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77화
진희도 갑옷과 검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허리춤엔 검이 두 자루 매달려 있었다. 바르그와 라이샤의 검이었다.
카사의 기적으로 만들어진 갑옷을 두른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자.”
“예.”
그녀는 품에서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이윽고 불길한 검은 빛이 주변을 가득 채웠고, 작은 게이트가 생성되었다. 진희와 카온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 * *
“연락이 안 돼.”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은신처에 머물던 카르나가 복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가문과의 통신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카르나가 부활한 즉시 가문과 연락하여 지원을 받곤 했는데, 이번엔 통신이 불가능해서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아니, 성벽이 너무 단단해서 그런 것 같아.”
“아직도 단단한가요? 벌써 게이트의 수가 수천 개가 넘어갔는데…….”
“이곳의 신이 그만큼 완벽하단 뜻이겠지.”
일반적인 성벽이었다면 게이트가 열렸을 때부터 성벽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외계의 능력을 가진 인간이 생겨나고, 게이트의 수가 늘어갈수록 성벽은 힘을 잃는다.
현재 지구엔 셀 수도 없이 많은 게이트와, 헌터들이 즐비해 있었다. 그럼에도 성벽엔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았다.
이 정도로 단단한 성벽은 처음 본다며 카르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원을 받기는 어렵겠어. 곤란하네, 인원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해.”
“총서로 억지로 게이트를 열어볼까요?”
“아니야, 그렇게 되면 총서가 망가져. 아직 쓸모가 많으니까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놓자.”
그동안 단 한 번의 접점도 없던 세상과 게이트를 여는 건 총서에게도 부담되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가장 귀중한 자산인 총서를 소모하고 싶지 않았던 카르나는 미카일의 제안을 거절했다.
“마노는?”
“상황을 살펴보겠다고 나갔습니다.”
“레인은 수련 중이야?”
“예. 저번 전투가 계기가 된 것 같아요.”
레인은 서한에게 크게 패배했다. 만약 미카일이 조금만 늦게 등장했다면 레인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을 것이다.
짧은 전투였지만 그 안에서 배운 게 있는지, 은신처로 돌아오자마자 레인은 수련을 하겠다며 빠져나갔다.
“마야가 없으니까 외롭겠지.”
“…….”
카르나의 말에 미카일은 침묵했다. 무표정한 그였지만, 그 눈동자 안에 죄책감이 담겨 있는 걸 카르나는 눈치챘다.
“네 잘못이 아니야, 미카일.”
“예.”
“마야도 이해해 줄 거야.”
“……서진희가 그녀를 죽일까요?”
“글쎄, 잘 모르겠네. 바제트 누님이었다면 보호해 주겠지만, 서진희는 나도 짐작할 수가 없어서. 설마 인질극을 벌이려 들지는 않겠지. 세간의 눈도 있으니까.”
이미 PD가 촬영한 영상이 대중에게 떠돌아다니고 있다. 얼굴이 모두 밝혀진 미카일, 카르나는 도심을 걷는 것조차 어려웠다. 반대로 진희는 세상의 영웅이라며 받들어지는 와중이었다.
그녀가 오랜 기간 공을 들여온 이미지 메이킹을 포기하고 인질극이란 비루한 수단을 선택할 것 같진 않았다.
“우습네. 따지고 보면 우리가 공격하는 입장이었는데, 이젠 상황이 반대야.”
지금껏 카르나는 진희의 포지션에서 활동해 왔다. 모략을 꾸미고 대중들을 선동하며, 영웅을 몰락시키는 과정을 수십 번 반복해 왔다. 지금처럼 철저히 고립당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키득거리며 웃는 카르나를 보고 미카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웃을 일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포기할 순 없어요.”
“알아. 솜니움이 부활하기엔 이만한 곳이 없으니까, 나도 포기할 생각 없어.”
드디어 솜니움을 부활시킬 수 있는 세상을 찾았다. 이 세상의 성벽만 무너뜨리면, 그가 바라는 신이 없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솜니움을 다시 만날 수 있다. 그 기대감에 카르나의 눈에 욕망과 애정이 번들거렸다.
수십,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애정은 이미 집착으로 변질되었다. 순수하지만 지독한 그의 애정을 지켜보던 미카일이 말했다.
“단장님, 만약 솜니움 님이 단장님이 알던 그가 아니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무슨 소리야?”
“환생한 영혼은 변질됩니다. 영혼을 나눌 수 있는 저와, 신성력을 가진 단장님은 예외지만, 일반적인 영혼은 환생할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서한이 된 케네스와 진희가 된 바제트가 그러하듯이, 환생은 곧 변화를 의미한다. 같은 인간으로 환생하는 건 불가능하다.
“심지어 솜니움 님은 이젠 신성력을 잃었습니다. 그렇다고 괴짜처럼 불가사의한 존재도 아니에요. 그는…… 환상입니다.”
나이아에게서 분리된 분신, 이젠 나이아와의 연결고리도 끊어져 버린 빈 영혼.
미카일은 불안했다. 기나긴 세월 동안 봉인되어 있던 솜니움의 영혼이 부활한다 한들, 제대로 된 ‘인간’이 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만약 솜니움이 부활했을 때, 그가 카르나가 알던 솜니움이 아니라면?
아니, 부활해도 이미 ‘빈 껍데기’가 된 상태라면?
그렇게 되면 카르나는 과연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미카일의 불안함을 눈치챈 카르나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토닥였다.
“괜찮아. 솜니움이 잘못되더라도, 난 너희를 버리지 않아.”
“단장님…….”
“그럼 또 다른 솜니움을 찾으면 그만이니까.”
“……예?”
카르나는 뭘 뻔한 걸 묻냐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이아가 아직 살아 있잖아? 녀석은 날 사랑해. 나이아게서 분신을 하나 더 만들어내면, 그게 솜니움이 될 것 아니야?”
“그게 무슨!”
미카일은 경악 어린 눈빛으로 카르나를 바라보았다. 카르나는 진지했다. 평소처럼 농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렇게 되살아나면 그는…….”
솜니움이 아니라, 나이아와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미카일은 목 끝까지 올라온 의문을 애써 삼켰다.
미카일은 솜니움을 기억하고 있었다. 조금 모자란 듯 보이지만 상냥하고, 웃음기가 많던 아름다운 신이었다. 솜니움과 대화하던 카르나는 언제나 행복해 보였다.
‘단장님.’
수많은 세월을 같이 지내온 미카일은 처음으로 카르나에게서 이질감을 느꼈다.
그가 알던 카르나는 솜니움을 다시 만들어낸다는 소릴 함부로 꺼낼 인물이 아니었다. 솜니움을 위해 세상을 멸망시키던 그가, 어느새 광증 어린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당신은 나이아를…….’
어쩌면 미카일은 지금껏 잘못 생각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설마 나이아를 사랑하고 계신가요?’
단장의 사랑의 결말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게 아닐까. 마치 운명처럼.
* * *
“와, 하늘 봐.”
게이트를 통과한 진희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었는데, 그 안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진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해가 없네?”
“환상입니다. 태양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태양의 마력에 민감한 카온이 대답했다.
게이트 안의 세상은 그야말로 인공낙원이었다. 잎사귀가 흔들리지 않는 나무부터 태양이 없는 하늘,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미동조차 없는 호수까지. 마치 그림 속의 세상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저쪽에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카온이 가리키는 장소는 언덕 위의 저택이었다. 새하얀 벽이 인상적인 깔끔한 저택은 마치 파란 기사단의 숙소처럼 폭이 넓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기사단의 숙소와 다른 점은, 저 저택에선 병사들의 병영과 같은 무거운 공기가 흐른다는 점이었다.
“올라가자.”
“예.”
진희와 카온이 천천히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가까이 갈수록 인기척이 강하게 느껴졌다. 얼핏 수십 명의 사람이 사는 것 같다며 카온이 적의 수를 가늠했다.
저택의 지근 거리까지 다가간 진희가 문득 카온에게 말했다.
“카온.”
“예.”
“넌 내가 어떤 사람이 되더라도 곁에 있을 거지?”
“물론입니다.”
용인은 그런 법이다. 알고 있으면서도 진희는 굳이 한 번 더 물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모두 잊어버려.”
“예.”
“데려와서 미안해.”
현성과 서한에게 보여줄 만한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진희는 그 사과를 끝으로, 검을 꺼내 들고 저택의 문을 열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가던 카온은 그녀에게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악마가 되더라도, 전 당신의 곁에 있겠습니다.”
카르나 가문.
이곳은 운명에 버림받은 아이들이 가문의 병사로 성장하기 위해 훈련을 받는 가문의 교육 시설. 말하자면 보육원이자 훈련소였다.
카르나가 환생을 거듭할 때마다 그를 지원해 주는 곳이기에, 그의 힘의 원천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아무리 카르나라고 한들 기억을 일깨워줄 동료가 없으면 환생하는 의미가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진희는 우선 이 훈련소를 없애자고 마음먹었다.
카르나가 다시는 되살아날 수 없도록.
문을 거세게 열자, 안에서 경비 업무를 보고 있던 이들이 깜짝 놀라 진희를 바라보았다.
“무기 버려,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오랜만에 써보는 협박이었다. 진희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 * *
“전 당신의 딸을 죽일 겁니다.”
에반이 독기가 흐르는 눈으로 서혁에게 말했다. 에반의 훈련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서혁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많이 미운가 봐?”
“예.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의 누나를 죽인 진희에게 원한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서혁이 알기론 클로이와 에반은 고아였다. 연고자가 없는 남매에게 서로는 가족 이상으로 중요한 사람이었다.
‘클로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지만.’
서혁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에반을 바라보았다. 괴짜와 함께 도망쳐 온 이곳은 서울 교외의 폐교였다. 폐교 안에서 지내던 서혁과 괴짜, 나이아와 달리 에반은 뭔가에 홀린 것처럼 운동장에서 홀로 수련을 하며 지냈다.
곧잘 에반과 대화를 나누려고 시도했던 서혁은, 최근 그가 클로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클로이가 환생한 것도, 클로이가 무슨 일을 계획해 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게 에반을 소중히 여긴 클로이의 배려였는지, 아니면 바제트에게 눈이 먼 클로이의 배척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물론 서혁은 전자라고 확신했다.
“요즘 힘이 넘치는 걸 느껴요. 전 더 강해질 겁니다.”
“…….”
“나이아 님을 섬기면서 기적을 받고 있으니까요. 전 누나를 뛰어넘어, 누구보다 강한 헌터가 될 겁니다.”
“그걸 왜 설명해?”
구구절절하게 자신이 강해질 것이라 장담하는 그의 심정을 눈치챈 서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 불안하구나?”
“…….”
정곡이었다.
브리온의 쌍둥이가 신예지만 엄청난 업적과 실력을 자랑할 때, 주목받는 건 에반이 아니라 클로이였다.
전사 역할을 하는 클로이와 달리, 에반은 방패를 든 방패병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