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61화
36. 탈출과 부활
“그, 그럼 게이트 연다? 진짜 괜찮지?”
“응, 걱정 말고 열어.”
마야는 불안한 목소리로 연신 되물었다.
좌표는 서혁의 도움으로 완벽히 계산되었다. 마야가 가끔 식을 까먹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긴 했지만, 괴짜의 눈을 피해 화장실에서 계산한 것치곤 빠른 속도였다.
“근데 괴짜 오면…….”
“걱정 말고 하라니까.”
마야의 말을 자르며 서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
“…….”
한참을 고민하던 마야는, 이윽고 게이트를 열기 위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거울 너머에서 마야가 게이트를 열려는 기미가 들리자, 서혁은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어디 보자.’
괴짜는 이 저택 안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체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질이 크게 다치거나, 탈출하려고 시도하는 순간 저택으로 달려오는 게 그 증거다.
마야가 게이트를 열려 하는 것도 지금쯤이면 눈치챘겠지.
“으라차차.”
그렇기에 서혁은 괴짜에게 선택지를 남겨두었다.
마야의 탈출을 막을 것인지, 혹은 자신의 죽음을 막을 것인지.
“윽!”
서혁의 방 중앙엔 긴 밧줄이 매달려 있었다. 테이블보를 찢어 만든 밧줄은 그 끝이 동그랗게 묶여 있었다.
목을 매달기 위한 장치였다.
서혁은 의자 위에 올라가, 밧줄에 목을 맸다. 목뼈가 다치지 않도록 잘 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숨이 막혀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온다.’
쾅쾅, 괴짜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빠르게 뜀박질하는 소리를 듣는 즉시, 서혁은 의자를 걷어찼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마야의 방으로 달려가던 괴짜는 서혁이 목숨을 끊으려 하자, 발걸음을 돌렸다.
달리다시피 서혁의 방으로 들이닥친 괴짜는 서혁을 보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해가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느긋하게 책을 읽던 서혁이 천장에 목을 매달아 죽어가고 있다니.
“크…….”
괴짜가 당황해 말을 잃은 걸 본 서혁이 천천히 손을 내렸다. 테이블보가 목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목뼈에 무리가 가기 시작했고, 숨이 막혀 시야가 노래졌다. 죽는다, 그 위기감 이전에 든 생각은, 괴짜의 당황한 표정을 봐서 즐겁다는 감정이었다.
괴짜는 이를 악물고 서혁에게 달려들었다.
“으악!”
그때, 천장에 묶여 있던 밧줄이 끊어졌다. 그대로 바닥에 떨어진 서혁이 비명을 지르며 목을 움켜쥐었다. 막혀 있던 폐에 산소가 들어가고, 살갗이 벗겨진 목에선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콜록, 하고 마른기침을 쏟아냈다.
마법으로 밧줄을 끊어낸 괴짜가 다가와, 서혁의 몸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큰 상처는 없었다. 괴짜는 그의 가슴팍에 손을 올려 숨을 잘 쉬고 있는지 확인한 후, 넌더리가 난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친 새끼.”
“후, 하. 이제 알았냐?”
그와 동시에 저택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서혁은 이것이 마야가 탈출한 신호임을 눈치챘다.
“못 잡아서 아쉽겠네?”
“…….”
이렇게까지 하리라곤 예상 못 했다. 괴짜가 분한 듯이 인상을 찌푸리자, 서혁은 고통 속에서도 웃음을 터뜨렸다.
“넌, 나한테 올 줄 알았어. 내게서, 알아내야 할 게 있으니까. 콜록, 그렇지?”
괴짜는 마치 아이들 장난처럼 서혁을 납치했지만, 그게 계산된 행동임을 서혁은 알고 있었다.
광대처럼 행동하는 괴짜였지만, 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는 치밀한 계획의 일부분이었다.
마야를 빼앗음으로써 테러범, 미카일을 궁지에 몰고, 금강이 가진 비밀을 캐내기 위해 서혁을 납치했다.
‘자, 이제 마지막 거래다.’
서혁은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내 요구를 들어줘. 그럼 네가 찾고 있는, 금강의 제단에 대해 알려주지.”
괴짜가 알고 싶어 하는 정보가 무엇인지, 긴 세월 동안 정보상을 해왔던 서혁은 알 수 있었다.
“최초의 게이트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은 거잖아?”
“……당신 더럽게 똑똑하네.”
“이제 알았어? 난 원래 천재거든.”
마치 진희의 말투를 연상케 했다. 서혁의 익살맞은 말에 괴짜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간의 광기 어린 가면이 아닌, 진정으로 감정이 담긴 허탈한 웃음이었다.
* * *
“흠, 이거 좀 어렵긴 하네.”
“불가능합니까?”
“아니, 거의 끝났어.”
미카일을 비롯한 카르나의 일원들은 한 던전을 찾아왔다. 허허벌판인 이 던전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아 의식을 치르기에 딱 좋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현상을 기록하는 삼라만상, 이야기꾼은 즐거운 표정으로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미카일이 준비한 제물들을 마법진 중앙에 놓고, 이해할 수 없는 글자로 마법진을 꾸미기 시작했다.
“읽을 수 없군요. 어디 글자입니까?”
“몰라, 삼라만상에 적힌 글자는 나만 읽을 수 있거든. 설명해 주자면, 이건 역술풀이야.”
“역술?”
“그래, 별의 운행을 재는 기술이고, 운명을 점치는 기술이며, 번역하는 기술이지. 복합적인 문장이야. 현상이란 그런 법이거든. 미래의 운명이 먼저 적히면, 현재의 현상이 덧씌워져 내용이 바뀌지. 이윽고 과거로 퇴색되며 족보가 되는 현상.”
“……어렵군요.”
“나도 되는대로 지껄인 거니까 신경 쓰지 마.”
키득거리며 웃은 이야기꾼이 마법진 중앙에 놓인 제물들을 보고 말했다.
“그건 그렇고, 잘도 저런 제물을 모아왔네. 성벽의 파편이란 게 물건으로 만들 수도 있는 거구나.”
“우리의 사명이었으니까요.”
“고작 단장 한 명 살리겠다고 저 많은 세상을 멸망시킨 거야? 너희도 대단하다.”
제물이란 다른 세상의 성벽 잔해들이었다. 성벽이란 곧 신의 신체와도 같으니, 저건 일종의 사체라고 볼 수 있었다.
본래라면 세상이 멸망하며 사라져갈 잔해였지만, 그것을 형태화시켜 가져온 것이다.
“꼭 단장님의 부활만을 위한 건 아닙니다. 운명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으니까요.”
“대의는 언제 들어도 참 멋들어지네.”
“입조심해.”
미카일의 말에 비웃음을 날리는 이야기꾼을 보며 곁에 있던 레인이 경고했다. 이야기꾼의 말투에 넌더리가 난 레인은 들고 있던 지팡이를 이야기꾼에게 겨눴다.
“네네, 조심하겠습니다-”
지팡이의 흉악한 기운이 자신을 향하자, 이야기꾼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손동작으로 사과를 표했다.
“근데 제물은 있는데, 단장의 환생체는 어디 있어? 그게 없으면 역술이고 뭐고 못해.”
“잠시 기다려 주세요.”
미카일이 마노가 들고 있는 가방에서 한 수정구를 꺼냈다. 물건을 봉인하는 오브였다. 미카일은 그것을 이야기꾼에게 건넸다.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르는 이야기꾼은 그걸 건네받고, 헉하고 숨을 삼켰다.
“이런 미친, 생매장한 거야?”
“죽진 않았습니다. 가사 상태이지요.”
“……너희도 어지간하구나.”
오브에 사람을 집어넣었다는 건, 그 인간의 생체시간을 정지시켰다는 말이었다. 고난도의 마법임과 동시에 인권을 철저히 무시하는 행위였다.
오브란 시간이 정지된 공간이다. 갇히는 순간 인간의 영혼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이지를 상실한 인형이 될 뿐이었다.
레인이 다루는 인간 인형이 그렇게 탄생했다.
“이 안에 담긴 사람, 원래는 평범한 사람이었겠네?”
“네, 스무 살의 청년이었습니다. 대학에 다니고 있더군요.”
“근데 지금은 오브에 갇힌 채 정신이 나가버린 고깃덩어리고?”
“어쩔 수 없는 희생입니다.”
“어우.”
조금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는 미카일의 말에 이야기꾼이 짐짓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는 마법진 한가운데에 오브를 올려두었다. 제물들 사이에 위치한 오브는, 이야기꾼의 손짓을 따라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이제부터 현상을 역전시킬 거야. 신의 저주를 받은 인간의 영혼을 저주를 받기 전의 상태로 되돌린다.”
“기억은 문제없습니까?”
“괜찮아. 어디까지나 저주를 벗겨내는 것뿐이니까. 대가는 네가 치를 테니 조심해. 나도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몰라.”
삼라만상으로 과거를 조작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 삼라만상의 총서를 받았다는 괴짜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는 큰 대가를 치렀다고 했다.
신의 저주를 벗겨낸다는 건 그보다 더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미카일은 각오를 다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시작한다.”
이야기꾼이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해석할 수 없는 마법진의 언어가 허공으로 떠올라, 제물과 오브를 감싸기 시작했다.
마력도, 영혼도 아닌 정체불명의 기운이 던전을 가득 채웠다.
“저주 한 번 지독하네. 아니, 이건 저주가 아니라…….”
저주를 해석해 풀어내던 중, 이야기꾼은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했다. 그는 신의 저주가 마냥 악랄하고 부정적인 것이라 생각했지만, 정작 마법진에서 떠오른 것은 성질이 조금 달라 보였다.
“꼭…… 커헉!”
자신이 생각한 바를 입으로 담으려는 순간, 이야기꾼은 크게 기침을 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검은색 지팡이의 끝이 자신의 배를 꿰뚫었다.
“너…….”
지팡이를 찌른 사람은 다름 아닌 레인이었다. 레인은 여전히 경멸 어린 눈빛으로 이야기꾼을 바라보다, 지팡이를 뽑았다.
이야기꾼은 허망한 손길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하지만 지팡이가 지나간 자리는 이미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어째서…….”
“더 이상 쓸모가 없으니까요. 고생하셨습니다. 이야기꾼.”
미카일이 다가왔다. 그는 마법진이 제대로 발동되었다는 걸 확인하고, 레인에게 손짓했다. 레인은 이야기꾼의 어깨를 잡아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
삼라만상을 다루는 인간치고는 허망한 최후였다. 바닥에 흐른 피를 신발로 닦아낸 미카일이 마노를 불렀다.
“준비하세요.”
“네.”
빛을 내뿜던 마법진이 점점 안정되기 시작했다. 제물들이 사라졌고, 오브는 해방되었다.
잠깐의 섬광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단장님.”
그리고 한 사내가 눈을 떴다.
바제트의 동생인 제니트와 똑 닮은 얼굴, 그러나 좀 더 젊은 검은 머리의 사내가 가만히 미카일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네, 미카일.”
낮지만 사방을 울리는 목소리를 듣자, 미카일은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미카일을 비롯한 마노와 레인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환영합니다, 단장님.”
카르나의 단장이 드디어 부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