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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171화 (171/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71화

나이아가 도착하자, 또다시 주변의 공기가 일변했다. 몇몇 단원은 그녀의 비인간적인 외모에 순간 넋을 잃었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이 주변을 집어삼킬 것처럼 일렁였다.

머리카락과 같은 적색의 눈동자로 주변을 살펴본 나이아는, 이내 카르나를 보고 미소 지었다.

조금의 호의도 느껴지지 않는 살벌한 미소에 주변에 있던 모든 이가 간담이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그의 모든 말은 결국 허세에 불과하다. 그는 솜니움을 부활시키고 싶을 뿐이야.”

“이야- 우리 딸 오랜만!”

나이아의 뒤엔 괴짜와 서혁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저번에 만날 때보다 건강한 안색의 서혁을 보며 진희가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아빠 눈치 좀 보고 있어봐.”

“응.”

서혁은 입을 꾹 닫고 뒤로 돌아갔다.

“솜니움은 내 분신이다. 비록 이젠 연결고리조차 없는 빈껍데기일 테지만, 결국 신의 그릇이라는 점은 변치 않지. 신은 다른 세상에 침범할 수 없어. 자신의 세상을 떠난 신의 운명은 보잘것없으니까.”

약한 운명은 강한 운명에 휩쓸리게 마련이다. 이건 신에게도 통용되는 말이었다.

본체였던 나이아는 신자만 있으면 이렇게 신체를 갖추는 것이 가능할 테지만, 솜니움은 경우가 달랐다. 분신으로 태어난 솜니움의 불완전한 신체는 세상의 운명을 버틸 정도로 견고하지 않았다.

그래서 카르나는 솜니움이 살 만한 세상을 찾고 있는 것이다.

“뭐야, 그럼. 결국 자기 애인 살 세상 만들려고 성벽 부수는 거야?”

“정확하다.”

세계적 스케일을 단숨에 연애 소설로 압축한 진희의 말에 나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의 말마따나 커다란 성벽을 부수고 인간들의 성벽만으로 이뤄진 세상이 찾아온다면, 솜니움은 부활할 수 있다. 불완전한 존재지만 그래도 인간의 운명에 휩쓸리진 않을 테니까, 적어도 인간 수준의 삶은 영위할 수 있겠지. 저자가 원하는 게 그것이다.”

신이 존재하면 솜니움은 다시 태어날 수 없다. 하지만 신이 죽고, 그 세상의 운명이 옅어지면 솜니움이 부활할 조건이 채워지는 것이다.

길고 긴 설명이었지만, 결국 카르나의 목표는 하나로 좁혀졌다.

진희는 지금껏 이어진 테러범의 행태가 그제야 이해가 갔다.

미카일은 바제트 때와 달리, 이 세상에선 매우 미온적인 활동을 이어나갔다. 대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이 죽었던 제국과는 달랐다.

“강한 인간이 많이 살아 있어야, 성벽이 무너졌을 때 대비가 되니까. 그래서 그렇게 찔끔찔끔 움직였던 거구나.”

진희의 추리가 옳았는지, 미카일은 대답하지 않고 게이트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이아와 카르나를 번갈아 보았다.

둘은 오랫동안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카르나의 눈빛엔 연민과 서글픔이 담겨 있었고, 나이아의 눈엔 증오와 분노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세상을 멸망시킬 예정인가, 카르나?”

“아니야. 이번에야말로 성공할 것 같아. 나이아의 나약한 세상과는 다르거든.”

“허, 신을 저버린 불신자가 당당하구나.”

“난 애당초 신을 믿어본 적이 없어, 나이아. 솜니움은 신이 아니니까.”

나이아가 이를 악물며 외쳤다.

“그 또한 내 일부다! 분신이라 하여도, 신임을 부정하지 말라!”

그녀의 노기에 주변에 일렁이던 신성력이 날을 세웠다. 하지만 카르나는 그녀가 신성력을 이용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신성력을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인간과 달리, 신은 남을 상처 입히는 재주가 없었다.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얼굴로 나이아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솜니움을 놔줘, 나이아. 난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너를…….”

“닥쳐!”

“이야오우, 자자. 진정하시고.”

둘의 대화가 난폭해질 것 같자, 그 사이를 괴짜가 파고들었다. 괴짜는 진희에게 기묘한 눈인사를 하곤 헛기침을 했다.

“우리 모두 여기서 그만하자. 장소가 적합하지 않잖아?”

“누구 마음대로 그런 걸…….”

“나이아, 내 말 들어. 지금 이곳에서 이렇게 버티는 건 결국 진희만 좋은 일되는 거니까.”

눈치챘나, 진희는 혀를 찼다.

미카일이 등장한 순간, 진희는 카메라를 끄라고 명령했다. 이 이상 송출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진희가 기다리는 건, 다름 아닌 외부의 지원 요청이었다.

지금쯤 헌터 길드의 헌터들이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까지 걸어온 루트를 역추적해 본거지를 알아내려고 하거나, 방송으로 나간 인상착의를 토대로 카르나의 뒷조사도 겸행하고 있을걸? 게다가 저 양반도 정체불명의 주술을 외우고 있는 것 같고.”

괴짜가 턱짓으로 현성을 가리켰다. 현성은 지금 카르나 일행이나 나이아 일행을 향해 추적 주술을 걸고 있었다.

사실 주술은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그걸 눈치챈 괴짜가 도망치자 말한 것이다.

“카르나를 앞에 두고 도망가란 것이냐!”

“오늘의 우리 목표는 카르나가 아니니까.”

사실은 카르나와 나이아를 만나게 해 서로 간의 애증을 확인하는 자리였지만, 괴짜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괴짜는 고개를 돌려 진희를 바라보았다.

“서진희, 파란 기사단 단장. 네게 부탁이 있어.”

“싫어, 안 들어줘, 아빠 두고 꺼져.”

“에잉, 들어주기라도 해라.”

괴짜가 툴툴거리며 서혁을 자신의 뒤로 이끌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이건 부탁이기도 하고, 충고이기도 해.”

“뭐?”

“왜냐하면 네가 자리를 비운 틈에, 브리온이 보육원으로 향했거든.”

기사단 숙소를 미카일이 다녀가더니, 이번엔 보육원을 향해 브리온이 찾아왔단다.

“자세히 설명해.”

“브리온은 지금 궁지에 몰렸거든. 네가 방송하는 걸 보고, 바로 보육원을 향해 출발했어.”

“브리온이 어째서?”

“이세영을 막아야 하니까. 이세영은 금강을 무너뜨리기 위해 열심히 뒷공작하고 있고, 가만 놔두면 그 불똥이 브리온을 튈 거야. 그 전에 이세영의 고삐를 잡을 셈이겠지.”

브리온은 이제 정예를 잃었다. 클로이 남매는 사라졌고, 수많은 S급, A급 헌터는 대부분 파란 기사단 앞에서 무너졌다. 이건 금강도 마찬가지였다.

이영한 회장마저 테러범에게 당하고 있는 지금, 브리온의 남은 간부들은 선택을 내려야 했다.

“우습지? 자기네 회장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도움은커녕 지 살길을 찾고 있어. 최악의 경우 이영한 회장이 죽는다면, 자신들이 설 자리가 사라질 테니 후계자를 상대로 칼자루를 가져가고 싶은 거지.”

그 첫 단추가 보육원이었다.

이서한, 이세영, 심지어 셋째인 이시영마저 보육원과 연관되어 있음을 브리온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단히 유용한 정보지? 설마 브리온이 이런 강경 수단을 사용할 줄은 아무도 몰랐잖아?”

카르나가 일으킨 갑작스러운 기습이 낳은 혼란은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카르나의 정체를 확인하고, 이영한 회장을 구하기 위해 진희가 나선 순간, 그녀를 노리던 적들은 기사단의 빈자리를 노리기 위해 움직였다.

“물론 그냥 돌아가란 건 아니야. 난 진희를 좋아하니까, 선물을 줄 생각이야.”

괴짜는 손가락을 폈다. 괴짜는 손가락 사이에 있던 작은 카드를 진희에게 건넸다. 카드 안엔 작은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내가 다음 만날 자리를 준비해 줄게. 카르나와 나이아, 그리고 진희가 서로 도망칠 구석 없이 만날 수 있는 자리야.”

“모두 예상했다는 것처럼, 준비해 왔네?”

“물론이지. 난 괴짜 니케인걸.”

키히히, 하고 웃는 괴짜를 바라보던 진희가 건네받은 카드를 주머니에 넣었다.

이미 미카일은 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게이트에 반쯤 손을 넣고 있었다. 카르나와 나이아는 여전히 서로 대치하고 있다.

마음에 드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 모든 게 괴짜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괴짜는 카르나가 뭔가 사건을 터뜨릴 줄 알고 있었다. 그를 잡기 위해 진희가 나타나리란 것도, 결국 진희가 카르나를 잡지 못하리란 것도 예상했다.

“브리온에게 정보 흘린 거, 너지?”

“…….”

“이렇게 딱 좋은 타이밍에 브리온이 빈집을 노리긴 힘들지. 그네들은 파란 기사단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를 테니까. 보육원에 누가 남아 있고, 언제 습격하면 좋을지 귀띔한 사람이 있을 거 같은데, 그게 너지?”

“왜 그렇게 생각해?”

“그동안 네 수법이 그랬으니까.”

미국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정재민에게 박민성의 정보를 알려주고, 세영의 곁에서 수작을 부리거나, 클로이를 이용해 진희의 과거 부하를 죽였던 일까지, 모조리.

모든 일의 뒤엔 괴짜가 있었다.

이번에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진희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메마른 눈으로 괴짜를 바라보았다.

“클라이맥스가 다가오는 게 느껴지나 봐? 직접 행차한 걸 보니까.”

“역시 진희는 눈치가 좋아. 그런 점을 사랑해.”

“난 널 사랑하지 않아, 능구렁이 같으니.”

괴짜가 웃음으로 잠시 진희에게서 시선이 떨어진 순간, 진희는 괴짜 뒤에 있던 서혁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둘은 정체불명의 짧은 웃음을 나눴다.

“좋아, 이번만 네 부탁을 들어줄게.”

진희는 미카일을 바라보았다.

“도망쳐. 특별히 놔줄 테니까, 얼른 꽁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

미카일은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열진 못했다. 그저 나이아를 주시하는 카르나를 향해 빨리 돌아가자 재촉할 뿐이었다.

카르나를 붙잡고 싶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던 나이아는 분노에 차 이를 갈며 진희를 노려보았다.

“인간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저자를 따라 이 세상을 파괴할 것이냐? 아니면 나를 따라, 저자의 몰상식한 행위를 막을 것이냐?”

“너희 둘 중 하나 편들 생각 없어. 당신도 꺼져.”

“뭐…….”

“으앗차차, 자자! 돌아가자, 돌아가!”

괴짜가 나이아의 앞을 막아섰다. 설마 진희가 대놓고 도발을 날릴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안색으로 나이아를 달랬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희는 시선을 돌려 서혁을 쳐다보았다. 서혁은 팔짱을 낀 채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괜찮아?”

“걱정 마.”

짧은 대화였지만,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부녀는 언제나 그렇듯 그렇게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다.

나이아를 데리고 가려던 괴짜는 서혁을 흘끔 보곤 물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돌아가게 해줄래, 그럼?”

“아니. 진희가 그걸 바랐으면 다른 협박을 해서 막았겠지.”

아직 서혁을 놓아줄 생각이 없던 괴짜는 서혁을 돌려달란 진희의 요구에 받아칠 카드를 여럿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진희가 서혁을 보고도 아무런 말이 없자, 의심이 생겼는지 서혁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괜찮겠어? 따님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는데.”

“상관 마. 저래 보여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오호,”

첫 삼자대면이자, 격한 전투를 벌였던 만남치곤 허무한 이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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