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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180화 (180/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80화

아차. 카르나는 황급히 소리치려 했다. 진희의 빈틈을 노리기 위해, 열린 게이트에 몰래 잠복하고 있던 레인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긴 시간 기습을 노리고 있었던 레인은 이미 진희의 등에 온 감각이 집중되어 있었다.

증오스러운 영웅, 자신이 갖지 못했던 축복을 가진 적에게 복수할 수 있다는 생각에 레인의 눈엔 희열마저 담겨 있다.

마노가 만들어준 환영 마법을 벗고, 레인은 공성추를 들고 사납게 돌진해왔다.

“안 돼, 레인!”

함정이다.

모든 계획이 들통났다. 진희는 환영을 이용해 숨어 있던 레인의 존재를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카르나가 공성추를 들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곧 기습을 준비하는 레인에게 공성추가 들려 있다는 이야기다.

이영한 회장이 말한 것처럼 영웅과 신을 죽이기 위해선 공성추만 한 무기가 없기에, 그들이 공성추를 반드시 들고 오리라 예상했다.

그래서 기습할 빈틈을 일부러 만들어주었다.

레인이 자신의 등을 찌를 수 있도록.

모든 게 계획대로였다. 카르나의 계획과 진희의 계획은 언뜻 과정이 유사했다.

레인이 공성추를 이용해 기습한다. 카르나도 진희도 그걸 바랐다.

그러나 한 가지, 카르나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다.

“이 녀석은 영웅이 아니야!!”

신의 기적을 하사받은 영웅이 아니다. 그녀는 악당이었다. 공성추의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카르나가 레인에게 소리치기 직전, 이미 레인은 진희를 향해 도약했다. 공성추를 그녀의 등을 향해 사정없이 꽂았다.

카사의 갑옷을 해제하고, 검을 버린다. 이제 진희에게 검은 필요 없다.

“기나긴 악연이었어, 안 그래?”

“어?”

설마 진희가 검을 버리고 뒤로 돌지는 몰랐는지, 레인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진희가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공성추의 끝을 손바닥으로 받아내고, 레인을 걷어찼다.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이 공성추에 의해 뚫리는 것도 괘념치 않고, 그대로 허공으로 크게 점프했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 카르나의 검이 세차게 지나갔다.

뻔한 공격이다. 마음이 급해진 카르나의 검을 읽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손바닥에 박힌 공성추를 뽑아낸 그녀가 피를 털어낸 후, 자신을 황망하게 바라보는 레인과 카르나를 향해 말했다.

“무기 고마워. 이제 신을 죽일 수 있겠어.”

악당인 진희가 카르나에게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자, 그럼.”

진희는 바닥에 주저앉아 절망에 빠진 레인을 지나치고, 곧장 약초밭의 중앙을 향해 달려갔다.

“안 돼.”

“하하.”

“안 돼!”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카르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전투에 정신이 팔려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솜니움!”

그곳엔 고이 잠든 그의 연인이 누워 있었다. 진희는 사정없이 솜니움의 멱살을 들어 올렸다. 분홍빛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색색의 약초밭 위에서 환상적인 광경을 연출했다.

그녀는 솜니움을 들고 방긋 웃어 보였다.

“이걸 원하니?”

“내놔!”

공성추에 찔리게 되면 솜니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신성모독의 속성을 담은 아티팩트는 신의 시체를 먼지로 만들 테니까. 부활은커녕 나이아의 분신도 빙의할 수 없게 된다.

이영한 회장에게 공성추의 위력을 들었던 진희는 이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카르나가 득달같이 달려들기 직전, 그에게 솜니움을 던졌다.

“솜니움!”

힘없이 날아오는 솜니움을 받아 들기 위해 카르나가 두 팔을 벌렸다.

“단장님!”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레인이 경악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카르나는 무방비한 모습으로 솜니움을 안으려 했다.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솜니움을 품 안에 안전하게 껴안았다.

“그렇게 좋다면, 서로 같이 저승에 가지 그래?”

이 빈틈을 진희가 놓칠 리 없었다. 그녀는 한껏 공성추를 잡아당겨, 깊숙이 찔러 넣었다.

목표는 솜니움의 등. 그리고 그를 안고 있는 카르나까지.

카르나가 환생을 거듭할 수 있던 이유는 그가 신성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공성추는 신성력을 모두 무효화시키는 능력을 지녔다.

신의 힘을 다루는 자들에겐 쥐약이나 다름없는 무기라고 볼 수 있겠지.

“솜니움.”

보물을 되찾은 것처럼, 안도하는 얼굴로 솜니움을 안은 카르나가 보였다.

진희의 눈동자에 얼핏 동정이 서렸다.

옛적 바제트를 보고 동경에 빠져 있던 제니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은 빛바래버린 추억이다.

“잘 가, 제니트.”

그리고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바제트를 배신하고 사체까지 이용했던 악랄한 제니트. 바제트는 그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진희는 아니었다.

이것이 복수일지, 아니면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적들을 처치하는 가벼운 손속인지는 알 수 없다.

마치 주마등을 경험하는 것처럼, 솜니움의 등을 찌르는 감촉과 함께 온갖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공성추는 진희의 손을 떠났다. 강력한 찌르기가 솜니움과 제니트를 꿰뚫었다.

“……아.”

그리고 파열되었다.

번개처럼 날아간 신성모독은 신과 신의 연인을 하나로 묶었다.

“솜니움…….”

솜니움의 가슴팍을 꿰뚫은 추는 카르나의 심장에 닿았다. 신성한 영혼을 감염시키는 카르나의 무기는 결국 주인의 곁으로 돌아왔다. 뜻하지 않게, 바라지 않는 형태로서.

허무한 최후였다. 하지만 바라는 최후이기도 했다. 솜니움과 함께 마지막을 맞이한다는 결말은 언제나 꿈꾸던 일이었다.

시체를 정지시켰던 마법이 풀린 상태로 큰 충격을 받은 솜니움의 눈꺼풀이 올라갔다. 마치 잠에 깬 것처럼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솜니움의 얼굴을 바라본 카르나가 작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

넌 언제나 아름다운 그대로야. 대답하지 않은 솜니움이 쓰러지지 않도록 꽉 껴안으며, 그는 무릎을 꿇었다.

솜니움의 고개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고, 그는 건너편에 서 있는 진희를 올려다보았다.

진희의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무표정하지만, 조금의 미동도 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진희에겐 바제트가 겹쳐 보였다.

“누님,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인가 봐.”

카르나는 전생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바제트를 동경하던 제니트의 감정과, 그녀의 업적 때문에 열등감에 시달려 점점 미쳐가는 그의 인생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바제트를 암살하고 그녀의 시체를 이용할 때, 제니트는 이런 미래를 예상하고 있었다.

바제트가 돌아와 자신을 심판하리란 미래.

“……아니다, 운명이라기보단 내 희망이었어.”

카르나의 목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가슴팍에서 시작된 신성모독의 저주가 온몸에 퍼져 나갔다. 곧 죽는다는 실감이 그를 엄습했다.

카르나가 환생하고 바제트, 진희를 마주했을 때 처음 든 감정은 그리움이었다. 동경하던 동화 속 기사가 눈앞에 나타난 듯한 기분.

우스운 일이지만 그녀를 보고서 카르나는 권선징악의 결말을 기대했다.

그는 언제나 악당이었다.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악당이었으며, 사랑을 위해 수많은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럼에도 최후는 찾아오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진희가 그 최후를 내릴 사신이 아닐까 짐작했다.

‘설마 영웅이 아닐 줄은 몰랐지만.’

이 세상은 잔혹했다. 그가 지나쳐온 어떤 세상보다도 잔인했다.

악당은 카르나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악당인 줄 알았지만, 사실 이 세상은 카르나에게 위협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카르나, 니케 로만로도 부족했다.

이 세상을 멸망시킬 칼자루는 처음부터 진희가 쥐고 있었다.

‘나는 조연이었구나.’

서서히 눈이 감겼다. 솜니움을 꽉 껴안고, 이번엔 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으며 카르나가 중얼거렸다.

“어쩌면, 이런 퇴장도…….”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사라지는 조연이라니, 악당의 처참한 최후보단 훨씬 괜찮지 않은가.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하던 그때, 드디어 진희가 다가왔다.

그녀는 솜니움의 등에 박힌 공성추를 뽑았다.

털썩, 힘없이 무너진 솜니움과 그를 껴안은 카르나를 본 진희가 한숨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잘 자라, 망할 동생아.”

진희가 처음으로 바제트가 된 순간이었다. 그녀는 서로 깍지를 낀 둘의 손을 하나로 모아주고, 마치 연인이 껴안고 잠든 것처럼 둘의 시체를 나란히 정렬했다.

셀 수 없는 세월 동안 신을 사랑했던 남자의 마지막은 아름다웠다.

알록달록한 꽃들은 그들의 관을 아름답게 치장했다.

* * *

“안 돼,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어!”

이윽고 게이트에서 미카일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전투에 방해되지 않도록 마노와 함께 게이트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던 듯했다. 그는 처참한 몰골로 달려와 카르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악!”

“손대지 마. 잘 자고 있잖아.”

진희는 그의 가슴팍을 걷어차며 말했다. 제니트, 카르나에게 좋은 감정은 없었지만, 바라던 최후를 맞이한 둘을 떨어뜨리고 싶진 않았다.

바닥에 쓰러진 미카일이 독기에 가득 찬 얼굴로 진희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할 말은 없는 것인지,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다. 진희는 공성추를 잡고, 미카일을 데려가려는 마노를 향해 말했다.

“너희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그 시설은 이미 접수했으니까.”

“……죽였나?”

“경비병들은 대부분. 애들은 살렸어.”

“고맙다.”

패배를 직감한 마노는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승자의 앞에서 자비를 바라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카르나마저도 쓰러뜨린 진희를 이길 방법은 없었다. 마노의 마법도, 미카일의 기술도 소용없다.

마노는 미카일을 데리고 도망가려 했다. 진희가 당장 자신들을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왜.”

하지만 레인은 물러날 수 없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진희에게 다가갔다.

“왜 너 같은 녀석이, 다 가지고 있는 거야?”

운명에 버림받았던 레인은 진희란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다.

선택받은 재능, 행복한 가족과 친우, 행운으로 가득 찬 인생. 진희는 레인이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열등감으로 불타오르는 레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진희가 대답했다.

“내가 잘났으니까.”

단순한 대답이었다. 그 자신만만한 대답이 레인의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

“레인!”

레인은 있는 마력을 모두 끌어올려 진희를 향해 내질렀다. 마노가 기겁하며 그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검은 마력은 진희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급하게 만들어낸 마법은 어지러운 형태로 날아왔지만, 진희가 들고 있던 공성추를 휘두르자 단번에 자취를 감추었다.

“어째서! 왜 우리에겐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거냐고!”

진희는 인상을 찌푸리며 레인을 바라보았다.

“너희 단장이 가르쳐 주지 않았니?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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