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79화
마야를 언급하자 밴이 또다시 이를 갈며 한마디 하려 했지만, 진희는 그의 턱을 억지로 닫으며 말했다.
“하긴 기사단에서 배운 걸 그대로 한 거니까, 나도 할 말 없나.”
기사단에서 견습 기사를 대하는 태도와, 병사를 대하는 방식은 파란기사단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항상 전쟁의 선두에 서던 진희의 병사들은 다음 전투에서 죽지 않기 위해 실전과 같은 훈련을 거듭했다. 아무래도 카르나가 원하는 그림 또한 이와 같았을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군요.”
훈련 장비들을 살펴보던 카온이 중얼거렸다. 어지간해선 감상을 내뱉지 않던 그마저도 질릴 정도로 장비들의 상태는 끔찍했다.
닫힌 세계라는 걸 증명하듯 수십 년 된 낡은 장비들엔 핏자국이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
진희는 벤을 완전히 제압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그럼 그 솜니움이란 녀석한테 가볼게.”
“어디에 있습니까?”
“찾아보면 있겠지. 늦진 않을 테니까 애들 잘 데려가.”
카온이 알겠다고 대답하며 돌아섰다. 진희도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시설의 규모는 크지 않았기에, 그녀는 오래 지나지 않아 굳건히 잠긴 방을 발견했다.
힘으로 방의 잠금을 부숴 버리고 문을 열자, 거대한 방 안에 화려한 침대가 놓인 것을 발견했다.
“무슨 인형 놀이야?”
진희는 헛웃음을 지으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보석으로 치장된 침대의 캐노피 아래엔 창백한 얼굴의 사람이 누워 있었다.
나이아와 똑 닮은 얼굴, 그러나 그녀보다 좀 더 옅은 분홍빛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죽었네.”
말이 봉인이지, 솜니움의 몸은 이미 시체나 다름없었다. 심장은 정지했고 근육이 굳어 온몸은 통나무처럼 뻣뻣했다.
죽은 직후, 사후강직이 시작된 몸을 마법을 통해 억지로 붙잡아둔 것에 불과했다.
“너도 어지간히 망가져 있구나.”
마법이 풀리면 사흘 내로 부패가 진행될 인간의 시체였다. 이 시체에게 옷을 입히고, 화려한 침대에 안치한 카르나를 떠올렸다.
솜니움의 시체엔 아무런 영혼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희도 알 수 있는 사실을 수십 번 환생한 카르나가 모를 리 없었다.
나이아의 분신, 그리고 불완전한 신인 솜니움은 죽었다. 영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시체를 되살릴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생이 아니라 분신을 새로 만드는 방법이 하나 남아 있었다.
“……나이아.”
나이아의 영혼에서 분신을 잘라내, 또 한 명의 솜니움(환상)을 만드는 것이다. 영혼은 떠났더라도 완벽하게 보존된 시체가 있으니, 이것에 분신을 융합시키면 새로운 솜니움을 만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이걸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썩어버린 집념이라 해야 할지.
진희는 한숨을 내쉬곤 솜니움을 들었다. 딱딱한 신체와 달리 그의 무게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솜니움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게 캐노피로 꽁꽁 싸맨 후, 진희는 시설을 나서 게이트로 향했다.
깜짝 등장할 차례였다.
악당답게.
* * *
“여긴 여전하네.”
인연을 정리할 마지막 장소는 이곳이 딱 알맞았다. 진희는 널따란 들판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이곳은 강남에 있는 던전, 약초밭이었다.
진희가 처음으로 테러범들과 마주한 곳이며, 이 모든 악연의 시작을 알린 장소이기도 했다.
그녀의 곁엔 솜니움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닫힌 세계에서 나온 탓인지, 그의 몸은 점차 부패하기 시작했다.
향기로운 약초들 사이에서 썩어가는 미인의 시체라, 마치 시의 한 구절 같다며 진희가 낮게 웃었다.
“만약 이곳에서 시영이를 죽게 놔뒀다면, 서한 씨의 운명은 크게 바뀌었겠지?”
테러범, 미카일의 목표는 시영이의 암살이었다. 금강의 막내인 시영이를 죽이게 된다면 그를 알게 모르게 아끼고 있던 서한도 큰 변화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테러범을 잡기 위해 더 강해지고, 이윽고 금강의 후계자로 발탁되었을지도 모르지.
“현성 씨는 테러범을 쫓지만, 잡지 못했을 테고.”
수많은 유력자를 공격한 테러범을 막기 위해 현성이 노력할 테지만, 용의주도한 미카일의 수법 때문에 그는 허탕을 치고 말 것이다.
정의에 집착하는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테러범에 열중한 나머지, 헌터 관리본부의 정치질에 당해 경질될 수도 있다.
“카온은 죽을 운명이었지.”
진희가 없었다면 신림의 까마귀파는 여전히 그 일대를 평정했을 테고, 영혼에 큰 상처를 입은 카온은 태양 빛을 쐬지 못한 채로 감옥에서 죽어갔을 것이다.
“삼인방과 청하도 마찬가지고, 민하는 잡혀갔으려나.”
보육원의 운명도 뻔했다. 구세주는 나타나지 않고, 아이들은 방치된 채로 끔찍한 운명에 휩싸일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운명이 뒤바뀌고 말았다.
바로 이 자리에서, 진희가 헌터가 된 이후로.
“웃긴 일이지. 영웅인데도 운명을 바꾸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영웅은 악당을 물리친 후, 희생당해. 운명이 바로잡힌 세상에선 영웅이 마지막 남은 흠이니까.”
“빨리 왔네?”
진희가 고개를 돌렸다. 입구가 아닌 게이트를 열어 카르나가 걸어왔다. 이전에 봤을 때와 달리 온갖 장비를 두른 모습엔 전의가 느껴졌다.
“마지막 권유야, 누님. 그렇게 희생당하고 싶지 않으면 솜니움을 내게 넘겨.”
진희는 솜니움의 사진을 찍어 짧은 편지와 함께 카르나에게 전해주었다.
카르나는 자신이 잘 숨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진희는 그의 위치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의 본가엔 그를 추적하는 아티팩트가 수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를 들고 돌아온 그녀는 마치 협박장처럼 내용을 꾸며 카르나를 이곳으로 오도록 유도했다.
아직 상황을 모르는 카르나는 진희가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얘는 이미 죽었던데, 언제까지 붙잡고 있을 셈이야?”
“솜니움은 죽지 않았어.”
“죽었어. 하루만 기다려보면 부패할 텐데, 지켜볼래?”
“그렇게 놔두지 않아. 다시 마법을 걸 거야.”
“소용없다고 생각 안 해?”
“안 해.”
진희는 안쓰럽다는 듯이 카르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진심이었다. 솜니움이 살아 돌아올 거라고, 이건 시체가 아니라는 걸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그녀는 카르나를 처음으로 동정했다. 그는 진희가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동안 이 허무한 일을 되풀이해 왔다.
보답받을 수 없는 사랑이었고, 어린아이 투정보다도 유치한 소망이었다.
“내 권유를 듣지 않는다면, 하는 수 없지.”
카르나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첫 만남 때와는 다른 비장함이 보였다. 더 이상 방심하지 않겠다는 듯, 그의 주변엔 솜니움의 신성력이 맴돌기 시작했다.
진희는 라이샤의 검과 바르그를 양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라차차,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편 그녀가 서울에선 보기 힘든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참 웃겨, 결국 신이 영웅을 부릴 만큼 부려먹고, 마지막엔 희생시킨다는 엔딩이잖아.”
“누님이 자초한 일이야.”
“난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는데 말이지.”
카르나와 진희가 격돌했다. 거대한 신성력과 금색의 마력이 부딪히자, 약초밭의 모든 자연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카르나는 검과 신성력을 이용해 침착하지만 날카로운 공격을 퍼부었고, 쌍검을 사용하는 진희는 노도와 같은 공격을 휘두르며 카르나에게 접근했다.
“미친.”
신성력을 이용해 진희의 검을 튕겨내고 뒤로 도약한 카르나가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더 강해졌어.”
진희의 검술은 전보다 날카로워졌다. 이젠 검술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인간이 따라 할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니다.
검에 의지가 있는 듯, 물리법칙을 초월한 것처럼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검격은 카르나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재앙이었다.
운명의 선택을 받은 자들은 끝없이 성장하곤 한다.
승리의 운명을 타고난 진희는 말할 것도 없다.
“실은 말이야.”
숨 막히는 교전 사이에 진희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집중하고 있던 카르나는 진희의 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마를 노리는 진희의 검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숙인 그의 턱을 걷어차며 진희가 말을 이었다.
“바제트의 기억을 마주했을 때 약속한 게 있거든.”
“커헉!”
꼴사나운 신음을 내며 카르나가 뒤로 넘어졌다. 곧장 낙법을 취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다가간 진희가 그의 옆구리를 다시 한번 걷어찼다.
“좀 더 이기적으로 살자고 했어. 그도 그렇잖아? 전생에서 동생에게, 따르던 국가에게 배신당해서 독주 먹고 죽었잖아. 얼마나 억울해?”
“윽, 무슨 말을…….”
두 번 당하지는 않겠다는 듯 낙법 대신에 검을 휘둘러 진희가 다가오는 것을 막은 그가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수십 개의 화살을 날렸다.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공격력을 지닌 화살을 부드럽게 피해낸 진희는 검기를 만들어 날렸다. 금색의 거대한 참격이 날아오자, 카르나는 재빨리 몸을 굴렸다.
신성력의 화살이 약초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진희의 검기가 주변 나무들을 모조리 쓰러뜨렸다.
“그래서 바제트의 기억을 받고, 나와서 클로이를 죽이는 순간 깨닫게 되더라.”
그 던전에 입장하기 전까진 모든 이들이 진희가 영웅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진희의 행보는 악당보단 영웅에 어울렸으니까.
하지만 알다시피, 영웅은 마지막에 희생하는 선인이어야 한다. 이기적인 자는 영웅이 될 수 없다.
성벽을 위해서, 신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비로소 영웅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게 올바른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진희는 그 배역을 받아들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내가 왜 희생해야 하는데?”
“……뭐?”
다음 공격을 하기 위해 신성력을 끌어모으던 카르나는 진희의 짜증 어린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그건 누님이 결정할 일이 아니야. 영웅으로 간택받은 자는 자의든 타의든, 결국 마지막엔…….”
“그럼 내가 영웅을 포기하면 되잖아.”
마치 떼쓰는 것 같은 그녀의 말에 카르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간단히 끝날 일이 아니었다. 신의 간택이란 거절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무조건적인 신의 축복은 저주와도 같았다. 신이 직접 운명을 재단하는 영웅은 승리와 희생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진희의 말은 결국 신의 의지를 자신의 손으로 벗겨내겠다는 말과 같았다.
“그게 왜 불가능해?”
“그야…….”
신이니까. 신의 기적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이니까.
그렇게 대답하려던 카르나는, 문득 떠오른 의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 또한 신에게 맞서던 자가 아니던가. 나이아를 공격하고, 그녀의 세상마저도 멸망시킨 ‘악당’이 그였다.
세상을 멸망시키는 악당, 악마는 신의 기적을 피할 수 있다.
악당이라면 가능하다.
“……윽!”
카르나가 잠깐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단숨에 그를 향해 도약한 진희가 검을 휘둘렀다. 내려찍는 진희의 쌍검을 막기 위해 카르나가 검을 가로로 들어 막아냈다.
철과 철이 부딪히는 사나운 소리가 울리며 아슬아슬한 대치가 이어졌다.
카르나가 무게중심을 잃으면 진희의 검이 그의 어깨를 사정없이 내려칠 것이고, 진희가 힘이 빠지면 카르나가 그녀의 검을 걷어내 반격할 것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그 순간, 진희는 카르나에게만 보이도록 웃었다.
“어때, 딱 좋은 빈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