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65화
“당신은 여기서 얻은 정보로, 나가자마자 날 추적해 올 것 같아.”
“당연하지. 그럼 납치범을 그냥 놔두겠냐?”
“문제는 그 와중에 너는 내 계획마저 망가뜨릴 것 같단 말이지.”
“…….”
“당신은 날 찾는 게 아니라, 내가 알아서 나타나도록 만들 사람이야.”
마치 진희가 그랬던 것처럼.
바깥은 이미 괴짜와 미카일의 신상정보가 대중에게 떠돌고 있었다. 괴짜의 생김새와 이름, 전적, 모든 게 일반인들에게 까발려졌다.
우습지만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괴짜는 미카일의 동료들처럼 변장하는 기술도 없었으니,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나이아를 찾는 게 늦었다면 결국 진희에게 행적이 발각되었으리라.
서혁은 진희보다 더한 방법으로 괴짜를 압박할 것이다.
괴짜는 서혁의 재능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좀 더 데리고 있어 보기로 했어. 나이아도 당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으니까.”
“하하, 내 의지는 들을 필요도 없나?”
“물론이지. 납치범이 인질 사정 봐줄 필요 있니?”
“살벌한 경찰이 네 뒤를 쫓고 있는데 말이야.”
“맞아, 그래서 숨을 예정이야.”
이 저택도 수명이 다했다. 마야가 탈출하면서 만든 균열에 지금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상황을 봐야 하니, 한국 벗어나긴 힘들고. 슬슬 은신처 좀 찾아봐야지.”
“어디로 갈 건데?”
“비밀.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괴짜는 잘 자라며 서혁에게 손짓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괴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혁이 작게 웃었다.
“사람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데리고 다닌다고 잠자코 같이 있어줄 서혁이 아니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선 호출기를 매만졌다.
정말 우습게도, 그리고 우연히, 마치 신이 점지한 것처럼. 괴짜와 서혁이 방문했던 금강의 제단은 신림 바로 근방에 위치해 있었다.
그는 나가는 순간 호출기를 눌러 메시지를 보냈고, 딱 한마디의 문자가 돌아왔다.
[갈게.]
“애는 역시 어렸을 때부터 책을 읽게 해야 돼.”
책이란 뭐든 읽으면 득이 되는 법이다.
로맨스 소설을 읽을 때 진희의 그 시답잖다는 표정이 떠올랐지만,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딸이 대견해 서혁은 소리 없이 웃었다.
마야의 호출기가 진희의 손에 무사히 되돌아갔단 뜻이었다.
* * *
“거처가 없구나.”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미카일 탓이 아니야. 하지만 이렇게까지 몰린 적이 없어서, 당황스럽긴 하네.”
카르나는 쓰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이 있는 곳은 산속의 폐가였다.
아마 식당을 했던 곳인 듯, 계곡 곁에 있던 폐가에 자리를 잡은 미카일은 카르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동안 수많은 세월을 지내면서도 이처럼 볼품없는 숙소에 단장을 모신 건 처음이었다.
“이 세상의 영웅은 대단한가 보네.”
“……면목 없습니다.”
“널 탓하는 게 아니야. 우선 들어가서 좀 앉을까?”
그간 마노가 청소해 둔 덕인지 폐가 안은 깨끗했다. 카르나는 적당한 장소에 앉은 후, 마노에게 물었다.
“다른 애들은?”
“마야는 니케 로만에게 잡혀갔습니다.”
“니케라면 로칸을 말하는 거지? 걔가 왜?”
“모르겠습니다.”
“흠, 그 녀석의 목적에 마야가 필요하진 않을 텐데.”
카르나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아이는 우리 가문에 들어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잖아. 바로 저번 세상에서 합류하지 않았던가?”
“맞습니다.”
“난 얼굴만 봤던가.”
마야를 구해줄 당시에 잠깐 얼굴만 보고 말았었다.
그 이후 마야는 카르나 가문의 본가로 돌아가 교육을 받았다. 일상생활이 필요한 자잘한 기술이나 예절, 전투 능력을 키운 뒤 처음으로 도전한 실전이 바로 이곳이었다.
“본가 쪽엔 연락 없어?”
“이 세상의 성벽이 너무 두텁습니다. 아직 한 번도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곤란한데. 너희만으론 힘들겠어.”
카르나는 나이아에게서 탈출하면서 자신의 가문을 만들었다. 틈새의 세상에서 거처를 마련한 가문은 마야나 레인처럼 운명에 버림받은 아이들을 보호해 주고 키워주는 시설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보육원이었다.
“내 능력으로 힘을 빌릴 순 있지만, 인원이 부족한 건 어쩔 수가 없네.”
이 세상에 있는 병력이라곤 미카일과 마노, 마야, 그리고 레인뿐이었다.
자신이 있으니 무력적인 측면에서야 부족함이 없겠지만, 다른 자잘한 작업을 하는데 손이 부족할 듯싶었다.
“네가 움직이지 못한 걸 보면, 이 세상도 어지간히 어렵나 보다.”
미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구가 만만찮은 세상이란 건 사실이었다. 수많은 게이트가 생겨나고, 영웅급의 헌터가 범람하고 있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성벽은 뚫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으니까.
성벽이 무너져야 다른 세상의 가솔들을 데려올 기회가 생길 텐데, 그간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으음, 게이트를 여는 것만으론 성과가 없구나.”
“영웅, 서진희가 문제입니다.”
대답하지 못하는 미카일을 대신해 마노가 말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보고받은 카르나가 안타깝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도 운명이 참 얄궂군. 환생해서 또다시 영웅 역할을 할 줄이야.”
“전생이 기억나십니까?”
카르나 때의 기억 말고는 전생에 대해 제대로 기억하는 게 없던 그였다.
마노가 놀란 얼굴로 묻자 카르나가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게도 기억나네. 전생이 충격적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바제트 누님에 대한 기억은 또렷해.”
전생의 카르나는 열등감 덩어리였다. 가주 후보였던 바제트에 대한 질투로 미쳐버린 그는 바제트를 죽인 후에도 끔찍한 행보를 이어나갔다.
망명이 된 후에도 제국에서 온 탕아란 욕을 들으며 주변에 폐를 끼쳤다. 그를 돕던 미카일이 아니었다면 진작 암살당했을 것이다.
“잊고 싶은 기억이긴 한데.”
제니트는 카르나의 성격과는 사뭇 다른 인물이었기에, 기억이 떠오른다 해도 쉽게 공감할 순 없었다.
“그럼 지금 가장 시급한 건 마야를 되찾는 건가?”
“예. 그러기 위해선 니케 로만을 찾아야 합니다.”
마야가 파란 기사단에게 사로잡혔단 사실을 아직 모르는 마노는 괴짜를 찾아야만 한다고 말했다. 카르나는 턱을 괴곤 생각에 잠겼다.
“어렵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면서 추적까지 해야 한다, 이 말이지.”
조사와 추적이란 힘이 강하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시간과 돈, 인력과 인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별수 없네, 강행수단으로 가자.”
한참을 고민하던 카르나가 꺼낸 답은 단순했다.
“가장 만만한 단체가 어디야? 거길 빼앗자.”
그건 도적질의 기초였다. 필요하면 빼앗으면 된다.
그의 단순한 해결방법이 이번이 처음이 아닌 듯, 마노와 미카일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명령에 따랐다.
폐허 속에서 간단한 회의가 끝난 후, 카르나는 폐허의 문 앞에서 기대고 있던 레인을 발견했다. 레인은 거뭇해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카르나의 밝은 인사에 레인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가문에서 나고 자랐던 레인은 카르나의 실물을 처음 본 셈이었다.
미카일에게 듣던 위인을 실제로 보게 되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 익숙하지 않은 레인이 불편한 얼굴로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런 레인을 카르나가 멈춰 세웠다.
“레인, 그 지팡이 언제까지 들고 있을 거야?”
“이거 말인가요?”
레인이 들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끝이 뾰족하게 마감된 검은색 지팡이는, 정체불명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아티팩트였다.
“미카일 말곤 공성추를 제대로 사용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레인은 대단한 아이로구나.”
아이를 대하는 듯한 그의 말투에 레인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공성추란 이 지팡이의 이름이었다. 성문을 부수는 무기란 뜻의 이 지팡이는, 카르나와 솜니아가 만든 무기이기도 했다.
“한번 줘볼래?”
“네.”
레인에게서 파성추를 받아 든 그가 새삼 그립다는 눈빛으로 그것을 휘둘렀다.
“공성추란 이름 참 성의 없지? 딱히 지을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즉석에서 만들어낸 이름이야. 성문을 부수고, 신을 죽인 무기라 좀 더 그럴듯한 이름을 지어줬어야 했는데.”
솜니움의 권능이 담긴 이 지팡이는 카르나의 첫 무기이자, 성벽을 부순 최초의 무기였다.
이것으로 나이아의 심장을 찌르던 기억이 떠올라 카르나가 쓰게 웃었다. 당시엔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솜니움과 닮은 그 아름다운 얼굴에서 눈물을 보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미카일이 이걸 왜 레인에게 줬는지 알아?”
“몰라요.”
“그건 레인이 영웅을 증오하고 있기 때문이야.”
“…….”
영웅이란 곧 신의 화신이며, 성벽의 수호자다. 신의 가호를 벗기고 영웅을 죽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무기가 바로 이 공성추였다.
영웅의 운명을 이기기 위해선 더 강한 운명이 필요했다. 공성추에 담긴 신을 죽였다는 업적과 성벽을 무너뜨렸다는 운명은, 그 어떤 신의 가호보다 강력했다.
“잘 들어, 레인.”
그가 레인에게 지팡이를 들어 보였다.
“마법을 쓸 때 사용하는 게 좋긴 하지만, 이 지팡이는 근접 무기로도 활용할 수 있어. 찌르는 방식으로 말이야.”
“알고 있어요.”
“응, 그러니까 찌를 땐 이렇게 찌르는 거야.”
카르나는 지팡이를 역수로 잡았다.
“레인은 키가 작고, 힘이 약하니까 역수로 잡는 게 효과가 가장 좋아. 상대방이 자신보다 덩치가 크다면 더더욱.”
마치 투창 자세를 잡는 것처럼, 지팡이를 잡고 찔러넣는 시늉을 했다.
“죽일 거라면 확실히, 정확하게 찌르는 거야. 공성추를 네가 가진 이상, 네 역할은 바로 이거야.”
“역할?”
“영웅을 마무리하는 것.”
“……제가 서진희를 죽이란 말씀인가요?”
“가장 이상적인 결말이지.”
카르나는 빙긋 웃고는 공성추를 되돌려주었다.
“미카일에게 네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난 큰 기대를 갖게 되었단다. 너라면 어떤 영웅이라도 죽일 수 있는 비수가 될 거라고.”
“…….”
“부담 갖지 마. 네 그 증오와 원한은 충분한 가치가 있으니까.”
그는 레인의 어깨를 토닥인 후, 다시 폐허 안으로 돌아갔다. 자기가 할 말만 끝내고 돌아선 그의 모습을 보며, 레인이 공성추를 꼭 쥐었다.
머릿속에 자신을 비웃던 진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영웅, 빛나는 운명, 축복받은 인간, 재능 있는 인생.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그녀에게 패배하고, 죽을 위기에 처하면서 생긴 증오에 레인은 고통스러운 수련을 감행했다.
공성추를 사용하기 위해 마력을 키우고, 공성추의 불길한 기운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정신을 단련했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레인은 묘한 기시감에 시달렸다.
“그 녀석이, 정말 영웅이 맞아?”
레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