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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181화 (181/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81화

“그래서 노력했어, 너 같은 녀석을 죽이기 위해 죽을 듯이 노력했어! 머리가 터지도록 공부하고, 손가락이 뜯어지도록 수련했단 말이야! 그런데 왜, 왜 이길 수 없는 거야.”

레인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무적처럼 느껴지던 카르나가 패배한 것도, 자신의 노력이 한순간의 물거품이 된 것도.

이렇게 노력했다면 보답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운명을 깨부술 수 있다고 소망했다.

진희는 한숨을 내쉬며 레인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검을 꺼내 들어 레인의 턱을 겨냥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레인의 목이 힘없이 떨어질 것이다. 검 끝에 상처 입은 레인의 턱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적은 네 사정 따위 알아주지 않아. 네가 얼마나 노력했든, 어떤 염원과 복수를 다짐했든 알 게 뭐야.”

“…….”

“분하면 강해졌어야지. 더 강해져서 카르나고 바제트고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지. 악당은 약자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아. 마야에게 들었어, 너 사실 이 세상 출신이라며?”

레인은 떠돌이였다. 버려진 아이였던 그를 거둬들인 건 미카일이었고, 아직 이 세상에 정착하지 않을 때, 그를 본가로 보내 훈련시켰다.

이 세상의 멸망은 레인이 바라던 소망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버리고 학대한 세상에 복수하고 싶다던 아이의 안타까운 소망이, 영웅에 대한 맹목적인 미움을 탄생시켰다.

“누굴 죽이려고 했으면, 너도 죽을 수 있다는 걸 알았어야지.”

만약 레인이 시영이를 죽였다면, 진희가 레인의 앞에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이 세상의 결말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인은 시영이를 죽이지 못했다.

“죽이지 못했다면 죽는 거야. 복수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니?”

복수에 성공한 소라와 이선도 목숨을 걸었다. 그녀들의 인생을 망치게 한 원수를 죽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복수를 시도했다.

결과는 성공이었지만, 실패했다면 죽음만이 기다렸을 것이다.

복수에 선과 악은 상관없다. 권선징악은 이미 옛말이 되었다.

“죽여버릴 거야.”

“죽여보렴. 죽일 수 있다면 말이지.”

진희가 검을 들려 하자, 미카일이 재빨리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진희의 검을 맨손으로 막은 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살려주십시오.”

“꼴값.”

진희가 하하, 마르게 웃었다.

“목숨 구걸이야?”

“예. 돌아가겠습니다. 그저 단장님의 시체만 들고 가게 해주세요.”

진희는 턱을 괴며 미카일의 표정을 살폈다. 고개를 숙여 잘 보이진 않지만,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굴욕적이겠지. 전생에서의 미카일은 사과를 쉽게 하는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검술은 둘째 치더라도 그의 수완은 탁월했고, 유능했으니까. 그는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왜?”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헤르메스의 총서도 드리죠.”

“내가 빼앗으면 그만이잖아?”

“총서는 해석할 줄 알아야만 사용 가능합니다. 그리고 해석할 줄 아는 사람은 전 세계에서 저뿐입니다.”

“인질이 짠데?”

“무엇을 더 원하십니까?”

“흠, 이렇게 하자.”

진희가 다리를 굽혀 주저앉았다.

“카르나의 시체를 주는 대신, 네 동료를 모두 놓고 가. 총서는 가져가도 상관없어. 아니면 카르나를 두고 가. 그럼 너와 네 동료를 보내줄게.”

“무슨…….”

“카르나의 시체야, 동료의 생사야? 하나만 선택해.”

둘 다 포기할 수 없는 선택지였다. 그에게 카르나는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었고, 레인과 마노는 얼마 남지 않은 가문의 마지막 동료였다. 미카일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당신, 최악이군.”

곁에 서 있던 마노가 한숨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테러나 일삼던 너희에게 들을 소리는 아니야.”

진희는 껄렁껄렁한 태도로 미카일에게 강요했다. 어떻게 할 것이냐며 미카일의 손바닥에 잡힌 검을 흔들었다. 그의 손에 핏방울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전…….”

미카일이 이를 악물며 마노를 돌아보았다. 마노는 두 눈을 감은 채 각오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인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설마 그럴 리 없다면서, 미카일의 옷깃을 잡았다.

“단장님의 시체를…….”

미카일이 선택을 끝내고 말하려던 직전. 진희가 그의 말을 끊었다.

“좋아! 됐어! 그냥 둘 다 가져가!”

“…….”

“아하하, 농담인데 왜 그렇게 진지해?”

악랄하다. 마노는 참담한 심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레인은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미카일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미카일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진희는 미카일이 카르나를 선택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부활시킬 수 있으니까.’

방법은 모르겠지만, 미카일에겐 영혼을 다뤄 환생을 유도할 수 있는 기술이 존재했다. 카르나만 있으면 가문을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미카일은 판단했겠지.

카르나의 시체가 마노와 레인의 생사보다 무거운 이유였다.

미카일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카르나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솜니움의 시체는 서서히 먼지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르나가 쥐고 있는 손만은 아직 그 형태가 뚜렷했다.

힘없는 손길로 카르나의 시체를 껴안아 든 그가 게이트를 향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마노가 따랐고, 레인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잘 봤어? 이게 네가 믿는 저 녀석의 실체야.”

“…….”

설마 자신을 버릴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공성추를 다루며, 천재적인 소질을 지닌 레인은 미카일의 자식과도 같은 존재였다.

진희처럼 축복받은 사람들을 증오하는 만큼, 레인은 버림받은 자신을 키워준 레인에게 충성을 뛰어넘어 애정마저 가지고 있었다.

미카일의 명령이라면 자살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맥없이 버림받는 상황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때?”

“…….”

레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초점이 없는 동공을 보며, 한참 웃던 진희가 이내 표정을 바로 했다.

“재미없네.”

카르나를 죽이고, 그의 동료들에게 복수하면 즐거울 줄 알았다. 목표는 완벽히 이뤘다. 카르나를 죽이는 것도, 바제트를 배신했던 미카일에게 복수하는 것도 모두 완수했다.

그러나 예상처럼 유쾌하진 않았다.

악당처럼 웃고 싶었지만, 그녀는 아직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난…… 난 어떻게 해야 돼?”

레인이 고개를 돌려 진희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또래에 어울리는 울상이 된 레인을 보며 진희가 대답했다.

“알아서 생각해. 네 인생 상담 들어줄 생각 없어. 뭐, 장래 생각하기 전에…….”

진희는 약초밭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직 게이트에 도달하지 않은 미카일을 번갈아보며 중얼거렸다.

“죗값을 치르는 게 먼저지.”

“헌터 방위대에서 나왔습니다. 미카일 및 그의 일당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십시오!”

현성과 방위대의 대원들이 등장했다. 미카일이 절망 어린 눈으로 진희를 돌아보았다.

모든 게 쇼였다. 카르나의 시체를 들고 동료와 거래를 하게 만든 것도, 다 살려주겠다고 보내준 것도 모두 거짓말.

“현성 씨가 실적이 필요하거든. 잡혀줘야겠어.”

미카일이 황급히 게이트를 열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달려온 현성이 그를 제압했다. 마노는 허탈하게 웃으며 두 손을 들었고, 카르나의 시체가 바닥에 쓰러졌다.

“안 돼, 안 됩니다! 제발, 놔주세요, 안 돼. 우리가 이렇게…….”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할 리 없어.

승리만을 해오던 악당들의 체포는 너무나 조잡했다. 대원들에 의해 팔이 묶인 채로 입에 재갈이 물린 미카일이, 눈물을 흘리며 카르나를 바라보았다.

카르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여전히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약초밭의 진흙 위에 쓰러져 있을 뿐이었다.

“……당신은 악당이 맞아. 영웅이 아니야.”

이윽고 레인도 체포되었다. 그는 순순히 수갑을 차며 진희를 향해 말했다.

“당신도 우리처럼 최후를 맞이하길 바라. 영웅에게 당해서 말이야.”

“글쎄.”

진희는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성의 없이 손을 흔들었다. 현성이 미카일 일행을 잡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우리 아빠가 영웅이라서 말이야. 그런 일은 아마 일어나지 않을걸.”

* * *

“말도 안 돼.”

카르나의 최후, 미카일의 체포, 모든 상황을 지켜본 괴짜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진희가 돌아온 직후 나이아를 통해 던전 안의 시야를 밝혔다.

생생하게 펼쳐진 카르나와 진희의 싸움은 괴짜가 바라는 양상이긴 했다. 승자가 누가 되어도 상관없었다. 카르나가 이겨 세상에 멸망이 찾아오든, 진희가 이겨 세상을 지키든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가 바라는 건 ‘신’의 등장이었다.

“다 알고 있었구나?”

괴짜가 서혁에게 고개를 돌렸다. 괴짜에게 제압된 서혁은 마력의 끈에 목이 졸린 채로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응.”

“대체 어떻게?”

서혁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지금껏 일어난 일에 대해 설명했다.

호출기를 통해 마야와 연락해서 그녀를 탈출시키고, 진희와 간헐적인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이야기부터, 괴짜의 위치를 알 수 있도록 진희에게 신호를 보냈다는 것까지.

괴짜는 진희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기에 방심했지만, 진희는 괴짜의 행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서혁에게 보고받는 입장이었다.

“사실 진희를 만나기 직전까진 카르나보다 널 노리고 있었어.”

진희는 괴짜를 습격해서 나이아를 붙잡으려 했다. 언제나 뒤에 숨어 계략을 꾸미는 괴짜를 먼저 제압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혁과 진희가 서로를 마주한 순간, 계획은 달라졌다.

바제트의 기억을 되찾은 진희는 악당이 되어 있었고, 진희가 악당이 된 순간 서혁이 새로운 영웅으로 간택받았기 때문이다.

“만약 영웅과 악당이 서로 대적해야 하는 게 운명이라면, 진희는 결코 카르나에게 패배하지 않을 테니까.”

단순한 논리였다.

이미 수많은 사례를 통해 선과 악의 대립이란 시나리오의 클리셰를 확신한 서혁은, 진희에게 곧장 카르나를 찾으라고 말했다.

“악당은 영웅이 아니면 쓰러뜨릴 수 없잖아.”

서혁은 진희의 승리를 장담했다. 카르나가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한들, 결국 진희에겐 패배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

마치 하늘이 도와주는 것처럼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유나는 나이아의 수정구를 통해 게이트를 여는 방법을 찾아냈고, 마야를 설득한 진희는 본가의 좌표를 알아내는 데 성공한다.

결과적으로 카르나의 본가는 멸망했고, 카르나는 진희에게 패배했다. 미카일 일행은 헌터 방위대에게 체포당해 심판을 기다리고 있으며, 괴짜가 바라는 영웅과 악당의 대립은 성사되지 않았다.

“하, 하하.”

괴짜는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채 힘없이 웃었다.

그녀가 바라는 전개가 아니었다.

정의와 악이 대립하는 동화 속의 이야기는 현실에 적용되지 않았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서혁은 그간 가장 궁금했던 일에 대해서 질문했다.

“네 목표는 뭐야? 세상의 멸망? 아니면 카르나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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