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72화
레인은 서한을 노려보며 게이트를 타고 사라졌고, 카르나는 나이아를 바라보다 결국 말없이 미카일의 뒤를 따랐다.
괴짜와 나이아는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갔고, 서혁은 진희와 더 이상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미카일이 사라지자, 기사단원들을 묶어두고 있던 게이트가 사라졌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다가온 서한을 향해 진희가 말했다.
“준비하죠.”
“뭘?”
“오늘 안에 브리온을 다 밀어버리고, 이번 주 안에 세영 씨를 금강 회장으로 만들어요.”
서한이 황급히 이영한 회장을 돌아보았다. 단원들의 부축을 받던 이영한 회장은 저번보다 십수 년은 늙어진 안색으로 진희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는 듯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는, 결국 두 눈을 꽉 닫고 진희를 지나쳤다.
늙은 왕의 퇴장은 허무했다.
그의 측근인 헌터들은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가 버린 아들이 그를 구해주었다. 자신을 지키러 올 줄 알았던 다른 간부들은 이미 이영한 회장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의 초라한 등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허락의 뜻처럼 보였다.
시영과 그가 보호받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진희는 곧장 단원들을 이끌고 보육원으로 향했다.
* * *
또다시 세상이 떠들썩한 소식으로 들끓었다.
이영한 회장의 회장 퇴임과, 지금껏 감춰져 있던 후계자의 회장 취임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거기다 후계자는 이영한 회장이 지금껏 일삼았던 모든 범죄 행위를 언론에 공개했고, 이영한 회장은 그것을 인정하고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권력과 명예로는 한 나라의 대통령도 좌지우지할 수 있다던 금강의 왕의 몰락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그러나 대중은 그 사실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이미 파란 기사단, 헌터 길드를 통해서 대기업들의 횡포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의 소식은 브리온의 해체였다. 사실상 최근 일어난 모든 사건의 배후였던 브리온은 원인 모를 사건으로 간부와 상위 헌터를 대부분 잃었고, 이윽고 브리온의 주식은 연일 하한가를 찍었다.
본래 유럽 자본이 대부분이었던 브리온은, 이윽고 유럽 쪽 주주들에 의해 분할 과정이 시작되었다. 주주들은 각자 브리온의 헌터들을 나눠 가졌다.
브리온이란 기업의 이름은 남아 있으나, 사실상 온갖 투자기업 혹은 주주의 연합체가 되고 말았다.
브리온의 해체에 앞장선 기업은 다름 아닌 ‘볼드만’으로, 세영의 추종자인 루카스 노이만의 기업이었다.
유력자들은 이 사태를 보고 금강의 새로운 회장, 이세영이 손을 쓴 것이리라 장담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자, 사건의 중심인 파란 기사단 또한 막대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 국내의 관심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파란기사단을 주목했다.
금강의 후계자 중 한 명이 단원이란 소문부터, 이영한 회장을 죽이려 한 테러범을 물리친 영웅, 한국의 최강의 헌터라는 소문까지.
당연히 파란 기사단의 할 일이 늘어난 건 당연한 결과였다.
“이 계획 반대다.”
“저도 그렇습니다.”
간부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하던 도중, 서한과 현성이 동시에 진희의 의견에 반발했다.
파란 기사단은 브리온과 금강의 뒤처리를 하고, 대기업 둘의 몰락에 혼란스러운 국내 헌터 시장을 바로잡는 일을 헌터 길드와 진행하고 있었다.
카르나와 나이아라는 적을 앞에 두고서 할 일이 너무 많았던 기사단은 좀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 시간이 지속되자, 진희는 회의를 열어 선언했다.
“나이아랑 카르나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일들 봐요.”
마치 요 앞 슈퍼에 아이스크림 사오겠다는 말투에 서한과 현성이 반대를 외친 것이다.
하지만 진희도 나름대로 할 말은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카르나는 저보다 조금 약해요. 두 분이 붙어도 승산은 없을걸요? 그 수정구 던전에서 만난 바제트를 일대일로 이길 수 있게 되면 데려갈게요.”
“끄응…….”
아무리 서한과 현성이 성장 중이라고 한들, 당시의 바제트를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카르나는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땐 방심한 상태로 싸움에 임해서 그렇지, 처음부터 진심으로 나섰다면 진희도 상처 한 두 개쯤은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게이트를 닫는 재주도 없죠?”
“…….”
카르나만큼이나 까다로운 게 게이트의 존재였다. 미카일이 열고 닫는 게이트는 절대적인 방어력을 자랑한다.
발동 시간은 짧은데, 방어하는 범위는 넓다. 주술을 사용하는 현성이라면 몰라도 서한에겐 쥐약이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발이 묶일 동료라면 데려갈 필요가 없다고 진희는 덧붙였다.
“물론 동료가 아예 필요 없는 건 아니에요.”
“누구 데려갈 건데.”
“카온이요.”
“왜? 조건은 다 비슷하잖아.”
진희가 한숨을 내쉬며 혀를 찼다. 마치 아이를 대하는 듯한 표정에 서한이 또 시작이라며 이죽거렸다.
“카온이 둘보다 좋아서 데려가는 게 아니에요. 둘의 일이 많으니까 카온을 데려가는 거라고요.”
윽, 정말 아이처럼 삐지려 했던 서한이 신음을 흘렸다.
“서한 씨는 세영 씨 도와줘야 하고, 기사단 대외활동도 해줘야 돼요. 그래도 부단장이니까. 현성 씨는 방위대 일로 말할 것도 없고.”
진희가 자리를 비웠을 때를 대비해, 부단장으로 서한을 발탁했다. 워낙 기사단 돌아가는 일도 잘 처리하던 그였기에 반대는 없었다.
사실 그가 부단장이 된 후엔 진희는 서류 업무에서 손을 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성은 방위대와 길드 업무로 철야 근무를 매일같이 하고 있었다.
헌터 대기업이 사라진 여파로 국민들의 불안도 커지고 있었고, 혼란스러운 헌터 시장도 감안해야 했다.
헌터 사업의 공기업화, 정책 제안과 법안 제정 등, 현성이 하는 일은 이젠 정치인 수준에 이르렀다.
“그런 둘을 데리고 가는 게 맞아요, 아니면 제 호위 말곤 할 게 없는 카온을 데려가는 게 맞아요?”
“…….”
할 말이 없던 둘은 입을 꾹 다물었다. 커다란 사내 둘이서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문 건 귀여웠으나, 봐줄 생각은 없었다.
“꼭 지금 당장 상대해야 하나? 사태가 진정된 다음에 해도 괜찮잖아?”
서한의 물음에 진희가 으음, 하고 신음을 흘렸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는데, 안 되겠어요. 보니까 끝내긴 해야겠더라고요.”
“이유가 있나요?”
“직감이에요.”
근거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설명을 해달라는 두 사내의 눈빛에 진희가 목을 쓰다듬으며 말을 흐렸다.
“이건 저도 설명하기 어려워요. 그냥 게네들을 보자마자, 딱 떠올랐어요. 얼른 처리 안 하면 위험하겠다고.”
“……영웅의 직감, 그런 거냐?”
“그럴지도 모르죠.”
영웅이란 단어가 더는 동화에서나 쓰이는 단어가 아니란 걸 단원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악당이 나타난 이상, 영웅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된다.
그 영웅이 진희였기에, 그녀가 카르나와 나이아를 보고 정체불명의 예감을 느꼈다고 한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자이로 씨도 그렇게 말씀하셨죠.”
이주민의 장로, 자이로도 현성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했다.
“단장님의 선택을 존중해 달라고.”
사람의 영혼, 운명을 보는 자이로가 하는 말이라 틀릴 리는 없을 것이다.
결국 반대를 해봤지만, 또다시 싸우는 건 진희 혼자란 결과에 두 사내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그러지 마요. 제가 남아 있어봤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청소라도 하려는 거니까.”
신과 대적하는 걸 청소라고 표현하는 진희의 넉살에 헛웃음이 나오면서도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구체적인 계획은 있습니까?”
“네, 있어요.”
“뭐? 있어?”
“……그럼 제가 아무 생각도 없이 덤빌 줄 알았어요?”
“네.”
“응.”
현성과 서한이 동시에 대답했다. 내 이미지가 이토록 멍청한가, 진희가 진지하게 고민하려던 찰나, 현성이 근거를 요구했다.
“어떤 계획인지 설명해 주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도울 테니까.”
“그래, 고칠 점도 있을 거고.”
“…….”
이번엔 진희가 볼멘소리로 계획을 설명했다. 나름 고심하며 계획한 이야기였다.
모든 계획을 들은 서한과 현성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괜찮네.”
“그러게요.”
“……저기, 둘 다 제 계획을 뭐라고 생각했나요?”
“마야를 인질로 잡아서 나오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을 한다든가?”
“저도 비슷하게 생각했습니다. 납치나 인질극, 아니면 무작정 돌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허허, 진희가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이 둘이 간부만 아니었다면 연병장 백 바퀴쯤 돌렸을 무례한 언사였다.
회의는 차츰 마무리되기 시작했다. 진희를 못 미덥게 여기던 둘도 구체적인 계획을 듣고 납득하는 눈치였기에, 별다른 반발 없이 회의가 끝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야는 어쩌고 있어요?”
“계속 자. 아무래도 더 이상 마력도 사용 못 하는 일반인이 된 후유증이 큰가 봐.”
단원이 도착했을 때, 마야의 외적인 상처는 모두 아문 뒤였다. 미카일이 치료는 확실하게 했는지, 그녀의 등에 있던 총서는 약간의 흉터만 남았다. 문제는 마음의 상처였다.
미카일에게 자진해서 총서를 반납한 듯했는데, 그로 인해 자신이 카르나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에 크게 상심했다.
건방지지만 활기찼던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식사와 수면을 반복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서한은 덧붙였다.
“민하를 붙여줘요. 그럼 마음이라도 진정될 테니까.”
“안 그래도 그나마 찾는 게 민하라더군. 친한 상대인 것 같아.”
“그렇다고 민하에게 너무 정을 붙이게 하진 말아요. 둘 다 더 친해져 봤자 좋을 것 없으니까.”
결국 마야는 적이다. 지금 당장 죽일 필요가 없어 놔둘 뿐, 필요가 생기면 언제든지 검을 들 수 있는 게 진희였다.
괜히 민하에게 아픈 기억을 남겨주고 싶지 않은 진희의 당부에 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어나 볼까요?”
신입 단원, 영감의 공방, 자이로와 이주민의 생활근태 등등을 보고 받고, 드디어 회의가 끝났다.
진희는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한이 먼저 회의실을 벗어났다. 마야와 삼인방 때문에 할 일이 생겼다는 그가 나가고, 뒤이어 나가려던 현성이 문득 문손잡이에 올렸던 손을 떼고 진희를 돌아보았다.
“안 나가요?”
같이 나가려고 했던 진희가 현성을 올려다보았다. 현성은 가만히 진희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조금 쉰 목소리로 물었다.
“진희 씨, 이서한과 잘 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