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70화
서한은 자신의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한 사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흑발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장신의 사내가 레인을 지키기 위해 서한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이 사내의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서한이 고개를 돌리자, 비단 자신뿐 아니라 진희의 앞에도 다른 이가 막아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엔, 익숙히 봐왔던 게이트가 떠올라 있었다.
“미카일, 마노.”
카르나의 부단장인 미카일과, 마야의 남매인 마노가 그곳에 있었다.
“말도 안 돼, 분명 게이트를 여는 능력은…….”
“마야가 협조했습니다.”
미카일은 가죽 주머니를 들어 보였다.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가죽 주머니를 보고, 설마 하고 현성이 물었다.
“그거, 등에 있던…….”
“예, 마야의 등에 각인되어 있던 헤르메스의 총서입니다.”
미카일은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들은 자신의 동료인 마야의 등에서 헤르메스의 총서를 말 그대로 뜯어내 가져온 것이다.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현성을 두고, 서한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애들은 어떻게 했지?”
“걱정 마십시오. 지키는 단원들이 강해서, 저희도 몰래 들어갔다 나올 수밖에 없었으니까.”
헤르메스의 총서를 가진 마야의 남매인 마노는 각종 환상마법에 능했다. 그는 삼인방의 눈을 피해 몰래 마야에게 접촉해, 그녀의 등에서 총서를 받아낸 것이다.
“마야는 어때?”
“치료는 해뒀습니다만, 앞으로 전선에 나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미카일의 단호한 어조에 카르나가 쓰게 웃었다. 마야를 딸처럼 여기던 미카일이었다.
마야를 더 이상 데리고 다닐 수 없다는 판단은 쉽게 내릴 수 있는 게 아니었겠지.
어차피 마야에게 준 힘도 전부 미카일이 나눠준 영혼의 힘이다. 오히려 마야보다도 총서를 잘 이용할 줄 아는 그는 사방에 게이트를 펼쳤다.
마치 방어벽을 펼친 것처럼 게이트가 사방에 깔리자, 단원들의 움직임이 제한되었다.
“돌아가시죠.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이곳에 있다간 고립되고 맙니다.”
“으음, 성과가 너무 없는데.”
“성과는 있습니다.”
미카일이 증오가 얼룩진 눈으로 진희를 바라보았다.
“저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총서를 회수했으니까요. 이제 인질 잡힐 일 없습니다.”
더 이상 마야를 쫓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진희가 마야를 이용할 줄 예상한 그는, 결국 마야에게서 이용가치를 없애버렸다. 진희가 마야를 데리고 인질로 활용할 수 없도록.
이제 게이트를 다룰 줄 알게 된 미카일에겐 이 정도 위기는 어렵지 않게 회피할 수 있었다.
“하나 더 물어봐도 돼?”
진희는 검을 휘둘러, 자신의 앞에 있던 게이트를 단숨에 찢어발겼다.
라이샤의 검을 들고 있는 지금, 게이트의 방어력은 그녀에겐 문제가 아니었다.
미카일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게이트가 저렇게 쉽게 찢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한 표정이다.
“보육원에 마야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나름 숨겼는데.”
“……전 제 영혼의 파편을 가진 아이들이 어디에 있든 찾아낼 수 있습니다. 방위대에서 레인이 붙잡혔을 때가 그렇듯.”
“과연. 그걸 깜빡했네. 내 실수야.”
진희가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만났을 때부터 죽였어야 했는데.”
“…….”
그 말을 농담으로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르나마저도 굳은 표정으로 진희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이란 건 짧은 대화만으로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자. 이게 정말 마지막이야.”
“……뭔가요?”
미카일은 마야의 피부가 담긴 가죽 주머니를 뒤로 숨기며, 게이트를 열었다. 당장에라도 일행과 함께 도망치려는 그의 수작을 보며 진희가 피식 웃었다.
“너무 쫄지 마.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려는 거니까.”
“…….”
“너희 목적이 정확히 뭐야? 이 세상의 성벽을 부수는 거? 그거 부숴서, 대체 뭘 하려고?”
마야에게서 카르나의 과거를 들었을 때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이었다.
정황상 카르나라는 가문, 단체는 지금껏 수많은 세상의 성벽을 무너뜨려 온 듯했다.
카르나의 환생을 추적하면서, 카르나를 찾으면 그 세상의 성벽을 부순다. 그리고 세상이 멸망하면, 다시 이것을 반복한다.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무의미한 반복이었다. 진희의 물음에 미카일이 대답할 필요도 없다는 듯 게이트를 넓히려 했지만, 카르나가 앞으로 나서 미카일을 막았다.
“하긴, 누님에겐 설명해도 좋을 것 같아. 그러니까 그거 내려놔.”
“들켰네?”
진희가 방긋 웃으며 손목 안에 감춰 두었던 단검을 떨어뜨렸다.
만약 미카일이 대답하지 않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간다면, 단검을 던져 막으려던 속셈이었다. 미카일이 질린 듯한 얼굴로 진희를 노려보았다.
“단순해, 우린 성벽이 무너져도 유지되는 세상을 찾고 있어. 물론 운명에 얽매인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도 하고 있지.”
“유지되는 세상?”
“응. 신들은 성벽이 무너지면 세상도 멸망할 거라고 말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아. 그 세상의 인간들이 더 강한 욕구와 영혼을 타고났다면, 세상은 인간을 중심으로 다시 시작돼.”
신이란 존재의 의미는 기둥이다. 신이란 두터운 기둥이 있어야만 성벽이 유지되고, 그 안에서 세상이란 안전한 마을이 펼쳐지는 것이다.
하지만 성벽이나 신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불완전한 마을은 곧 다른 세상의 운명에 잡아먹혀 멸망한다.
진희가 만나왔던 초월자들은 모두 그렇게 말했었다.
“그건 인간의 가능성을 무시한 자들의 논리야. 인간의 운명, 영혼의 가능성은 무한해. 인간은 그야말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랜덤 박스니까.”
뜬금없는 인간찬가였다. 카르나가 경이롭단 얼굴로 설명을 덧붙였다.
“신의 화신, 영웅, 세상을 멸망시키는 악당, 비루한 인생, 고귀한 인생…… 인간은 세상의 중심, 신이 될 수 있어.”
“……신을 만들 셈인가?”
카온의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에 카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모두가 신이 되는 거지. 모두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권리를 얻고, 또 그 권리를 행사하며 ‘나만의 성벽’을 갖는 거야. 그렇게 수많은 강인한 인간이 모여, 절대 무너지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거지.”
지나친 이상론이었다. 이주민의 장로 자이로가 인간마다 정해진 운명이 있다곤 했지만, 그게 곧 모든 인간이 자신만의 성벽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의 말은 마치 모든 개인이 자유를 가지는 무정부국가를 염원한다는 것과도 같았다.
“운명을 타고나지 못한 인간들은 어쩔 건데? 운명을 개척하는 힘을 가지지 못한 사람도 많을 텐데?”
진희의 물음에 카르나가 뭘 이상한 걸 묻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 도태되는 거지. 약한 세상이 다른 강한 세상에 먹히는 것처럼, 그런 인간들은 결국 다른 인간의 강인한 영혼에 질 수밖에 없어. 그게 섭리야. 강한 인간만이 남게 되면, 그만큼 완벽한 세상이 될 테니까.”
“우생학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결국 성벽은 울타리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지켜주는 기능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카르나는 약한 인간을 버려두고, 강한 인간들로만 이뤄진 성벽들의 세상을 원하고 있었다.
만약 그의 바람대로 세상이 변한다면, 운명에 흔들리는 평범한 사람들은 모조리 다른 이들의 운명에 잡아먹혀, 희생양이 되고 말 것이다.
“왜? 뭐가 안 돼? 지금 이 세상도 다를 바 없는걸?”
“뭐?”
“지금도 강한 자, 돈이 많은 자, 권력이 많은 자가 그렇지 못한 자들을 착취하며 살고 있잖아? 누님은 정말 이 세상이 평등하다고 생각해? 약한 자는 착취당하게 마련이야. 내가 본 모든 세상에선 다 그래왔어. 그렇다면 차라리 자격도 없는 녀석들에게 지배당하는 것보단, 능력이 출중한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편이 낫잖아?”
카르나는 더욱더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운명을 개척할 능력과 의지가 있음에도 주변의 상황 때문에, 성벽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아이들도 봐왔잖아? 누님이 있다는 그 보육원, 그 아이들도 누님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어떤 인생을 살아왔을지 짐작이 되지?”
마냥 모순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세상의 운명, 개인의 운명이란 애매모호한 관계에 희생된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카르나가 거둬들인 아이들 대부분이 그런 운명을 타고난 아이들이었고, 진희도 보육원 아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던 것은 아니었다.
만약 진희라는 환생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까마귀파에게 점령당한 보육원 아이들의 인생은 어찌 되었을까.
요정인 민하는 조폭들에게 팔려가 어디 연구소로 향했을 테고, 동생을 쫓던 청하는 처참하게 살해당했겠지. 삼인방 또한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세상은, 내 노력만으로 운명이 개척되는 세상이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보복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 세상. 의지가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세상.”
하지만 논리가 얼추 맞을지언정, 그의 세상은 오점투성이였다.
“선과 악이란 개념이 없군.”
그걸 알아챈 건 진희뿐만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게이트를 부수려고 노력하던 서한이 말했다.
“의지만으로, 그리고 노력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용납받는 세상이라면 법은 필요 없겠지. 약하더라도 선한 사람이 보호받고, 강하더라도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 게 세상의 이치다.”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야. 악한 이가 강하다면, 그보다 더 강한 정의의 사도가 나타나길 비는 수밖에 없겠지.”
“너도 그런 악한 사람에게 당하고 나면 그런 소린 안 나올 텐데? 그 멍청한 세상에선 억울한 사람이 없을 것 같나?”
“있겠지. 하지만 지금보단 아니야. 적어도 힘의 차이로 인해 겪는 패배는 억울한 패배가 아니니까.”
사고방식이 달랐다. 애당초 카르나는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에 죄나 선행을 집어넣지 않는 부류였다.
사람은 오로지 능력만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능력이 우수한 사람이 살아남는 세상이 곧 당연한 세상인 것이다.
그 확고한 논리에 서한마저 할 말을 잃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약자의 입장이란 걸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이에게 약자의 입장을 변론할 방법은 없었다.
“근데 그게 솜니움과 무슨 상관인데?”
가만히 듣고 있던 진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참 열변을 토하던 카르나가 삽시간에 굳은 얼굴로 진희를 바라보았다.
진희는 대체 언제 이 대화에서 솜니움이 등장하는지 기다리고 있었다.
“넌 솜니움을 만날 때까지 계속 환생을 하고 있는 거잖아?”
“…….”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에 진희가 피식 웃었다.
그는 아직 진희가 바제트 때의 잔류 기억을 읽었다는 걸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미카일이 한 말을 듣고, 그가 아직 솜니움을 잊지 못했으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건…….”
카르나가 처음으로 대답을 주저했다. 지금껏 거짓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숨기는 것이 있는지, 진희는 기대감 어린 얼굴로 카르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일행의 뒤편에서 한 목소리가 대신 답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성벽이 없어진 세상이어야만, 솜니움이 다시 태어날 수 있으니까.”
“……여기가 핫플레이스인가 봐? 아주 다 모인다?”
건너편에서 한 무리의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멀리 있음에도 압도적인 신성력이 느껴졌다.
저자가 바로 카르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저주를 내린 반신, 나이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