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69화
또다시 날아온 검격을 부드럽게 피해낸 카르나를 보며 진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묘한 힘이 그를 감싸고 있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분명 마력을 사용하는 건 아닌데, 그는 알 수 없는 기묘한 힘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신성력이군.]
그런 카르나를 본 바르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신성력도 참 싸구려가 됐어. 저런 한량마저도 사용한다니.]
“쟤가 신의 힘을 쓴다고?”
[빌려 쓰는 거겠지. 아무리 봐도 영혼은 인간의 것이니까. 경건함이 느껴지지 않는 무색무취의 신성력이지만, 그래도 본질은 다르지 않다. 인간의 마력으로 이길 수 있는 힘이 아니야.]
진희의 금색 마력은 무상성의 속성을 지녔다.
모든 속성의 마력과 대등하거나 그보다 앞선 파괴력을 보이는 게 특징인데, 신성력은 이런 마력의 특징을 깡그리 무시하는 말 그대로 기적과 같은 힘이었다.
마력이 세상의 법칙을 거스른다면, 신성력은 세상의 법칙을 새로 쓰는 수준의 힘이다. 괜히 이영한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게 아니었다.
마력과 언어로 온갖 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도 결국 신성력 앞에서 무너지고 만 것이다.
[내 힘으로도 상처입히긴 힘들어. 정령의 힘은 분명 영혼에 직접적인 공격이 가능하지만, 신성력을 뚫을 정도의 파괴력은 나오지 않는다.]
“그거 믿고 저렇게 뻗대는 거구나.”
왜 카르나가 기사단 앞에서 여유를 부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신성력이 패배하리라곤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신성력이라 하면 솜니움이란 신의 힘인가.’
아무래도 상대하기 쉽진 않을 듯했다. 진희는 아주 잠깐 고민하는 듯싶더니, 이내 습관처럼 눈을 비비며 말했다.
“에라, 모르겠다.”
그리고 돌진했다.
단숨에 카르나의 앞으로 파고든 그녀가 바르그를 휘둘렀다. 자신의 머리를 쪼갤 듯이 내려찍는 검을 몸을 흔들어 피한 카르나가 비웃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소용없어, 누님.”
“있을 때까지.”
“뭐?”
“소용 있을 때까지 때려보지, 뭐.”
카르나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진희의 검이 폭풍처럼 그에게 몰아쳤다.
사방을 에워싸며 공격해 오는 검의 일격은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단 한 번이라도 맞는 순간 사지가 뜯길 것이다.
하지만 카르나는 그 모든 공격을 쉽게 피해냈다. 마치 검이 이곳으로 향할 줄 알았다는 듯, 그는 예지에 가까운 관찰력으로 그녀의 검로를 벗어났다.
진희의 검이 이토록 속수무책으로 휘둘러지는 걸 본 적이 없던 단원들은 믿기지 않는 듯한 눈길로 둘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소용없어. 네 검술이 문제가 아니라, 저 신성력이 문제다. 몸에 두른 신성력을 벗겨내지 않으면 무슨 공격을 하든 다 빗나갈 거야.]
카르나가 잘 피한다는 게 아니라, 진희의 검이 카르나에게 빗나가고 있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바르그가 진희에게 우선 후퇴한 다음 해결책을 찾아보자고 말하려 할 때, 기적이 일어났다.
“어?”
진희의 검이 카르나의 뺨을 스치고 간 것이다. 뺨에 흐르는 한 줄기 선혈에 카르나가 당황한 얼굴로 뒤로 도약했다.
도망가는 그를 놔줄 진희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카르나의 목에 검을 들이밀었다.
“이게 무슨…….”
분명 공격을 완벽히 피하고 있었으나, 진희의 공격은 차츰 그에게 닿기 시작했다.
그의 검날, 소매 끝자락, 이윽고 피부에 닿기 시작한 그녀의 검에 카르나가 당황한 표정을 드러냈다.
“어떤 식인지 감이 오네.”
묵묵히 검을 휘두르던 진희가 말했다. 공격을 빗나가게 하는 신성력의 방식에 차츰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빗나가는 방향, 신성력의 발동 순간, 카르나의 속도를 모두 이해하자 그녀의 검은 점점 정확해졌다.
마치 마야가 만들어내는 게이트를 뚫을 때와 비슷하다.
[이게 말이 돼?]
놀란 건 카르나만이 아니었다. 바르그는 신성력이란 섭리를 힘과 센스만으로 부수고 있는 진희의 기행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게이트를 검으로 잘라내고, 유사 성벽을 맨주먹으로 무너뜨린 경력이 있는 진희에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여간 영웅이란…….”
카르나가 혀를 차며 검을 휘둘렀다. 카르나의 첫 공격에 진희가 잠시 움츠러드는 순간, 그는 손가락으로 수인을 맺었다. 직접 신성력을 사용하려는 신호였다.
“영웅들은 때때로 법칙을 벗어나는 힘을 사용하곤 한다지만, 정말 질릴 정도라니…….”
“혓바닥 움직일 시간은 있니?”
“윽!”
짐짓 여유롭게 말하던 카르나는 자신의 눈앞을 지나간 검 끝에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맺어진 수인이 이영한에게 했던 것처럼 정체불명의 기운을 뿜어내며 진희를 위협했다.
[도망쳐라!]
바르그가 번개를 내뿜으며 신성력을 물러나게 하려 했지만, 신성력은 잠깐 흔들릴 뿐 곧장 진희를 향해 날아왔다.
형태는 마치 단검과도 같았다. 투명한 단검이 진희의 얼굴을 향했고, 그것을 쳐내기 위해 검을 든 진희였으나.
“이건 위험해.”
막아낸 건 진희가 아니라 라이샤였다.
싸움을 관찰하며 파고들 틈을 노리고 있던 단원 중 가장 먼저 다가온 라이샤가 카르나의 공격을 흘려내곤 진희의 앞에 섰다.
[도망치라고 했지 않나!]
“막으려고 했는데?”
[못 막아! 아무리 나라고 해도, 저 공격엔 당해내지 못해.]
바르그가 분한 듯이 말했다. 얼떨결에 라이샤 뒤로 물러나게 된 진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게 그렇게 위험한 공격이라고?”
가벼운 마법을 사용하듯 뿌린 공격이라,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못했었다.
진희의 믿지 못한다는 말투에 대답한 건 앞에서 카르나를 노려보고 있던 라이샤였다.
“카사의 힘이랑 비슷해.”
“라이샤의 검 말이야?”
“맞아.”
라이샤가 들고 있는 흑색의 검. 그녀의 신인 카사가 준 선물이자, 정체불명의 절삭력을 가진 보물이었다.
과거 탑의 던전에서 라이샤와 마주했을 때 이 검을 피하기 위해 곤욕을 치렀던 게 떠올랐다.
“네 검도 신이 빚은 무기구나. 하긴, 그럼 비슷하다고 봐야겠지.”
카르나가 라이샤의 검을 알아보고 맞장구쳤다. 그가 가진 신성력도 신에게 부여받은 것, 라이샤의 검과 같은 위력을 지니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신의 기적엔 같은 기적으로만 대응할 수 있다. 카르나의 신성력을 본 라이샤는 본능적으로 그걸 알아채고, 진희의 앞으로 나선 것이다.
“단장도 있잖아, 카사가 준 갑옷.”
“아, 맞아.”
탑의 던전을 공략한 보상으로 카사가 진희에게 기적을 내려준 적이 있었다.
그동안 사용할 일이 없어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그녀 또한 신의 무구를 부여받은 것이다.
그 갑옷을 입었다면 저 신성력에도 대응할 수 있었으리라.
“나참, 이젠 둘이서 같이 덤비는 거야?”
라이샤와 진희가 같이 공격할 것 같자, 카르나가 곤란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진희 한 명 상대하기도 힘들었는데, 라이샤까지 거든다면 일이 더 복잡해질 듯했다.
카르나는 흘끔 레인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레인은 서한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아직 레인의 수준은 서한에 비벼볼 정도는 아니었다.
‘슬슬 때가 됐는데.’
“공격은 내가 맡아서 할게. 단장은 저자의 공격만 막아줘.”
카르나가 시간을 재던 중, 라이샤는 공동전선을 만들기 위해 진희에게 작전을 설명했다.
라이샤가 검의 공격력을, 진희가 갑옷의 방어를 담당하잔 이야기였다. 라이샤의 진지한 설명을 듣던 진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라이샤, 그럼 그 검을 내가 좀 빌리면 안 돼?”
“……어?”
“카사가 준 갑옷을 지금 입고, 그 검을 들면 완벽한 거 아니야?”
“아.”
솔직히 말해, 카르나는 라이샤보다 강했다. 진희를 제외하곤 단원 중 카르나의 움직임에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괜히 라이샤와 함께하는 것보단, 진희의 장비를 강화시키는 게 전력 상승의 방법으론 더 탁월했다.
듣고 보니 맞는 소리에 라이샤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같이 싸운다는 말에 조금 흥분한 듯한 그녀의 어깨를 토닥인 진희가 걱정 말라며 웃어 보였다.
“귀엽기는.”
“…….”
진희는 라이샤에게 바르그를 맡기고, 그녀의 검을 쥐었다. 저번에 클로이를 상대할 때 이후로 처음 쥐는 라이샤의 검이었다.
“너도 시간을 벌고 있는 것 같으니까, 슬슬 끝내자.”
“들켰어?”
“응.”
조금의 긴장감도 없는 대화였지만, 서로가 바라는 점은 명확했다.
“누님의 단원들도 뭘 준비하는 것 같은데?”
“응, 넌 알 거 없어.”
카르나는 시간을 벌길 원하고, 진희는 카르나의 모습이 더 보이길 바란다.
카르나는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그의 모습은 지금 실시간으로 생방송 되고 있었다.
다름 아닌 PD의 카메라에 의해서.
PD의 곁을 지키고 있는 카온과 현성은 이 모든 장면을 모두 촬영했다.
물론 서한과 레인의 전투엔 앵글을 돌리지 않고, 오로지 진희와 맞선 카르나의 얼굴만 담아냈다.
마치 괴짜와 미카일을 고립시켰던 것처럼, 그리고 파란 기사단의 명예와 명분을 얻기 위해 던전을 공략할 때처럼.
이 모든 것은 쇼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쇼는 진희가 테러범의 수장인 카르나를 체포하는 것으로 완결될 예정이다.
“카사.”
진희가 낮게 카사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의 손등에 빛의 문양이 떠올랐다. 문양은 순식간에 온몸을 덮었고, 이내 신비로운 갑옷이 되었다.
쓸데없이 화려한 연출이다. 진희는 내심 카사의 센스에 쓰게 웃으며 자신의 갑옷을 살펴보았다.
카사를 뜻하는 듯한 등대의 문양이 새겨진 백색의 판금 갑옷이 눈에 들어왔다.
진희와 카르나가 두 번째로 격돌했다. 아까와는 달리 진지하게 검을 든 카르나와, 장비를 다시 갖춘 진희의 충돌은 주변 마나들이 거세게 흔들릴 정도로 격렬했다.
진희의 검이 카르나의 머리를 노리자, 카르나는 고개를 숙여 진희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어 옆구리를 찔렀다.
그것을 갑옷의 건틀렛으로 쳐내버리고, 그대로 돌아 발로 카르나를 걷어찼다.
발로 차이는 와중에도 카르나는 신성력을 이용해 진희를 향해 공격을 감행했다.
“그 신성력이란 건 만능이야?”
“아직 진면목의 반도 안 나왔어.”
라이샤의 검으로 신성력을 부숴버린 진희가 한 발자국 물러나, 다시 검을 휘둘렀다.
날카롭게 목을 노리는 그녀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카르나가 혀를 차며 외쳤다.
“아직이야? 미카일!”
아무래도 그가 기다리는 사람은 부단장 미카일인 듯했다. 진희가 눈을 흘겨 현성을 바라보았다. 현성은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주변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는 뜻이었다.
마야도 보육원에 있다. 그들에겐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을 터였다.
“뭐냐,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