 붙잡았다. 살갗을 파고드는 그녀의 손톱에 서혁이 작게 신음했다.

“왜 우린 감정을 가지면 안 돼? 즐거움과 미움, 사랑과 분노를 가지면 왜 세상이 멸망해? 왜 우리에게 그런 권리를 준 거야? 내 세상의, 내 아이들을 사랑하면 안 돼? 내 아이들을 괴롭힌 작자들을 괴롭히면 안 돼? 그럴 거면 왜 날 신으로 태어나게 만든 거야? 대체 왜 내게 감정이 생기게 만들었냐고!”

차라리 전지전능한 신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차라리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물건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마치 현대의 기계처럼, 운명을 계산하기만 하는 신이었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너…….”

“너무 늦었어, 너무 늦어버렸다고! 그 신을 찾아서 내 세상을 돌이킬 방법을 물어야 했어. 하지만 난 이미 망가진 후였고, 다른 세상에 찾아가기 위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까지 했지만, 방법이 없었어. 내 세상은 멸망했고, 내 아이는 모두 고향을 잃었어.”

“너, 네 세상의 인간들을 사랑했구나?”

“이제 남은 건 이유를 묻는 것뿐이야.”

괴짜의 눈동자 안에 광기가 휘몰아쳤다. 지금껏 거짓으로 연기하던 광기가 아니었다.

“창조주를 찾아, 내 존재 의의에 대해 묻겠어.”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신의 설계를 바꾸게 만들 거야.”

영웅과 악당.

신이 자신의 세상을 지키기 위해 만든 시스템.

영웅은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의 평화를 지킨다. 악당은 세상의 멸망을 불러일으켜 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두 결말 모두, 마지막에 신이 등장한다는 점에선 똑같았다.

영웅의 희생을 강요하기 위해 등장하거나, 악당에게 죽임을 당하기 직전 나이아처럼 발악하기 위해 등장하거나.

괴짜는 지금껏 수많은 신을 보아왔다.

하지만 아직까지 단 한 명도 그녀의 의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이 세상이라면 다를 거야.”

괴짜는 그렇게 믿었다.

“이 세상의 신이라면 알고 있을 거야.”

이곳이 그녀의 마지막 희망이다.

괴짜의 광기와 소망을 느낀 서혁이 동정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 *

“안녕?”

이윽고, 진희가 괴짜가 자리한 폐교를 찾아왔다.

그녀의 곁엔 서한과 현성, 그리고 카온이 자리했다. 카르나를 물리친 후 진희는 간부들을 불러 폐교로 향했다.

갑옷을 입고 오려던 단원들이었지만, 진희는 전투는 없을 것이라며 그들을 만류했다.

“……왔군.”

폐교의 운동장엔 에반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증오와 공포가 서린 그의 눈을 보며 진희가 쓰게 웃었다.

“내가 진짜 원한 관계가 많긴 한가 봐.”

“처리할까요?”

카온이 먼저 나서 에반을 공격하려 했지만, 진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마무리할 일이야.”

에반, 클로이의 동생이자 진희에게 원한을 가진 마지막 브리온의 헌터.

백금발의 소년을 향해 진희가 앞으로 나섰다.

“무기를 들어라.”

“그럴 필요 없어.”

“……나는 무기도 필요 없다는 건가?”

“비슷해.”

에반의 실력은 클로이에 비견될 수준이 아니었다. 물론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나긴 했지만, 그래봤자 A급 수준이었다. 카온에도 미치지 못하는 에반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진 않았다.

아무리 나이아의 축복을 받았다 한들, 결국 몰락한 신의 기적이었다.

입술을 깨문 에반이 발작적으로 검을 뽑아 진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동안의 수련이 헛되지 않은 듯, 그의 공격은 제법 날카로웠다.

“읏차.”

하지만 그 날카로운 기습은 진희에게 닿지 못했다. 에반의 검을 손등으로 튕겨낸 그녀는 단숨에 한 발 안으로 파고들어 그의 손에서 검을 빼앗았다.

맥없는 승부였다. 검을 빼앗긴 에반은 진희에게 힘없이 밀려났다.

“어?”

단숨에 제압당할 줄은 몰랐는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그를 보며 진희가 말했다.

“돌아가, 이번만은 살려줄 테니까.”

언뜻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말투에 에반이 이를 악물고 다시 달려들려 했지만, 이윽고 진희가 덧붙인 말 때문에 움직이지 못했다.

“박정인 씨 부탁이야.”

“…….”

박정인, 처음 클로이의 존재에 대해 진희에게 알려준 브리온의 스카우터이자, 쌍둥이의 보호자인 여성이었다. 브리온이 공중분해 되던 때, 박정인은 진희에게 찾아와 부탁했다.

“너만은 보호해 달라고 하더라.”

“……이제 와서?”

에반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누나가 죽고 나서야, 날 찾았다고?”

“…….”

진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박정인과 쌍둥이의 관계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진희를 찾아온 박정인의 태도는 매우 정중했다. 에반을 보호해 주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왜 누나는 도와주지 않은 건데?”

“너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진희의 비아냥 섞인 목소리에 에반이 버럭 소리 질렀다.

“아무도 알려준 적 없잖아!”

모든 사건에서 에반은 부외자였다. 브리온과 금강의 음모가 밝혀질 때도, 그로 인해 브리온이 공중분해 당하고 누나의 실종 소식을 접할 때도, 그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상사에게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았고, 결국 그를 찾아온 것은 괴짜였다.

“네가 알려고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고?”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했는데!”

에반이 진희에게 달려들었다. 검도 빼앗긴 그가 무턱대고 주먹을 들고 휘둘렀다. 손목을 잡아채 가슴팍을 걷어차 버리자, 에반은 힘없이 뒤로 자빠졌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단 말이야!”

“징징거리는 것도 정도껏 해.”

진희가 발로 그의 가슴팍을 눌렀다. 일어나지 못하도록 마력을 담아 에반을 누른 진희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혀를 찼다.

“눈을 돌릴 수 있는 기회는 많았어. 브리온이 아니라 근처 정보상을 찾아가든, 나한테 찾아와 따지든, 언제나 방법은 있었지. 하지만 넌 괴짜를 따라왔잖아. 무슨 말로 꾀었는지는 뻔하지. 브리온이 망해가고, 네 상사도 다 도망치는 판국이니까 널 숨겨주겠다고 했겠지?”

괴짜는 완벽한 타이밍에 등장했다. 그도 그럴게, 그녀는 에반이 혼자 버려지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가 브리온에게 버림받고, 홀로 남아 절망에 빠질 때를 노렸다.

아직 어린 에반에겐 괴짜가 구세주처럼 보였을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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