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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174화 (174/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74화

종혁은 낮은 목소리로 마야를 달랬다. 그는 자신이 다가가자 마야가 긴장하는 걸 눈치채고, 일정 이상의 거리를 벌리며 말했다.

“우리도 너랑 같은 신세였으니까.”

“뭐?”

종혁은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마야는 아직 이 보육원에 대해 자세히는 알지 못하는 듯싶었다.

“우린 모두 연고자가 없어. 여긴 보육원…… 고아원이야.”

현대 상식이 적은 마야는, 진희와 기사단에 대해선 알고 있었지만 가람 보육원에 대한 정보는 새겨들은 적이 없었다.

종혁은 천천히 가람 보육원에서 일어났던 일, 그리고 진희가 아이들을 구원해 준 사건에 대해 설명했다.

처음엔 종혁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던 마야였지만, 이내 아이들의 이능력에 대해 듣자 경악한 표정으로 종혁과 민하를 바라보았다.

“너희도 특별한 힘이 있는 거야?”

“맞아. 난 텔레파시를 사용할 줄 알고, 민하는 요정의 피가 섞여 있어. 봐.”

종혁이 마야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 번 잡아보라는 듯 손바닥을 펴자, 마야는 망설이다가 천천히 손을 맞잡았다.

[들리지?]

마야와 연결된 종혁은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음성에 마야가 깜짝 놀라 손을 뗐다.

“너희도…….”

“맞아, 우리도 이 힘 때문에 숨어 살았어. 이제 알겠지? 왜 우리가 진희 누나를 좋아하는지.”

“…….”

마야가 입술을 깨물었다. 진희에게 자신을 구해준 카르나를 욕하지 말라며 소리쳤던 게 떠올랐다. 이 아이들도 다를 바 없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녀가 그토록 미워하던 진희도 이 아이들에겐 구세주였던 것이다.

종혁은 마야에게 죽을 내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삼인방 이야기부터 민하와 청하, 신비한 능력을 가진 아이들의 일상에 대해서 말하자, 마야도 귀를 기울였다.

마치 자신의 어릴 적 추억을 공유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우린 마야를 동정하지 않아. 그리고 해칠 생각도 없어.”

어느새 방 공기는 따뜻하고 차분해졌다. 마야의 독기 어린 눈동자엔 약간의 호의와 친근함이 감돌고, 민하는 잘 됐다며 밝게 웃으며 그녀에게 후식을 권했다.

든든한 식사를 한 덕에 안색이 어느 정도 되돌아온 마야에게 종혁이 말했다.

“그저 마야에게 도움을 받고 싶어.”

“……난 미카일 님을 배신하지 않아.”

카르나를 배신하지 않는다곤 말하지 않았다. 그 미세한 차이를 종혁은 놓치지 않았다.

“약속해. 우린 미카일을 노리는 게 아니야. 너희를 돕고 싶어.”

“우리를?”

“응. 너희, 우리처럼 특별한 능력 때문에 갇혀 살고 있는 아이들을 돕고 싶어.”

갇혀 살다.

마치 마야가 살아온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이미 종혁의 대화에 빠진 마야는 그 묘한 말투에서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마야는 아직 망설이고 있었다. 그녀가 미카일에게 서운한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미카일이 총서를 빼앗아가던 날, 그는 철저히 삼인방과의 전투를 피해 잠입해 왔다. 삼인방을 미카일 혼자서 감당하긴 힘들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불리함을 이겨내고서라도, 그녀를 이곳에서 탈출시켜 주길 바랐다.

하지만 미카일은 마야에게 선택지를 주었다.

‘그들은 당신을 죽이진 않을 겁니다.’

같이 빠져나가자니 전투가 불가피하다.

하지만 얌전히 총서만 내준다면, 마야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고 미카일은 무사히 카르나에게 돌아갈 수 있다.

가문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치라는 교육을 받아왔던 마야는 고민도 하지 않고 미카일에게 등을 보여주었다. 큰 고통에 그녀는 기절했고, 눈을 뜨자 미카일과 카르나가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버려졌어.’

피하고 싶은 진실이었다.

마야를 구출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 판단한 미카일의 냉혹한 선택지에 의해, 마야는 가람 보육원에 버려졌다.

그 사실을 종혁은 자연스럽게 파고들었다.

“우린 누구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우리처럼 갇혀 살고 있는 아이가 있다면 도와주고 싶어.”

“하지만 미카일 님을 배신할 수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마야에게 종혁이 가까이 다가갔다. 눈앞에 다가온 종혁의 선한 얼굴에 마야가 움찔 떨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인질 취급하지 않을 거야. 그저 너처럼 배신당하지 않게, 자유를 줄게.”

자유를 준다.

핍박받던 삶을 미카일에게 구원받았지만, 이어진 것은 갇힌 세계에서의 혹독한 훈련과 교육이었다. 모두가 카르나와 미카일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훈련했지만, 싹트는 불만과 욕심은 막을 수 없었다.

자유로워지고 싶다.

그래서 이 세상으로 처음 왔을 때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처음으로 얻은 자유였으니까.

그런데 그 자유를 아이들 모두에게 나눠준다고 한다.

‘서진희를 믿을 수 있을까?’

진희는 잔인하고 냉정했지만, 자신의 동료들에겐 한없이 상냥한 사람이었다. 마야는 창문 너머에서 진희의 허리에 매달리는 수많은 아이를 떠올렸다.

‘못 믿는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어? 카르나 님과 미카일 님은 도망쳤다고 했잖아?’

그만큼 기사단의 전력이 대단하단 이야기겠지.

카르나가 진희를 이기면, 그들은 분명 자신을 구해줄 것이다. 하지만 능력을 잃은 자신은 가문에 돌아가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카르나는 다시 솜니움이라는 본 적도 없는 신을 부활시키기 위해, 이 기나긴 과정을 반복하겠지.

마야의 친구들은 카르나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훈련을 계속할 테고.

‘만약 서진희가 이긴다면?’

그래, 만약에 카르나가 패배한다면?

그래서 친구들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마야의 눈에 점점 또 다른 의혹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 *

“……이렇다고 해요.”

종혁은 진희에게 마야와 했던 대화에 대해 보고했다.

민하는 마야를 간호하기 위해 방에 남았고, 종혁은 나오자마자 진희를 찾아왔다.

“미안, 이런 일을 시켜서.”

“아니에요, 필요한 일이잖아요.”

진희가 진심 어린 사과를 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종혁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마야의 적의를 잠재우기 위해 민하를 곁에 두고, 텔레파시를 이용해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게 만든 건 모두 진희의 설계였다.

텔레파시 능력을 능숙하게 다루게 된 종혁은, 이제 적개심이 없는 일반인이라면 마음속의 독백에 끼어드는 것도 가능했다.

민하에 의해 감정을 가라앉힌 마야에게 종혁이 다가가, 기사단에 호의를 갖도록 유도한 것이다. 미카일이 마야를 일반인으로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진희가 떠올린 계획이었다.

이제 마야는 미카일에 대한 신뢰보다, 자신의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욕심이 더 강해졌다.

“마야는 아무래도 힘든 유년기를 보낸 것 같아요.”

“그래, 예상은 했어.”

레인과 마야는 핍박받고 고통 받는 운명을 타고났다고 했다. 그 운명에서 구해준 이가 카르나와 미카일이기에 그들은 충성을 맹세한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그들이 어린 나이에도 불과하고, 뛰어난 전투 실력이나 마법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딘가에서 훈련을 받는 거겠지.”

그래야 레인의 마법 실력과 마야의 능숙한 게이트 활용법의 출처가 설명이 된다.

“살던 세상이 사라져서 강제로 이주하게 된 이주민과는 상황이 달라. 구해진 아이들은 훈련을 받고, 병사로서 투입된 거야.”

삼인방과 비슷한 케이스라고 봐야 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훈련을 받아, 한 명의 단원으로 인정되는 과정. 방향은 다르지만 방식은 동일했다.

“꼭 이렇게 될 줄 알고 계신 것 같아요.”

종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진희가 이 계획에 대해서 종혁에게 설명했을 때, 종혁은 마야가 이렇게 쉽게 넘어오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야의 충성심은 굳건한 듯 보였고, 이런 회유에 흔들릴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약한 부분이 있으니까. 게다가 마야는 널 마음에 들어 했거든.”

마야가 예전에 수정구의 던전에서 종혁을 기절시킬 때, 현성의 앞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종혁이 마음에 든다며, 상처를 입힐 수 있음에도 기절만 시키고 도망친 적이 있었다.

“정말 그 아이들을 데리고만 오는 거죠?”

“…….”

종혁의 말에 진희는 작게 미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점점 더 영웅에서 멀어지네.”

진희는 종혁에게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희가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않자, 종혁이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

“전 마야와 약속했어요.”

“응, 알아.”

“누님에겐 인질 같은 거 필요 없잖아요.”

종혁은 진희가 카르나에게 승리할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하는 그녀의 의도가 궁금했다.

“이런 일을 시켜서 미안해, 종혁아. 돌아가렴.”

“하, 하지만…….”

“괜찮아. 다 내가 나쁜 거니까.”

진희가 방문을 가리켰다. 문 곁에서 지키고 있던 카온이 종혁의 어깨를 잡았다. 그만 물러나란 의미에 종혁이 당황한 얼굴로 카온을 올려보았다. 카온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했다.

방문을 닫고 나온 종혁은 아무런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 방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누님을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냥…….”

비열한 계획이 있더라도, 자신들에게 그 짐을 나눠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종혁은 차마 다시 문을 열지 못한 채, 고개를 떨어뜨리고 자리를 떠났다.

* * *

진희는 이영한 회장을 찾았다.

레인의 지팡이에 당한 이영한 회장은 영혼에 큰 손상을 입어, 이주민의 장로인 자이로에게 치료를 받아야 했다. 현대의 의술과 마법으론 영혼을 회복시킬 수 없었기에, 보육원에서 지내며 치료받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영한은 보육원의 가장 구석 방, 창고나 다름없는 방의 소파 위에서 지내고 있었다. 서한이 좋은 방으로 옮겨주려 해도, 아이들과 마주치지 않는 이곳이 편하다며 그가 고집했기 때문이다.

아예 자이로를 빌려달라고 말한 그였으나, 진희는 거절했다. 혼란한 바깥에 이주민을 내보낼 생각은 없었다.

“드라마 보고 계신가 봐요?”

“뉴스에 온통 기사단 이야기만 나오더군.”

“그래서 질렸나요?”

“그래, 꼴도 보기 싫다.”

진희가 이영한 회장이 보고 있던 TV를 바라보았다. 철 지난 드라마가 상영하고 있었다.

[누가 믿으래? 난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었어. 알아?]

마침 클라이맥스였는지 배우들의 언성이 높아지던 중이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정체를 감춰온 악역이 드러나는 순간인 듯했다.

다음 장면이 어떻게 되나 진희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보고 있자, 이영한이 리모콘을 들어 화면을 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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