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63화
영웅은 신의 화신이라고 했다. 신의 의지를 받들어 세상을 지키는 영웅은 화신임과 동시에 신의 신자로 봐야 한다.
“자신의 화신이나 신자가 그 세계에 존재한다면, 실낱같은 운명이라도 조종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돼. 거대한 도화지 위에 메모지를 한 장 붙인 상태라고 볼 수 있지. 도화지의 그림에 감화되진 않지만, 언제든 떨어질 수 있는 위태로운 존재야.”
“그럼 나이아의 신자가 누군데?”
“원래는 클로이로 하려고 했어.”
괴짜가 클로이를 포섭한 이유 중 하나였다. 클로이는 과거에도 신을 모시던 신자였다.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클로이는, 나이아를 모시는 걸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클로이는 그래 보여도 순수하거든. 집착이 심하긴 해도, 신에게 거짓말해 본 적이 없는 출중한 신자야. 바제트를 위해서 신을 모셔야 한다면 살신성인으로 모셨겠지.”
“하지만 클로이는 죽었어.”
“맞아,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던 바제트의 손에 죽었지. 그녀 나름대로 행복한 결말이려나.”
클로이의 최후는 서혁이 납치된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괴짜는 클로이가 진희에게 패배했다 말했다.
클로이에 대해선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괴짜가 서글픈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조금의 진심도 담겨 있지 않은 괴짜의 말투에 서혁은 혀를 차며 물었다.
“그래서 클로이 다음으로 점찍은 녀석이 누군데?”
“그녀의 동생.”
“에반?”
“그래.”
에반. 클로이와 함께 브리온의 간판 중 하나인 쌍둥이. 클로이의 남동생이자, 그녀처럼 B급 헌터였다.
‘등급은 속였겠지.’
서혁은 브리온이 공개한 등급이 진짜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진희와 클로이가 마주하기 이전에도, 서혁은 클로이가 A급 이상의 실력자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의 비공개 업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진희가 그랬듯이, 클로이는 B급의 헌터로선 공략할 수 없는 상급의 던전을 여럿 드나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엔 항상 남동생 에반이 따라왔다.
‘낮아도 A급이려나.’
“재능은 클로이와 비슷하거든. 신자가 될 가능성은 충분했지. 그래서 나이아의 화신으로 만들었어.”
“화신이 어떻게 되는데?”
“신의 가호를 받는 셈이지. 나이아가 이 세상에선 대단한 신이 아니라서, 기적을 행사할 수 있는 수준은 안 되지만. 그래도 나름 강해졌을 걸?”
“그 나이아와 에반을 데리고, 넌 누굴 노리고 있어?”
“질문이 많네. 하지만 하나같이 중요한 질문이라 대답하는 게 재밌어.”
나이아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이론이나, 다른 세상에 대한 이야기, 게이트의 원인 따윈 궁금하지도 않은 듯, 서혁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듣기 위해 질문했다.
뻔뻔하지만 단숨에 진실에 도달하는 서혁의 사고에 괴짜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웃었다.
“내가 원하는 건 삼파전이야.”
“하나는 파란 기사단이고, 다른 하나는 나이아라면…….”
“마지막은 너희가 말하는 테러범, ‘카르나’지.”
괴짜는 손가락을 세 개 펴들었다.
“진희는 이 세상의 영웅이야. 성벽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지. 반대로 테러범, 카르나는 성벽을 파괴하기 위해 존재하는 무리야. 애당초 그쪽 단장의 운명이 세상을 파괴하지 않고선 살 수 없는 운명이거든. 지키는 영웅과 파괴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악당의 대결이지.”
그리고, 하며 괴짜가 말을 이었다.
“나이아는 카르나를 파괴하고 싶은 신이야. 배신당해서 반쪽을 잃어버리고, 세상이 멸망되어 타락해 버린 신이니까.”
“카르나가 나이아의 원수인가 보군.”
“맞아. 카르나를 찾기 위해 저주가 담긴 아티팩트를 온 세상에 뿌릴 정도로 미워하지.”
클로이가 사용한 기억의 회랑도 그런 물건이었다. 전생의 기억을 일깨우는 아티팩트는 카르나가 기억을 지우고 새 인생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만든 수많은 함정 중 하나였다.
“나도 몇 개 가지고 있어. 워낙 효과가 좋아서 아티팩트로 쓸 만하거든. 바제트의 시체를 가둔 수정구도 그중 하나야.”
“대체 얼마나 미웠길래?”
“그건…….”
괴짜가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학생처럼 흥분한 모습으로 말을 하려던 찰나, 방문이 덜컥 열렸다.
어느새 잠에 깼는지, 나이아가 나른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걸어왔다.
“여전히 입이 가볍구나, 로칸. 떨어질 때 예의도 같이 버렸느냐?”
“지금은 니케야, 나이아.”
흥, 하고 코웃음을 친 나이아가 다가와 소파에 앉았다. 괴짜와 서혁 사이에 위치한 상석이었다.
“듣자 하니, 호기심이 많은 인간이로구나. 주제넘은 걸 알아갈수록 수명은 짧아져 갈 텐데.”
“아쉽지만 그런 말에 겁먹을 나이도 아니라서 말이야. 젊어 보이긴 해도 먹을 만큼 먹었어.”
“신 앞에서 나이를 논하다니, 농조로군.”
“태양의 나이도 구하는 게 사람인데 신이라고 새삼스러울 것 없지.”
“그깟 인간의 표현으로 신의 세월을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인간이 미워서 타락했다는 신이 할 말은 아니지?”
한마디도 지지 않는 서혁을 보며 괴짜가 허허 웃으며 중얼거렸다.
“딸이 누굴 보고 배웠는지 알겠네.”
괴짜의 감상을 무시한 서혁이 말했다.
“만약 당신이 카르나의 정보를 원한다면 내가 줄 수도 있어. 혹은 파란 기사단이 도와줄지도 모르지. 카르나는 우리의 적이니까. 하지만 그전에, 난 당신에 대해 궁금해.”
“호오.”
“난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아. 호의엔 이유가 있고 적의엔 과거가 있는 법이니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을 뿐이야.”
모조리 거짓말이다. 괴짜는 서혁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그간 농담을 주고받으며 기묘한 동거를 계속해 온 괴짜는 서혁의 철저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는 단 한 번의 빈틈도 보여주지 않았다. 거래를 한다면서 금강의 제단에 대해 알려주면서도, 그는 괴짜를 거래 상대로 보지 않았다.
저 느긋하고 얄궂은 태도는 결국 연기에 불과하다.
나이아에게도 언뜻 합리적인 제안을 건네고 있었지만, 괴짜는 그것이 나이아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한 수단이지, 함께하자는 권유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물론 나이아에게 알려주진 않을 거지만.’
괴짜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둘의 대치를 관찰했다.
나이아가 이 세상에 강림한 순간, 괴짜의 계획은 반쯤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이상 괴짜가 거들지 않더라도, 나이아는 카르나와 대립하며 주위를 혼란케 할 것이다.
둘의 싸움에 세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영웅인 진희 또한 그 싸움에 휘말리겠지.
그렇게 벌어지는 삼파전이 괴짜가 바라는 양상이었다.
“재밌는 인간을 데리고 다니는군.”
기나긴 침묵이 끝나고, 나이아가 괴짜에게 말했다. 나이아의 목소리엔 약간의 즐거움이 담겨 있었다. 그녀답지 않은 웃음 섞인 목소리에 괴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이아는 턱을 괴고 미소를 지었다. 명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아름다운 미소에 서혁이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신화 속에서 신에게 홀려버린 인간들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서혁은 마음을 다잡았다.
“좋다, 이야기해 주지. 네가 신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을지는 관심 없다만, 이 흔한 이야기로 카르나에 대해서 들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나이아는 담담히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한 세상의 주신이었던 나이아와, 인간이었던 카르나에 대해서.
* * *
아직 나이아라는 이름이 붙지 않았을 무렵, 신은 자신의 세상에 의심을 가졌다.
완벽한 운명으로 돌아가는 완전한 세상. 그러나 인간이란 존재는 가끔 운명을 초월해 기적을 일으키곤 했다.
기적이란 신이 내리는 것이어야만 한다. 성벽에 피해가 가지 않을 만큼, 세상의 운명에 큰 흔들림이 없을 만큼 쥐여 주는 ‘적당한’ 것이 신의 기적이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때때로 신의 예상을 벗어나는 기적을 이룩하곤 했다.
신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시엔 불순한 부품을 교체하고자 하는 기계적인 욕구였을 뿐이었다.
신이 선택한 방법은 시찰이었다.
‘솜니움.’
신은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세상에 내려 보냈다. 인간을 화신으로 선택하는 방법이 가장 일반적이었지만, 인간을 불신하던 신은 자신의 반을 잘라내 분신을 만들어냈다.
분신의 이름은 솜니움.
색이 빠진 적발과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분신은 세상에 내려와, 인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솜니움의 역할은 관찰과 보고였다. 기적을 만들어내는 인간을 보고, 살피며, 어째서 운명을 뒤바꾸는지 원인을 알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신, 나이아는 알지 못했다. 솜니움에게서 인간에 대해 보고받으며 솜니움이 느낀 감정에 동조될수록, 그녀 또한 신이 아닌 인간에 가까워지게 된다는 사실을.
인간의 고통과 행복, 희망과 절망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 솜니움과 나이아는 그렇게 변하기 시작했다.
창조주가 한낱 창조물에게 감화된 것이다.
솜니움이 인간이란 종족을 사랑하기 시작하고, 나이아가 운명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던 때.
솜니움은 그야말로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었다.
기적을 일으켜 한 국가를 전복시키고, 이윽고 수많은 사람의 희생 위에 왕으로 군림하게 된 그 사내.
카르나를 만난 것이다.
* * *
“카르나 단장님과 솜니움은 서로 사랑에 빠졌어.”
“로맨틱하네.”
비아냥 어린 진희의 말에 마야가 쌍심지를 켜고 노려봤지만, 곁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카온의 눈살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마야는 보육원에 사로잡혀, 테러조직, 카르나에 대해서 심문받았다.
처음엔 미카일을 배신할 수 없다며 버티던 마야였지만, 그렇다면 별수 없다고 무덤 자리는 어디가 편하겠냐는 진희의 말에, 본인 딴에는 중요치 않은 정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협박하던 당시의 진희는 진심이었다.
“결국 신이 인간을 사랑해서, 세상이 멸망했다는 이야기야?”
라이샤의 경우와 비슷했다.
라이샤는 죽어야 할 운명을 타고난 아이였다.
주변인들에게 미움받고, 박해받으며 죽었어야 하는 라이샤를 사랑하던 그녀의 신 카사가 몸소 구원했고, 이윽고 시작된 균열에 세상을 멸망시키고 말았다.
아직도 라이샤의 운명의 잔재는 남아 있었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 카사는 진희에게 그녀를 맡겼다.
“아니, 원인은 솜니움이 아니라 나이아였어.”
자신의 분신인 솜니움이 한낱 인간과 사랑에 빠져 본분을 망각하는 걸 보고 있던 신은 분노했다.
솜니움을 회수하려 했지만, 이미 운명의 굴레에 벗어난 카르나는 나이아의 손을 떠난 후였다.
창조주임에도 창조물을 제재할 수단이 마땅치 않았던 나이아는 이윽고 최후의 수단에 손을 댄다.
“신자를 만드는 거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