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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176화 (176/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76화

이어서 이영한은 서적에 적혀 있던 다른 글들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카르나가 왜 그리도 강력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가 성벽을 파괴할 수 있었던 힘에 대해.

“녀석은 영혼의 중첩이 가능하다. 마치 카트리지처럼.”

금강과 브리온의 합작품, 카트리지는 영혼을 조각내서 조합하여 만든 일종의 도핑제였다. 쉽게 강해지는 만큼 부작용이 강하고, 완성도는 조악하기에 양산해 낼 수 없는 물건.

그 카트리지의 원조격 능력이 바로 카르나의 힘이었다.

“녀석은 환생할수록 강해진다더군. 이전 생에서 가지고 있던 재능을 모두 이어받기 때문이다.”

“전생을 기억한다는 이야기에요?”

“그보단 전생의 무력을 계승받는다고 표현하는 편이 좋겠군.”

말도 안 되는 능력이었다.

신성력을 부여받은 덕택에 그는 환생을 해도 영혼에 큰 변화가 없다. 기억만 잃고서 다른 세상으로 옮겨가며 환생을 반복할 뿐이다.

이전 생에서 기사로서의 재능이 있었고, 이번 생에서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있었다면, 기억을 되찾는 순간 그는 기사와 마법사의 재능을 동시에 갖게 되는 것이다. 그마저도 환생을 거듭하면 계속 중첩이 가능하다.

“녀석은 그렇게 강해져 왔다. 나도 모습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고, 신성력으로 마법까지 무효화시킬 수 있단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만.”

그동안은 나이아의 저주에 의해 완벽한 부활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미카일과 일행이 카르나를 대신해 성벽을 무너뜨려 온 것이다.

“천 번의 환생을 했다면, 천 명분의 재능이 중첩된 셈이지.”

그리고, 하며 이영한이 말을 덧붙였다.

“그의 첫 번째 인생, 카르나로서의 재능이 바로 신성력을 없애는 재능이었다. 서적에선 신성모독이라고 표현하더군.”

운명을 뒤바꾸고, 성벽을 무너뜨린 힘의 정체였으며, 그가 나이아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그 재능으로 만들어낸 무기가 바로 날 찔렀던 지팡이, 공성추다. 설마 지팡이의 생김새일 줄은 몰랐지만, 찔려보니 알겠더군. 그게 성벽을 부순 무기다.”

이영한은 서적에 적혀 있던 공성추에 대한 정보를 덧붙였다.

공성추는 영혼에 타격을 주는 무기이고, 신성력을 가진 존재에겐 강력한 공격력을 지니는 무기였다.

“그래서 그 꼬맹이가 날 노린 거였나.”

진희는 레인이 호시탐탐 자신을 노렸던 것이 떠올랐다. 서한과 전투하는 와중에도 레인은 진희의 빈틈을 찾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공성추를 진희의 몸에 꽂기만 하면 큰 타격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지. 영웅은 신의 화신이니까.

“공성추는 영웅의 천적이다. 영웅과 신의 연결고리를 강제로 끊을 수 있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이영한은 자신이 알고 있는 걸 모두 알려주었다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진희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는 전부 털어놓았다. 괴짜의 정체나 나이아의 과거, 공성추, 카르나의 능력까지 모조리.

이영한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던 진희는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이 많은 걸 알면서도,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죠? 영웅과 악당이란 시나리오를 알고 있었다면, 그걸 이용할 법도 한데.”

“뭘 모르는군. 아니, 젊으니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가.”

끌끌 웃은 이영한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낮고 칙칙한 회색빛 천장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에 언뜻 처연한 감정이 맴돌았다.

“세상엔 주인공이 존재해. 시나리오의 중심에서 시작과 끝을 담당하는 인간이 있단 말이다. 그 외엔 모두 조연이야.”

20년 전의 이영한은 자신감에 찬 인물이었다. 처음으로 게이트를 발견해 특별한 능력을 가진 그는, 자신이 이 세상을 호령할 수 있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금강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시켜,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거물이 되고자 달려왔다.

그는 자신이 운명을 개척하고 있다고, 누구도 자신을 막을 수 없으리라 자신했다. 그러나 삼라만상을 사용하게 되면서, 그는 자신의 주제를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이룬 모든 업적이 운명에서 ‘그럴 수 있던 일’로 치부되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까?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금강의 왕도, 사실 운명 앞에선 한낱 장편 소설의 탈자 하나라는 걸 깨닫게 되었을 때.”

버틸 수 없는 상실감이 닥쳐왔다. 자신이 시나리오의 조연이란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최고의 자리에 오르자, 이영한은 자신의 운명에 차차 익숙해졌다.

“시나리오에 끼어들지 말자고 생각했다. 조연답게 말이지.”

시나리오에 간섭하지 않으면, 이 평탄한 운명에 탑승해 언제까지고 승승장구할 수 있다.

운명이 바뀌지 않는 이상 금강은 언제나 최고의 기업일 것이고, 이영한의 자리가 위협받는 일도 없다.

운명을 기록하는 삼라만상을 본 이영한의 결정은 개척과 도전이 아닌, 순응과 포기였다.

“그래서 나이아에 대해 숨기고, 괴짜가 사라졌을 때 다시 찾지 않았다. 네가 나타났을 때도 마찬가지야. 서한이 너와 엮이지 않길 원했다. 네 운명이 우리의 운명을 뒤바꿀 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영한의 예상은 적중했다. 서한과 세영은 진희를 만나, 운명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고결하고 강력하던 금강은 사라졌다. 후계자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다.

“제가 미운가요?”

“처음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여기고 있지.”

조연의 운명은 결국 주연의 운명에 휘둘리게 마련이다. 이영한은 진희가 그보다 더 거대한 운명의 소유자라는 걸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한과 세영이 진희에게 매료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려는 이영한과 달리, 개척과 변화를 추구하는 서한과 세영에게 진희는 너무나 이상적인 존재였을 테니까.

“이야기는 끝났다. 돌아가라. 난 더 쉬고 싶으니까.”

진희는 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영한의 퉁명스러운 말투엔 전과 같은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제게 궁금한 건 없나요?”

“없다…… 아니, 하나 있군.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 뭐가 될 속셈이지?”

“무슨 소리예요?”

“세계 정복이라도 할 셈이냐?”

세계 정복이라, 진희는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양 웃었다. 저번에도 똑같은 질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 귀찮은 일 할 생각 없어요.”

“사용하지 않는 힘은 썩을 뿐이다.”

“썩으면 잘라내면 그만이죠.”

“그때가 되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목표를 잃은 인간이란 부패하게 마련이다.”

“제 아이들은 그럴 리 없으니까요.”

“어리석은 믿음이군.”

진희는 방을 나가며, 이영한을 향해 말했다.

“그럴 운명이니까요.”

그녀가 입에 담는 운명이란 단어는 농담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굳어진 이영한의 얼굴을 즐겁다는 듯 훑어본 그녀가 방문을 닫았다.

“……크크.”

적막에 빠진 방 안에서 이영한이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촌극도 따로 없군. 등장인물 소개부터 잘못된 시나리오라니.”

진희의 정체를 알고 난 후의 괴짜의 얼굴이 궁금할 따름이다. 이영한은 허탈하고도 기대 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 *

“완성했어요.”

유나는 처참하게 구겨진 표정으로 진희에게 말했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피곤한 안색의 그녀는 진희에게 수정구를 맡겼다.

나이아가 만든 수정구와 똑같이 생긴 그것엔 복잡한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게이트 생성기에요. 어디까지나 일회용이니까, 잘 사용해야 돼요.”

“생성 시간은?”

“대충 2시간 정도. 그 이상은 못 버텨요. 닫히면 다시 열 수 없으니까 주의하세요.”

이 수정구는 다름 아닌 게이트를 생성하는 아티팩트였다. 헤르메스의 총서로 게이트를 여는 장면을 여러번 목격한 유나는, 진희의 명령 아래 간이 게이트를 생성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했다.

마법의 영역을 아득히 초월하는 게이트를 만들어낸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진희는 알고 있었다. 진희는 새삼 대단하단 표정으로 말했다.

“유나는 진짜 천재 맞구나?”

“이제 알았어요? 뭐, 솔직히 완전한 제 작품도 아니라 자존심 상하긴 하네요. 결국 개조품이니까.”

이 아티팩트는 진희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수정구였다. 나이아의 저주가 들어있는 수정구를 유나에게 맡겨, 이 기술을 토대로 게이트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제가 한 건 나이아의 기적에 공간 좌표만 좀 섞은 것뿐이에요. 원래는 수정구의 던전으로 통해야 하는 게이트의 좌표를 단장님이 준 좌표로 바꾼 거죠.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요.”

말은 쉽게 하지만 유나의 안색을 보면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끝까지 강한 척을 하는 유나를 보며 진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요?”

“귀여워서.”

“난 귀여운 게 아니라 멋진 건데요.”

“그래그래, 멋지네.”

진희는 수정구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준비가 슬슬 끝났다.

이영한과 마야에게서 필요한 정보도 모두 얻었고, 계획을 실행할 준비물도 갖추었다.

물끄러미 진희를 바라보던 유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신현성 씨와 이서한 씨에게 말 안 해도 괜찮겠어요?”

“뭘?”

“단장님의 정체에 대해서요.”

“현성 씨에겐 내가 말했어.”

“그럼 이서한 씨한테는?”

“…….”

진희가 대답이 없자, 유나는 들으란 듯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것 같았다. 진희는 거짓말하기 싫어 중요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숨기는 경향이 있었다.

서한도 바쁜 일정이 아니었다면 진희의 거동이 수상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을 테지만, 최근 들어 마주하는 일이 없어 알아차리지 못했다.

“걱정할 거예요.”

“아무런 일 없을 거야.”

“그랬으면 좋겠네요.”

유나가 삐죽 입을 내밀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서한과 현성을 불러서 진희를 말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다 한들 진희가 고집을 굽히지 않는 인물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전 돌아가서 좀 쉴게요.”

“역시 피곤했구나?”

“아뇨? 낮잠 자려는 것뿐인데요?”

키득거리며 대화를 주고받으며 진희는 유나를 배웅했다. 유나가 멀어지는 걸 확인한 진희는 곧장 연병장에 준비하고 있을 카온에게 걸어갔다.

카온은 전투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지구로 넘어올 때 영혼을 지켜주었던 드라노이드 호부까지 착용한 그는 차렷 자세로 진희를 기다렸다.

“다 됐어.”

“출발합니까?”

“응. 아, 그전에 애들은 다 어디 있어?”

“마야의 방에 있습니다. 식사를 같이해야 한다고 종혁이가 말하더군요.”

“죄책감을 가지나 보네.”

진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희의 계획에 대해 짐작한 종혁이 마야에게 죄책감을 가지기 시작한 듯했다.

아이들에게 부담을 안겨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폐를 끼치고 말았다. 진희의 표정을 살핀 카온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제 녀석들도 아이들이 아닙니다. 기사도 대우해 주십시오.”

“……그래, 그랬지.”

이젠 종혁과 민혁, 소라도 성인이었다. 삼인방을 기사단원으로 인정했으면서도 궂은일을 맡기지 않으려는 진희를 향해 카온이 말했다.

“과한 배려는 독이 됩니다.”

“이젠 제법 스승님처럼 말하네. 알았어, 잔소리 그만해.”

진희가 작게 웃으며 손사래 쳤다.

“이제부터 게이트를 열 거야. 시간은 2시간. 1시간 내로 내부의 적들을 모두 제압하고, 자원을 빼앗는 게 목표야.”

“사살합니까, 아니면 제압합니까?”

“제압이 우선이지. 하지만 끝까지 저항한다면 사살해. 대신 시체는 깨끗하게 치워.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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