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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162화 (162/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62화

“한국에서 나타난 최초의 게이트는 공식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사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게이트지.”

서혁은 괴짜를 데리고 한 숲속으로 안내했다.

“출몰한 건 21년 전. 최초 발견자는…….”

“이영한 회장. 맞지?”

괴짜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서혁의 말을 끊었다.

“그래, 맞아. 당시 화약이나 선박 산업으로 성장하고 있던 금강이 이 던전을 최초로 발견했지.”

최초의 던전 공략자는 신현성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이영한 회장은 그 전부터 던전에 드나들던 최초의 헌터였다.

그는 이 던전을 공략하지 않고, 일부러 방치했다. 이 던전에 특별한 것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한때 그 보물이 뭔지 궁금해서 조사해 본 적이 있었지.”

20년 전이면 서혁 또한 활동하던 시기였다. 당시엔 헌터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정치인, 유명인의 스캔들을 조사하는 한낱 심부름센터였지만, 그의 천재성은 그때도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기이한 행동을 일삼는 금강의 회장 뒷조사를 하다가, 이 던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일반인이었던 그는 이 안에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던전을 발견한 후, 이영한 회장이 바뀌었단 사실은 명백했다.

비록 어디에 팔 수 있는 정보도 아니었고, 확실한 증거도 없었기에 서혁만이 아는 비밀이 되었지만, 지금 와선 이 던전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이 마력이 발견된 최초의 던전인 거지?”

“정확해.”

던전 주변을 지키고 있던 금강의 헌터들을 모두 잠재운 괴짜가 들고 있는 아티팩트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수면 안개를 내뿜는 아티팩트가 가방으로 돌아가자, 괴짜와 서혁은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었다.

“마야의 이야기를 듣고 짐작했지. 마력이란 게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개념일 리 없어. 분명 어딘가에서 균열이 시작되어, 다른 세상으로부터 마력이 흘러들어온 거라고 생각했거든.”

“당신 정말 추리 잘하네. 전부 정답이야.”

마력의 농도는 지구보다 게이트 안의 던전이 훨씬 짙다.

마력은 세상의 법칙을 일그러뜨리는 힘이다.

마력을 접한 자는 죽거나, 각성하여 헌터가 된다.

이 작은 단서들을 모아, 서혁은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헌터란 존재를 탄생시킨 장본인이 이 던전 안에 있나 봐?”

이 던전은 곧 멸망의 시발점이었다.

괴짜는 게이트 앞에 섰다. 그리고 황홀한 표정으로 게이트를 관찰했다.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게이트였다.

“하나의 균열이 생기면 아무리 단단한 성벽이라도 틈이 벌어지게 마련이야. 첫 시도가 워낙 어려워서 그렇지. 그 첫 균열을 만들어낸 게 바로 이 게이트고.”

“누가 열었는데?”

“신.”

괴짜가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마치 게이트 안의 존재를 환영하는 듯한 손짓이었다.

“다른 세상의 신. 자신의 절반에게 버림받고, 인간을 저주한 나머지 신의 자리에서 떨어지고만 반신. 그는 자신의 절반과, 그 절반을 사랑한 인간을 저주했어.”

그것은 다른 세상의 신화였다. 한 세상을 멸망으로 이끈 신화.

“지금 이 세상에 그 저주받은 인간이 부활할 거야. 슬슬 시나리오의 절정 부분이거든. 주인공은 마지막에 나타나게 마련이지. 그렇다면 연출자로서, 상대 역할을 준비해 주지 않으면 안 되잖아?”

괴짜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곳엔 신이 살고 있어. 저주받은 인간의 환생을 추적해, 이 단단한 성벽을 꿰뚫고 문을 열고만 신이 지쳐 잠들고 있어. 난 그 신을 깨울 생각이야. 그래야 신과, 저주받은 인간과, 영웅의 시나리오가 시작될 테니까.”

클로이가 영웅전이란 시나리오에 열중한 광신도였다면, 괴짜는 신화라는 허황된 이야기를 믿는 아이였다.

“그 신을 불러내서 뭘 하려고?”

소름이 돋는 팔을 팔짱을 껴 억지로 숨긴 서혁이 물었다. 괴짜는 그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만나게 해줘야지. 지금 만나러 갑니다, 예능도 재밌을 것 같아.”

그리고 게이트를 향해 손을 집어넣었다.

“아마 이영한 회장은 이 게이트에서 마력을 느꼈을 거야. 그리고 이 마력이란 게 돈이 될 것 같으니, 바깥으로 가져나가고 싶었겠지. 그래서 그는 이 던전의 마석을 바깥으로 빼돌렸어.”

“마석은 공기에 녹아 곧 사라졌지만, 한 번 발생한 마력은 결코 사라지는 일 없이 세상을 떠돌았지. 그렇게 완전무결했던 성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게이트가 출현했어.”

“열린 게이트를 통해 많은 이가 찾아왔지. 다른 세상에서 피신 온 이주민부터, 저주받은 인간을 찾아 나선 단체, 새롭게 환생할 몸을 찾는 영혼들.”

결국 이 모든 이야기는 이 작은 게이트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괴짜는 마치 가방을 뒤지듯이 게이트의 안쪽을 빠르게 훑었다.

“어떻게 이 던전에서 이영한이 살아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됐어. 난 이 던전의 주인에게 볼일이 있던 거니까.”

그리고 뭔가를 잡아챘다. 괴짜는 손에 한 오브를 쥐고, 천천히 게이트 바깥으로 꺼냈다.

“열려라.”

오브가 괴짜의 손에 녹아내렸다. 동시에 게이트 또한 허공에 스며들 듯 사라졌다.

“대단한 신이야. 이런 꼴이 돼도 그 집착만은 여전해. 한 인간을 저주하기 위해 신의 자리마저 버린 타락한 신이라…… 매력적이야.”

오브가 사라지자, 괴짜의 팔에 한 사람의 형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괴짜는 자연스럽게 그 형체를 안아 들었다. 괴짜와 비슷한 키를 가진, 서혁이 감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신성함을 가진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오르는 것 같은 적발을 늘어뜨린, 표현할 방법이 없는 아름다운 인간이었다. 미의 화신이라도 강림한 것처럼, 감히 고개를 들고 바라볼 수 없는 미의 결정체였다.

“신, 나이아.”

괴짜는 사랑스러운 손길로 신의 적발을 매만졌다.

“네가 증오하는 카르나가 돌아왔단다.”

카르나란 말에, 신이 천천히 눈을 떴다.

적발과 똑같은 색의 붉은 눈동자가 괴짜를 바라보았다.

카르나의 단장이 부활한 날. 세상을 멸망시킬 신 또한 눈을 떴다.

37. 눈을 뜨니

“어라?”

마야는 눈을 떴다. 분명 부단장 미카일이 머물고 있는 던전으로 좌표를 선정했던 것 같은데, 막상 그녀를 반긴 건 처음 보는 천장이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깔끔한 방 안인 듯했다.

“누, 누구 없어요?”

마야는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방 바깥은 긴 복도가 있었는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은 새하얀 복도였기에, 마야는 쉽사리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누구세요?”

“히익!”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등 뒤에서 말을 걸었다. 화들짝 놀란 마야가 뒤를 돌자, 한 소녀가 그녀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동그란 눈매가 인상적인 귀여운 소녀였는데, 그 인상 덕분에 긴장이 조금 풀린 마야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 안녕?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

“언니는 누구세요?”

“나?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마야가 순간 말을 잊었다. 남의 집에 갑자기 침입한 주제에, 뭐라고 자신을 소개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한참 말을 고르던 중, 그녀의 뱃속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울렸다.

“윽.”

“배고프세요?”

“조, 조금…….”

괴짜의 저택에서 도망친 터라 마력도 동이 났고, 배도 고파왔다. 마야의 피곤한 안색을 바라보던 소녀가 몸을 돌렸다.

“그럼 와서 식사 좀 하실래요? 방금 점심을 먹어서, 주방에 밥 남아 있을 거예요.”

“저, 정말? 그래도 될까?”

“네, 언니는 손님이니까요.”

소녀와 대화를 할수록 마야는 묘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소녀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안심이 된 마야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소녀를 따라갔다.

“전 민하라고 해요.”

“아, 나는 마야. 사정이 있어서…….”

“괜찮아요.”

소녀, 민하는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며 마야를 안내했다. 마야가 구구절절 실수로 이 집에 들어오게 되었음을 설명하려 했다.

민하는 방긋 웃으며 그녀의 말을 끊고, 한 방문을 가리켰다.

“여기에요, 들어가시면 안에서 언니가 있을 거예요.”

“언니?”

“네.”

언니라니, 가족을 말하는 걸까? 마야는 민하의 말에 별 의심 없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을 연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라. 이게 웬 떡이야.”

이게 누구야, 같은 대사가 아니다.

마치 호박이 넝쿨째 굴러떨어진 걸 본 것처럼, 밝은 목소리로 방 안의 주인이 말했다.

“테러범이 직접 나타나 주시다니, 고마운걸?”

“서, 서, 서…….”

보육원의 후원자이자, 이 방의 주인인 진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내 이름 서진희야.”

“서, 서, 서- 서혁-!”

“……그건 우리 아빠 이름이고.”

마야는 서혁에게 배신당했다는 분노에 소리를 질렀고, 뜬금없이 남의 아빠 이름을 부르짖는 괴짜를 보며 진희는 인상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우리 아빠가 뭔 짓 했어?”

“어, 어떻게 날 배신할 수 있어-!”

“했나 보네.”

쯧쯧, 혀를 찬 진희가 손짓했다. 곁에 있던 카온이 다가와, 마야를 붙잡았다.

이제 엉엉 울기 시작한 그녀를 보며 진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호랑이 굴에 걸어 들어오다니, 너 바보란 소리 많이 듣지?”

“흐어어엉!”

테러범, 카르나의 마야는 그렇게 허망하게 진희에게 붙잡혔다.

* * *

“신은 감정을 가지면 안 돼.”

괴짜는 담담히 진리를 고했다. 잠든 신, 나이아를 침대에 올려두고 돌아온 괴짜는 서혁에게 말했다.

“자연현상이 감정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표현이지?”

“하지만 저 신은 감정이 있는 듯 보였는데?”

첫 만남 때, 나이아는 서혁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 후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피곤한 듯 다시 잠들고 말았다.

제법 인간다운 표정의 나이아를 떠올린 서혁의 대답에 괴짜가 작게 웃었다.

“히히, 그러니까 반신이지. 나이아는 온전한 신이 아니야. 타락했으니까.”

“신이 다른 세상에 함부로 찾아와도 괜찮은 건가?”

“불가능하지. 작은 세상의 법칙은 큰 세상의 법칙에 휘말리게 마련이거든, 준비 없이 나이아가 이곳으로 넘어왔다면, 나이아는 이 세상의 현실에 잡아먹혔을 거야. 평범한 인간이 되거나, 한 줌 재로 변했겠지.”

차원을 건너온 신이란 말은 다소 믿기 힘든 소재였으나, 서혁은 나름의 해석으로 괴짜의 말에 대답했다.

“신체를 안정화하는 방법이 있나 보네.”

“맞아. 그게 바로 신자야. 혹은 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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