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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173화 (173/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73화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끔뻑거리던 진희는, 이내 현성의 얼굴에 떠오른 긴장감을 보고 작게 웃음을 지었다.

무슨 의도로 질문한 건지 감이 왔다.

“그렇다면요?”

“…….”

아니라거나, 그건 왜 물어보냐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지만, 정작 돌아온 건 약한 긍정이었다. 현성은 쓰게 웃었다.

“잘 됐군요.”

진희는 웃음을 멈추고 현성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옅은 웃음을 띠고 있는 눈매였지만, 진희는 그 눈에서 묘한 감정을 느꼈다.

“현성 씨는 결국 한 번도 선을 넘지 않네요.”

서한은 진희가 모든 이에게 선을 긋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곧장 넘어와 의사를 물었다.

만약 그녀가 서한에게 마음이 없었다면 무례하다며 걷어차도 할 말이 없는 행동이었다.

반대로 현성은 서한보다 훨씬 전부터 진희에게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현성의 눈길을 모를 진희가 아니었다.

“두려운가요?”

“그건 아니에요.”

거절당했을 때의 두려움 때문에 다가오지 못한 건 아니었다. 집착과 소유욕이 강한 서한과 달리, 현성은 거절당하더라도 상대를 배려해 줄 인내가 있는 사내였다.

그걸 알면서도 이용한 것이 진희였고, 알면서도 이용당해 왔던 게 현성이었다.

“전 당신의 곁에 있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현성은 만족하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건 진희의 행복과 그녀의 정의였지, 애정이 아니었다.

진희가 바라던 상대가 서한이었다면 기꺼이 비켜줄 수 있었다.

물론 서한이 그녀에 걸맞은 상대라는 게 전제가 있어야겠지만.

“정말로 그 정도로 충분해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라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현성은 쓰게 웃었다. 지금껏 이어온 애정을 ‘충분’이란 단어로 정리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선을 넘은 서한을 허락해 준 진희를 보고, 그리고 그 관계를 긍정한 방금 전의 대화를 떠올리며, 그의 자리는 이곳이란 걸 깨달았다.

“전 당신의 길이 완벽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걸 돕는 것에 제 애정은 필요하지 않아요.”

현성의 소망은 그의 비틀린 정의관과 흡사했다.

그의 영웅이었던 아버지가 몰락한 후, 그는 맹목적으로 정의를 좇았다. 완벽하고 강인한 정의의 영웅을 찾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빈자리를 진희에게서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미 현성의 과거를 경험한 적이 있던 진희는, 현성이 자신에게 누구를 연상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예상이 되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현성의 볼을 매만졌다.

“전 현성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결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정의롭지 않아요. 알고 있죠?”

“예. 하지만 당신이 결국 그 길로 돌아가리라 믿고 있습니다.”

“사이비 같은 말인 거 알아요?”

“이 세상에 믿을 만한 신이 남아 있다면, 그게 당신이니까요.”

이미 신이란 작자가 나타난 와중에 여러모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말이었다.

재밌는 농담이라며 진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제 결심은 같습니다. 당신이 어떤 길을 걷더라도, 그게 곧 이 세상을 위한 길이 될 거라 믿어요. 그렇기에 당신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애인의 위치는 아닐 텐데요?”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한 번의 거절로 끝날 관계보다, 신뢰로 이뤄진 관계를 더 원합니다. 평생,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있도록.”

어떤 의미에선 사랑 고백보다도 애처로운 다짐이었다.

현성의 진희에 대한 믿음은 이미 숭배에 가까웠다.

그것이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미안했다.

진희는 잡티 하나 없는 그의 말끔한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좋아요, 허락할게요. 제 본성을 알면 현성 씨가 먼저 치를 떨면서 도망칠지도 몰라요.”

“이미 알 만큼 알았습니다. 고사리와 초콜릿이 섞인 삼겹살 볶음을 먹는 당신보다 더한 게 있을까요?”

“언제 우리 아빠랑 거기까지 얘기했어요?”

둘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던 중, 표정을 갈무리하고 자신의 뺨을 매만지던 진희의 손을 붙잡으며 현성이 물었다.

“그보다 제가 지금 걱정하는 건, 이서한과의 관계가 아닙니다. 진희 씨, 당신의 상태죠.”

“…….”

“최근…… 그러니까 당신이 클로이를 죽인 그날부터, 당신은 변했습니다.”

서한과 카온은 알아채지 못한 미세한 변화였다. 주술사인 그만이 진희의 곁을 맴도는 불가사의한 기운을 알아차렸다.

진희는 평소에 옅은 마력을 갑옷처럼 두르고 다닌다.

적의 기습에 언제라도 대응할 수 있는 수단으로, 진희뿐 아니라 상위의 헌터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 마력은 당사자의 컨디션이나, 감정의 변화에 따라 흔들리곤 한다.

진희도 사람인지라 아침에 일어났을 때나, 기분이 안 좋을 땐 마력의 상태가 변하곤 했다.

그러나 최근 진희의 마력은 단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당신의 마력이 무서울 정도로 고요합니다. 당신, 정말 감정을 느끼고 있긴 한가요?”

신비하지만 그만큼 오싹한 광경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거대한 호수를 보는 듯했다.

건드리면 안 될 것만 같은 완벽함, 모든 것을 배척하는 듯한 아름다운 정적.

심지어 카르나와의 전투 때도, 그녀의 마력엔 변화가 없었다.

현성은 진희에게 감정이란 게 사라진 게 아닐까, 하는 소름 돋는 상상을 했다.

“그렇지 않아요. 제가 그런 사람일 리 없잖아요.”

“그럼 그 마력은 대체 왜 그런 겁니까?”

“그건…….”

진희가 잠시 말을 골랐다.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적어도 그녀의 사람인 현성과 서한, 카온에게 말할 생각이 없던 사실이었다.

진희는 곤란한 얼굴로 현성을 바라보았다. 현성은 답을 들려주지 않으면 비키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변화가 있던 건 맞아요. 하지만 현성 씨의 걱정처럼, 대단한 건 아니에요.”

“무슨 변화입니까?”

진희는 현성의 어깨에 고개를 올렸다. 그리고 그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바제트의 잔류 기억을 상기한 후, 변화된 자신에 대해서.

진희의 대답을 듣고 있던 현성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지다, 이내 납득의 표정으로 변했다.

왜 진희가 변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지금껏 일어났던 일들이 대번에 이해가 되었다.

“언제부터 알게 되었습니까?”

“그냥 카르나를 본 순간 알았어요. 고리타분한 말이긴 한데, 꼭 운명처럼요.”

“하지만 당신이 아니라면…….”

그것이 운명이라면, 대체 이 사건의 끝엔 누가 있는 것인가.

현성이 질문하려 했지만, 진희는 그의 곁을 지나치며 대답을 피했다.

“현성 씨가 알 필요는 없어요.”

“전 자격이 없는 겁니까?”

“저 말곤 누구에게도 자격이 없어요. 말을 잘못했네요, 현성 씨만이 아니라, 누구도 알 필요 없어요.”

이 비밀을 가지고 거래할 상대는 있지만, 그 사실도 현성에게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현성의 팔을 빠져나가기 직전 돌연 생각난 듯 진희가 현성의 턱을 붙잡았다.

“응?”

그리고 그의 뺨에 입 맞추었다.

쪽, 짧게 입 맞추고 떨어져 나간 진희의 입술에 눈을 동그랗게 뜬 현성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비밀 때문입니까?”

“그것도 있고, 서한 씨가 제 곁에 있다는 사실도 그렇고. 좀 미안해서요.”

결심했다고 한들, 현성의 마음에 상처를 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에게 휴식을 권할 수 없는 게 진희의 입장이었다.

짧은 입맞춤으로 보상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현성이 진희에게 있어서 어떤 존재인지는 알려주고 싶었다.

“……이서한이 알면 화낼 겁니다.”

그래도 친애의 표시를 받은 게 나쁘지만은 않은 듯, 현성이 평소처럼 옅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진희는 그를 지나치며 대답했다.

“아직 사귀는 것도 아닌데, 잠깐의 외도는 봐주겠죠.”

“제가 외도 상대인가요?”

“으음, 그쪽 장르는 좋아하진 않는데, 고려는 해볼게요.”

그런 기대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현성은 문을 닫고 나가버린 진희의 등을 보며 쓴 후회를 입에 담았다.

39. 잘못된 커튼콜

헤르메스의 총서는 마야의 등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스 신화의 신인 헤르메스가 적어놓은 구절들은 피부에 새기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마법의 힘을 주었다.

마야가 지금껏 게이트를 여닫으며, 특별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총서 덕분이었다.

하지만 미카일이 총서를 뜯어간 지금, 마야는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왔다.

마법을 사용하긴커녕 마력조차 느끼지 못하는 일반인이 된 것이다.

등의 피부를 마취도 없이 뜯어간 충격으로 마야는 기사단이 돌아온 이후에도 한참 동안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다행히 미카일이 해준 치료는 완벽해서 흉터는 남지 않았다.

단지 일반인이 되어, 더 이상 카르나와 미카일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마야에겐 큰 상처가 되었다.

“나가.”

“밥은 먹어야죠.”

“먹을 생각 없어, 나가.”

마야의 안색은 폐인처럼 변했다.

색이 사라진 파란 입술과 홀쭉하게 마른 볼살을 보며, 민하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민하의 작은 손 위엔 죽과 반찬이 올려진 쟁반이 들려 있었다.

벌써 이틀째 식사를 거절한 그녀를 걱정해 민하가 직접 죽을 들고 왔다.

하지만 민하를 바라보는 마야의 눈빛엔 적의만이 가득했다.

보육원에 떨어진 날, 그녀를 진희에게 안내한 것이 민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째선지 민하를 보면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요정의 기운이 그녀의 마음을 억지로 진정시켰기 때문이다.

“민하야, 내가 할게.”

민하를 따라 방으로 들어온 종혁이 한숨을 쉬며 쟁반을 받았다.

그리고 마야가 앉아 있는 침대 위로 쟁반을 내밀었다.

마야는 표독스럽게 종혁을 노려볼 뿐, 쟁반을 밀어내지 않았다.

“대체 왜 날 살려두는 거야? 이제 그만 죽이라고!”

움직일 기운도 남지 않은 그녀가 억지로 목소리를 키웠다.

마야는 자신의 이용가치가 사라졌음을 알고 있었다.

미카일과 카르나에겐 물론이고, 기사단에선 인질의 가치조차 없다.

무능한 일반인을 구해주기 위해 카르나가 위험을 감수할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기사단은 그녀를 평소처럼 돌봐주었다.

밖에 나가게는 하지 않았지만, 보육원 내에선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게 해줬고, 식사도 꼬박꼬박 가져다주며 그녀의 자유를 보장했다.

마야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날 동정하지 마!”

그간 적대해온 이들이, 그것도 어린아이가 자신을 동정한단 사살이 납득할 수 없었다.

그녀는 카르나 안에서도 귀중한 인력이었다.

자신이 무능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동정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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