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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178화 (178/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78화

항상 세간의 이목은 클로이가 받았다. 화려한 검술을 자랑하는 클로이와 비교되는 것도 물론 있었지만, 서혁은 그저 에반의 실력이 클로이보다 못했기 때문이라 판단했다.

그렇기에 에반은 클로이를 이긴 진희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신의 기적으로 아무리 강해진다 한들, 누나를 이긴 원수에겐 당해낼 수 없으리라 지레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가짐에서 졌네.”

에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적의가 담긴 살벌한 눈으로 서혁을 노려볼 뿐이었다.

한숨을 내쉰 서혁이 주변에 있던 물통을 그에게 던졌다.

“마셔, 입에서 단내나겠다.”

“……당신을 인질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아서라, 결말은 똑같으니까.”

서혁을 인질로 삼는다 해도 진희는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오랜만에 진희를 마주한 서혁은 확신했다.

“넌 진희를 이길 수 없어. 그럴 운명이야.”

서혁의 말에 발끈한 에반이 버럭 소리 지르려 하다, 서혁의 얼굴에 감도는 서글픈 감정에 인상을 찌푸렸다. 에반을 무시하는 말투였지만 그의 눈엔 걱정이 가득했다.

서혁의 속셈을 몰라 말이 없어진 에반을 놔두고, 서혁은 자리를 떠났다.

“짐 챙겨둬.”

“예?”

“곧 이곳을 나가게 될 거야. 바빠질 테니까, 너희 집으로 돌아갈 준비해.”

“서진희가 이곳으로 옵니까?”

“아니, 괴짜가 찾아갈 거야.”

서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폐교의 문이 열리고, 괴짜가 서혁을 향해 달려왔다. 평소의 느긋한 얼굴은 어디 가고,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포악한 표정으로 서혁을 붙잡았다.

“서진희, 지금 어디 있어?”

“놓쳤구나?”

“당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어떻게 그녀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괴짜를 대신해, 그녀를 따라 천천히 걸어오던 나이아가 한숨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우습군, 로칸이 이 정도로 당황할 줄이야.”

“조용히 해, 나이아. 농담으로 넘길 상황 아니니까.”

“그녀의 별이 잠깐 안 보인 게 무슨 문제인가? 그저 게이트를 넘나든 것일 텐데.”

“그게 아니야. 그녀는 던전으로 들어간 게 아니야.”

거대한 운명을 지닌 인간을 판별할 수 있는 괴짜는 곧잘 진희를 별이라 칭하곤 했다. 괴짜는 진희와 같은 국가에 있다면 언제나 그녀의 운명을 느낄 수 있었는데, 별안간 진희의 운명이 느껴지지 않기 시작했다.

“다른 세상으로 향했어. 내가 추적할 수 없는 곳으로.”

괴짜는 진희가 어떤 던전으로 향하든 그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삼라만상의 모든 눈과 귀는 그녀를 향해 열려있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라면 괴짜는 진희의 운명을 숨 쉬듯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진희의 기척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진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그런 세상은 내가 아는 한 하나뿐이야. 카르나의 본가.”

카르나의 아이들이 양성되는 훈련소이자, 그가 환생할 때를 대비해 자원을 비축하는 닫힌 세계.

솜니움이 봉인된 그 세계라면 괴짜가 진희의 영혼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설명된다.

“대단하신 괴짜님께서 왜 이렇게 당황해? 보육원엔 마야가 있잖아. 공간 마법을 다룬다는 길드의 마법사도 같이 있으니까, 그 세계로 가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예상 못 했어?”

“내 이야기는 그게 아니야!”

괴짜가 서혁의 멱살을 잡아채며 소리 질렀다.

“왜, 왜 서진희가 이 세상에 없는데, 아직까지 영웅의 기척이 느껴지냔 말이야!”

영웅인 진희가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면, 이 세상 영웅의 자리도 공석이어야 했다.

하지만 괴짜에겐 느껴졌다.

이 세상엔 아직 영웅이 건재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진희가 영웅이라면, 아니, 진희는 영웅이어야만 했다. 괴짜는 영웅의 기운이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불안함이 느껴지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서혁은 드디어 때가 왔다며 벅찬 감격에 휩싸였다.

“풉.”

멱살이 잡혀 숨을 쉬기 힘든 서혁이었지만, 그럼에도 있는 힘껏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하하하하!”

“말해! 이유가 뭐냐고!”

세상 모든 진리가 담긴 삼라만상마저도 읽어내지 못한 세상의 운명을, 서혁은 비웃음 어린 목소리로 읊었다.

“당연하지, 이 바보야! 진희는 영웅이 아니야! 넌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고!”

“……뭐?”

“네 계획은 시작부터 글러 먹었어! 큭, 푸하하하! 아하하하!”

드디어 말할 수 있었다. 지금껏 되뇌어왔던 괴짜의 실수를 보란 듯이 외쳐주었다.

그의 예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 그는 어떤 때보다 즐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뭐? 진희가 영웅이라, 성벽을 지키기 위해 카르나와 맞서? 카르나가 악당이어서 성벽을 부술 운명이야? 이게 시나리오냐? 작가가 정해놓은 플롯으로 딱딱 맞춰 흘러가는 소설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멍청아! 넌 처음부터 놀아난 거야! 이 세상한테!”

아하하하! 서혁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폐교를 가득 채웠다. 마력 한 점 없는 일반인에게 압도당한 에반과 나이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진희는 영웅이 아니야!”

“그럼 대체 누가…….”

괴짜의 두 눈에 처음으로 절망감이 어렸다.

그 모습을 보며 카타르시스가 치솟는 걸 느끼며, 서혁이 말했다.

“이상하다고 느낀 적 없어? 진희가 영웅이라면서 왜 희생하지 않는지? 세상에 던전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이 수없이 많은데, 진희는 그간 한 번도 정의를 위해 움직인 적이 없었어. 선행엔 이유가 있었고, 위선임을 숨기지 않았으니까.”

괴짜는 진희의 운명을 개척하는 힘을 보았다.

신화 속 괴물을 죽이는 그녀의 모습, 배신당했던 전생과 달리 호쾌한 행보로 세간의 주목을 받는 그녀, 그녀를 사랑하는 수많은 동료와 그에 걸맞은 뛰어난 악당들.

완벽한 스토리였다고 생각했다.

진희라는 영웅, 카르나라는 악당이 등장하는 완벽한 극이 시작되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서혁은 진희가 영웅이 아니라고 직감했다.

“너는, 너희는 진희를 몰라. 우리 딸이 그렇게 정의로워 보였니?”

진희는 자신의 동료에게 한없이 다정했다.

보육원 아이들을 돌보는 태도와 기사단원을 믿는 단장의 카리스마, 세상이 위기에 빠지자 드러나는 범상치 않은 무력.

그녀의 모습은 가히 영웅이라 불릴만했다.

하지만 그녀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의 부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진희는 영웅이란 역할에 걸맞지 않다. 애당초 진희가 만인을 위해 희생하는 그림을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다.

그녀가 영웅이 아님을 부모로서 직감했다면, 정보상이 진희를 영웅이 아니라 판단한 이유는.

“내가 우리 딸을 보고 느꼈거든.”

“……뭐?”

“왜냐면 내가 영웅이니까.”

믿기지 않는다는 괴짜의 경악 어린 얼굴과 넋이 나간 나이아를 번갈아 본 서혁이 웃었다.

“너희가 말하는 운명처럼 감이 왔거든. 문득 떠오르더라.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 해야 할 일과, 그 일을 방해하는 사람에 대해서. 정말 신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말이야.”

영웅은 신의 화신이다. 신의 의지를 대변하는 자이자, 세상을 지키는 수호자로서 존재한다.

세상의 위기가 닥칠 때 영웅은 각성한다.

세상의 위기가 다가오면 영웅은 그를 느낀다.

세상의 위기를 앞에 두고 영웅과 그는 서로가 대적자임을 깨닫는다.

이영한을 구출하려던 진희를 본 서혁은 눈치챘다.

그리고 폭소를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아빠, 눈치 좀 보고 있어 봐.’

그리고 진희도 느꼈다.

둘은 모든 게 잘못된 연극임을 깨달았다.

서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잘못된 관중에게 연기하고 있던 멍청한 배우를 비웃었다.

커튼콜 위에 설 배우는 자리를 잃었다. 니케도, 카르나도, 미카일도, 그리고 나이아마저도.

이 극에 설 주연이 아니었다.

“이 세상의 악당은 서진희야.”

칼자루는 그들이 쥐고 있지 않았다.

애당초 모든 것의 시작은 진희의 겸직이었다.

40. 대단원

“당신은 마치 악당 같군요.”

카르나의 본가를 정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경비병들의 수준은 좋았지만, 진희와 카온의 적수가 되진 못했다.

끝까지 반항하려는 경비병은 죽인 후, 시체를 저 멀리 던져버린 카온이 진희를 향해 다가왔다.

그런 카온에게 고생했다고 손을 흔들려던 진희는, 자신을 향해 투덜거리는 상대를 돌아보았다.

안경을 쓴 중년의 남성이 진희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로 밧줄에 묶여있었다.

벤이란 이름의 사내는 이곳의 관리자이자 카르나의 측근 중 한 명이었다. 위치로 보면 미카일 바로 아래라고 했던가, 무력 또한 카온이나 서한에 버금갔던 그는 진희가 직접 나서서 제압했다.

“칭찬이야?”

“귀가 먹었군요.”

“악당처럼 완벽하고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한 줄 알았는데.”

“십수 명의 사람을 죽여놓고 그런 말이 나옵니까? 당신은 죄책감도 없습니까?”

“첫사랑 보고 싶다고 세상 멸망시키는 집단인데 내가 죄책감을 가져야 돼?”

벤이 이를 갈며 진희를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카르나를 모욕하는 말은 역린인 듯했다.

진희는 벤의 포악한 얼굴을 보며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 첫사랑이 아니었나 봐?”

“…….”

어처구니없다는 그의 표정을 뒤로하고, 진희가 카온을 불렀다.

“애들은 건물 안에 있지?”

“예. 한 방으로 모두 피신한 것 같습니다.”

“숫자는?”

“대략 스무 명쯤 됩니다.”

“모두 게이트로 데려가. 누구냐고 물으면 정의의 사도라고 말해줘.”

“강제로라도 데려갑니까?”

“아니, 가기 싫다면 데려가지 않아도 돼. 대신 마야가 우리 손에 있다는 걸 알려줘.”

아이들에게까지 협박하려는 진희를 보며 벤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아이들은 놔두세요! 피도 눈물도 없습니까! 그 아이들이 얼마나 고된…….”

“고된 훈련이라고? 이따위 시설이?”

진희가 벤의 머리채를 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피가 묻은 검은 좀 닦지? 여긴 수련을 진검으로 하나 봐? 게다가 아무리 치료를 해준다고 해도 체벌로 채찍은 너무한 거 아니야?”

“모두 아이들을…….”

위한 거라고 대답하려는 벤의 고개를 자신에게 돌린 진희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변명하지 마. 내가 들어오기 직전까지 애들한테 대련시키고 있던 것 다 알아. 이 뒷마당에 애들 시체가 구덩이에 버려진 것도.”

카르나의 보육원은 중세 시대의 병영과 흡사했다.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전쟁을 치를 것처럼 실전 위주의 훈련을 하고 있었다.

검은 진검이었고, 훈련을 못 따라가거나 불응하는 이들에겐 어김없이 채찍질을 행했다.

실전 인력을 키워내기 위한 잔인하지만 효과적인 병영시설. 진희와 카온이 손대중 없이 경비병을 상대한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마야가 두려워하는 것도 이해가 가네.”

마야는 이 생활에서 언제나 자유를 꿈꿨다. 이 혹독한 시설에서의 생활이 오히려 배신을 부추기는 꼴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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