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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175화 (175/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75화

“에잉.”

“무슨 용건이냐?”

“뭐 좀 물어보려고요.”

진희가 의자 하나를 들고 와, 이영한의 앞에 자리 잡았다.

자이로의 치료술이 효과가 있었는지 그의 안색엔 생기가 돌고 있었다.

“십 년은 젊어 보이시네요.”

“시답잖은 소리.”

이영한이 얼른 말이나 하라며 혀를 찼다.

진희는 이영한의 얼굴에서 케네스와 서한의 닮은 점을 찾아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괴짜, 게이트, 그리고 이 세상의 신에 대해서 듣고 싶어요.”

“다 알려달란 이야기군.”

“네.”

이영한이 예전부터 괴짜와 협력해 금강을 키웠다는 사실은 서한에게 들었다.

삼라만상을 이용하여 금강을 성장시킨 그가 이 세상의 신과 나이아에 대해서 모를 리 없었다.

이영한은 잠깐 고민하는 듯싶더니, 이내 냉랭한 눈동자로 진희를 쏘아보며 말했다.

“내가 네게 그걸 가르쳐 줘서 얻는 게 뭐지?”

“얻을 게 필요한가요?”

“당연하지. 이건 거래니까.”

“아하하,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되셨네.”

진희가 무미건조하게 웃으며 이영한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진희의 얼굴에 이영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에게 선택지는 없어요. 알려주지 않는다면, 금강도 버리면 그만이니까.”

“건방지군, 금강이 네까짓 것에게 무너질 것 같으냐?”

“네. 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금강이 아니라 세상도 무너질 테니까.”

“하! 신에게 간택받았다고 건방이 하늘을 치솟는구나!”

이영한의 비웃음에 진희는 익살맞게 얼굴을 구겼다.

“아뇨. 전 간택받은 적 없어요.”

이영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지? 영웅이란 모름지기…….”

영웅에 대한 설명을 하려던 중, 그는 문득 떠오른 의문에 말을 멈췄다.

그가 알던 영웅의 정의와 부합되지 않는 특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문득 하나의 가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너무나도 설득력 있는 가설.

그는 설마 하는 눈으로 진희를 바라보았다.

진희는 그의 의심 어린 표정에 아무런 대답 없이 침묵했다. 마치 그의 의심을 긍정하듯이.

“설마 너, 너는…….”

“이제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이영한은 허, 하고 헛숨을 내뱉었다.

진희의 강함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온갖 의문이 휘몰아쳤지만, 이보다 더 합당한 근거는 찾기 어려울 듯했다.

“모든 걸 알려준다면, 저도 당신의 질문에 대답해 드릴게요. 그분에 대해서도.”

“그가 간택받은 건가?”

“맞아요.”

“하, 하하.”

이영한이 마른세수를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우습군, 아니, 어처구니가 없어. 모두가 다 네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건가. 카르나도, 나도, 괴짜도.”

이영한은 후회스러운 표정으로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진희는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더 이상 권유하지 않았다. 그가 알아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괴짜는 아마, 다른 세상에서 신이었을 것이다.”

괴짜를 이용하면서, 그도 나름대로의 조사해 왔다.

그는 괴짜를 알고 있는 이주민들을 찾거나, 온갖 게이트에서 나온 증거들을 조합하며 괴짜의 정체에 대해 추론했다.

“신성력을 가진 신은 아니야. 굳이 따지자면, 인간의 영혼과 융합한 신이라고 봐야겠지. 무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다. 그녀는 게이트가 등장하고 나서 20년간 조금의 나이도 먹지 않았어. 진정한 의미의 불로불사라고 볼 수 있지.”

“근거는요?”

“그녀를 숭배하던 신자가 이주민 중에 있었거든. 지금은 니케 로만이란 이름을 쓰고 있지만, 신으로서의 이름은 ‘로칸’이다.”

로칸의 신자였던 이주민은 신을 찾아 세상을 방랑하고 있었다.

멸망해버린 세상을 다시 복구하기 위해선 그들의 주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이트를 넘나들며 영혼에 지독한 상처를 입었던 그는, 괴짜를 만나기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

죽기 직전 이영한을 만난 이주민은 로칸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로칸은 모종의 이유로 자신의 세상을 버리고, 인간으로서 환생했다. 그리고 세상을 넘나들며 수많은 세상의 성벽을 부수고 있지. 이유는 모른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신자도 목숨을 걸고 게이트를 넘었다더군.”

“신자에 대해서 괴짜에게 말하긴 했나요?”

“설마. 괴짜가 날 이용했듯이, 나도 괴짜를 이용하는 처지였다. 굳이 그녀에게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할 필요는 없지. 이주민의 장례는 치러줬지만, 거기까지가 내가 할 도리였다.”

이영한은 괴짜의 목적에 대해 설명했다.

“아마 그녀는 성벽을 부술 악당과 그에 맞설 영웅의 대적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더군. 그녀가 금강에서 찾던 정보는 모두 헌터에 대한 것이었다. 역경을 이겨낸 헌터나, 이 세상의 진실에 다가선 헌터들에 대해서지.”

“진실이라 하면?”

“성벽과 운명에 대해서.”

헌터라면 누구나 게이트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기 마련이다. 대체 이 편리한 게이트란 존재가 어째서 등장하는지, 저 너머의 세상엔 어떤 사람이 사는지.

요즘 세대에 들어선 의문을 품는 걸 이상하게 여기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개중엔 이 비밀을 파헤치려 하는 이들도 있었다.

“성벽과 운명의 존재를 깨달은 자는 있었지만, 그걸 바꾸려고 하는 자는 드물었다. 나처럼 순응하고 이용하려는 자가 대부분이었지.”

순응하는 자는 영웅이 아니다. 괴짜는 그렇게 판단한 듯했다.

“그러던 중 해외로 넘어가더군. 한국에선 더 이상 영웅이 될 만한 인재가 없다고 판단한 거겠지.”

괴짜가 온 세상을 누비던 이유였다.

“그럼 나라마다 돌아다니면서 이상한 짓을 저지르던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였나요?”

“그렇겠지. 괴짜는 미친 것처럼 보여도, 모든 행동에 근거가 있는 녀석이야.”

이후의 이야기는 진희가 아는 내용이었다.

영웅을 찾아다니던 괴짜는 진희에게서 거대한 운명을 느낀다.

그리고 미노타우로스를 쓰러뜨리는 그녀를 보고서, 그녀가 영웅임을 확신했다.

“괴짜는 강한 운명을 가진 인간을 판가름하는 능력이 있다. 서한과 세영의 가능성을 점지한 것도 녀석이지. ……너를 보니 어떤 운명인지까지는 알 수 없는 것 같다만.”

이영한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괴짜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엔 나도 모른다. 세영의 곁에서 귀신같이 숨어 지냈으니, 나도 조사하는 데 한계가 있었으니.”

“괴짜와는 첫 번째 게이트 때 만난 건가요?”

“아니, 그보다 좀 더 후다. 아마 게이트가 일어나고 일 년쯤 지나고 나서였지. 그녀는 내게 계속 게이트에 대해서 물었다. 나이아를 만난 적 있냐며, 그녀의 위치에 대해 궁금해했지.”

“모른다고 대답했군요.”

“괴짜가 금강에 붙어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걸 알려주면 떠날 걸 알고 있었으니까, 끝까지 모른 체했다. 나이아가 부활한 걸 보니, 네 아비가 알려준 것 같긴 하다만.”

나이아는 던전 안에서 잠들고 있었다.

나이아의 모습을 확인한 당시의 이영한은 던전에서 쓸 만한 자원들을 모두 가져갔지만, 끝까지 나이아는 깨우지 않았다.

“어째서 안 깨웠죠? 신을 이용할 수 있다면 큰 이득이었을 텐데.”

“미쳤으니까. 나이아는 광신(狂神)이다.”

던전의 배경은 거대한 제단이었다.

온갖 보석과 금으로 치장된 제단의 위에 잠든 나이아와, 그녀를 기리기 위한 온갖 보물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곳에서 이영한은 나이아에 대해 기록된 서적을 발견했다.

던전 안에서 언령의 마법을 체득한 그는 어렵지 않게 서적의 내용을 해석할 수 있었다.

마력의 언어로 기록된 서적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나이아와 솜니아에 대해서. 그리고 카르나를 사랑하던 두 신에 대해서 적혀 있었지.”

“……두 신이요?”

카르나와 연인 관계였던 건 솜니움이 아니었나? 진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야가 말했던 것과는 내용이 조금 달랐다.

“그래, 그렇게 알려져 있나 보군. 하긴, 그네들도 부끄러워 말할 수 없던 거겠지. 솜니움이 카르나를 사랑하기 전부터, 나이아는 카르나를 사랑해 왔다. 그들의 기나긴 싸움은 결국 치정 싸움인 것이지.”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진희가 눈을 크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영한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정해진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인간에게 사랑을 느낀 것이다. 아이러니하지. 운명을 따라야만 세상을 지킬 수 있음에도, 기적을 바라는 인간을 사랑하고만 것이니까.”

“그럼 설마 솜니움이 카르나를 사랑하게 된 것도…….”

“그래, 본체인 나이아의 영향이겠지.”

마야는 솜니움과 카르나가 첫눈에 반했다는 것처럼 설명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첫눈에 반한 것이 아니라, 애당초 솜니움은 카르나를 사랑하도록 태어났던 것이다.

“솜니움은 결국 분신이다. 본체의 속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 그 사실을 나이아는 알지 못했다. 아니, 자신의 마음조차 깨닫지 못했지. 솜니움이 카르나와 사랑에 빠지자, 그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이었다.

세상의 운명을 바로잡기 위해 솜니움을 탄생시킨 나이아는, 카르나를 솜니움에게 빼앗기고 나서야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고귀한 신이 고작 인간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일지 짐작이 가느냐?”

카사와 라이샤의 관계와는 사정이 달랐다.

나이아는 분노와 질투에 시달렸다.

자신이 그깟 인간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동시에 카르나와 사랑에 빠진 솜니움을 질투했다.

카르나를 사랑했고, 용서할 수 없었다.

모순적인 감정이 휘몰아치며 그녀는 망가지기 시작했다.

“서적엔 나이아에 대한 숭배와 저주가 가득했다. 그녀의 권능을 두려워해 억지로 적은 기도문과, 고작 인간에게 마음을 빼앗게 세상을 멸망케 한 악신을 저주하는 욕설이 적혀 있었지. 카르나에 대한 마음을 깨닫고 난 후, 나이아는 몹시 인간다워졌다. 그것도 애증에 미쳐버린 인간.”

서적을 모두 읽은 이영한은 다짐했다. 이 미친 신을 세상에 풀어놓지 않기로.

그는 던전 안의 보물을 모두 챙기고 바깥으로 나섰고, 이후 게이트가 나타난 지역에 아무도 침입할 수 없도록 봉인했다.

“스케일이 터무니없는 사랑싸움이네요.”

“인간이 되어버린 신들이란 결국 그런 꼴인 거지. 괴짜나 나이아나 다를 바 없다. 오히려 카르나가 훨씬 건실하다고 봐야겠지. 솜니움이란 환상의 신을 되살리겠다고 온갖 세상을 수백 번씩 들쑤시고 있으니까.”

순정의 정도를 따지면 카르나가 더 순수하다며 이영한이 너스레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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