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57화
그녀는 자신이 파란 기사단에 들어갈 생각을 버렸다고 말한 순간부터, 자신에게서 관심을 끊어버렸다.
“하여간 그래서, 그 눈치 좋다는 능력으로 세영 씨한테 갔다 이거지? 그리고 세영 씨가 네게 이 신림을 정리하라고 시켰고?”
“맞습니다. 신림으로 배정된 건, 당신을 포함한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만…….”
박영이 흘긋 진희를 본 뒤 한숨을 내쉬었다.
“말할 필요는 없겠군요. 궁금하지 않은 것 같으니.”
“응, 그래서 청소란 게 정확히 뭐하는 건데?”
진희의 계속되는 물음에 박영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컨테이너의 불법 거래 정황을 증거로 남기는 중입니다. 마침 브리온의 비인증 헌터들이 물러가고, 그 여파로 광부 조직이 망하던 참이었죠. 이세영 씨에게 지원을 받아 광부를 흡수하고, 정보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 정보는 언제 공개돼?”
“파란 기사단이 브리온을 공격하는 즉시.”
진희가 나른한 웃음을 지었다. PD와 서한은 틀리지 않았다. 세영은 착실히 진희를 도와, 브리온과 금강을 무너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박영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으나, 진희는 굳이 의심하지 않았다.
‘수작을 부리는 거라면, 나중에 없애도 괜찮아.’
신림의 조직들은 진희에겐 거슬리는 벌레 수준의 무리였다. 언제든지 처리할 수 있는 문제에 굳이 마음을 쓰고 싶진 않았다.
그런 진희의 마음을 읽었는지, 박영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 말했다.
“그래서 절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요? 광부를 흡수한 사람의 정체가 뭔지 알기 위해서입니까?”
“그것도 있고, 우리 단원이 신림을 정리하고 싶어 해서, 좀 도와주려고.”
“아하.”
단순한 대답이었지만 상황을 얼추 파악한 듯, 박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광부는 불법적인 업무는 더는 하지 않습니다. 조폭들도 대부분 수준 이하의 헌터들이니까 어려운 적은 없을 겁니다.”
“컨테이너는 어때?”
“그쪽은…….”
박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컨테이너 쪽의 인사들을 떠올리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마찬가지입니다. 브리온이 망가지면서 대다수의 상위 헌터도 신림에서 발을 뺐으니까요. 그래봤자 B급이 최고일 겁니다. 아, 대신 못 볼 꼴은 많이 보겠군요.”
“못 볼 꼴?”
“신림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럽습니다. 인신매매부터 마약, 살인 같은 강력범죄가 흔한 곳입니다. 충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걔들이 감당할 일이야.”
복수를 통해 살인을 경험한 아이들이었다. 일부러 벼랑에 모는 모진 스승이 될 생각은 없었지만, 비루한 현실을 감추는 부모 역할을 할 생각도 없었다.
대충 볼일은 끝났다. 광부의 새 두목 정체도 알았겠다, 주변 세력의 실력도 파악이 끝났으니 돌아갈 일만 남았다.
진희가 일어나려는 찰나, 박영이 그녀를 멈춰 세웠다.
“혹시 당신은 이 세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웬 뜬금없는 이야기야?”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너무 추상적인 질문에 대답하기도 애매했다.
“당신은 한 번도 미래에 대해 고민한 적 없을 것 같아 하는 말입니다.”
“응, 없어.”
“……당신의 선택으로 인해 세상의 운명이 바뀔지도 모릅니다.”
정령왕인 김방인이 했던 질문과 비슷했다. 그는 진희의 영혼을 보고 성벽을 무너뜨린 전적이 있음을 눈치챘다.
그래서 이 세상을 구원할 영웅이 될 그릇인지, 아니면 성벽을 무너뜨릴 악당, 악마가 될 것인지 질문했다.
그때 진희는 알아서 잘할 테니 참견 말라는 대답을 했었다.
“전 지금껏 수많은 세상의 성벽을 관찰했지만, 이 세상만큼 견고한 성벽은 본 적이 없습니다. 만약 신이 있다면, 이 세상의 신이야말로 주신(主神)이라 칭할 수 있겠죠.”
“요점이 뭐야?”
“이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완벽한 곳입니다. 당신 같은 영웅이 나타난 이상, 당신에 버금가는 악당 또한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을 겁니다. 이 완벽한 세상을 무너뜨릴 정도로 대단한 악당이.”
박영의 말은 일종의 경고였다.
“미래를 대비하길 바랍니다. 당신의 숙적이 나타났을 때, 당신은 승리해야만 하는 사명을 타고났으니까요.”
박영은 덤덤히 세상의 멸망 가능성을 고했다. 진희의 패배가 곧 이 견고한 세상을 무너뜨리는 시발점이 될지도 모른다며.
진희는 그 말에 잠깐 생각에 잠긴 듯했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밌네. 누가 내 운명은 승리라고 하던데, 그럼 내 운명이 무너졌을 때가 세상이 멸망할 때란 거지?”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출입구를 향했다.
“점쟁이치곤 재밌는 결론이었어. 잘 새겨들을게.”
그 말을 끝으로 진희는 보석상을 나섰다.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박영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거짓말이군.”
* * *
“그럼 영웅과 악당이란 것도, 결국 서로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거네?”
“맞아. 가뭄이 오면 언젠가 비가 내리고, 밀물이 오면 썰물이 나가는 것과 같다고 했어.”
서혁은 거울에 적히는 식들을 암산으로 차근차근 풀어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마야와 대화를 시작한 지 사흘이 지났다. 그녀는 점점 경계를 풀기 시작하더니, 서혁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대부분이 이미 진희를 통해 알고 있던 이야기였지만, 흥미로운 개념도 여럿 있었다.
“영웅이 지면 성벽은 무너지는 건가?”
“아예 무너지진 않지만, 큰 타격이 있을걸? 그도 그럴 게 영웅은 신이 안배한 ‘해결책’이잖아. 신의 힘도 통하지 않는다면, 나머지는 악당 마음대로겠지.”
마야는 편하게 이야기했지만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서혁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야기의 흐름을 생각하면, 그의 딸 진희는 이 세상의 영웅이었다.
딸에게 상상 이상의 짐이 들린 것 같았다.
“그럼 악당은 누구야?”
“몰라, 나도.”
마야는 악당에 대해선 이야기 하고 싶지 않은 듯 짧게 대답했다. 서혁은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굳이 대답하고 싶지 않은 문제를 건드려 쌓아뒀던 친목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영웅이 있다는 이야기는, 그럼 이 세상에도 신이 있단 거겠네?”
“당연한 거 아냐? 신이 없는 세상이 어디 있어?”
마야는 이상한 말을 한다는 듯 비웃었지만, 서혁에겐 남다르게 다가온 말이었다.
현대에서 신의 존재는 뜨거운 감자였다. 마력이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힘이 나타나고 나서, 이것이 신이 있다는 증거인지, 아니면 그저 또 다른 과학현상의 출현인지 긴 논쟁이 일었다.
게이트가 출몰한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 마력도 또 하나의 과학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였지만, 당시엔 결론이 나지 않는 문제였다.
대부분의 사람은 마력과 던전에 익숙해졌지만, 서혁은 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군, 과학이 곧 신이 있다는 증명인가.”
서혁은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야는 이 세상처럼 과학이 발전된 세상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과학, 즉 자연법칙을 이용한 인간의 고도 기술은 곧 이 세상의 운명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음을 뜻했다.
예전엔 고도로 발전된 과학이 곧 신의 부재를 증명했지만, 마력이란 신개념이 출몰한 지금은 정반대의 개념이 되었다.
“이 세상의 신은 분명 어마어마하게 강력할걸? 보통 이 정도로 게이트가 열리면 성벽이 무너지게 마련인데, 수천 개가 열린 지금도 잘 돌아가잖아? 그만큼 견고한 성벽이란 이야기지.”
뭐, 그것도 우리 부단장님이 다 무너뜨릴 거지만, 하고 툴툴거리며 중얼거린 마야를 무시하고, 서혁이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헌터들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사태는 악화된단 이야기인가.’
마력은 법칙을 파괴하고, 운명을 피하는 힘이다.
헌터들의 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해지고 있다. 그리고 던전도 과거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악순환이었군.’
지금껏 던전을 닫기 위해서 실력 좋은 헌터들을 양성했지만, 이는 곧 자신의 목을 죄는 행위였다.
자신의 운명을 개변시키는 헌터들이 늘면 늘수록 성벽은 위협받는다.
‘이거 막을 방법이 없잖아.’
서혁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영웅이 세상을 구한다 한들,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 예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저기? 이제 이 식 지워도 돼?”
“어? 어어.”
마야가 거울에서 식을 지웠다. 어느새 좌표 공식은 완성이 되고 있었다.
서혁이 마야가 준 식을 풀어 답을 산출해 거울에 적자, 마야는 그 답을 이용해 또 다른 식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근데 말이야, 내가 게이트를 열어봤자 소용없지 않아? 괴짜가 나타나면 당신이나 나나 탈출 실패할걸? 괴짜가 그래보여도 강하단 말이야.”
“그건 걱정하지 마. 내게 생각이 있으니까.”
서혁도 서혁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다.
‘괴짜에겐 내가 필요하니까.’
그는 괴짜가 자신을 납치한 이유가 진희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걸 막기 위해서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괴짜는 서혁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마야와의 대화를 통해, 그게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괴짜는 금강의 비밀을 원한다. 그렇기에 이세영의 편에 붙어 있었고, 서혁이 금강에 대해 파헤치자 납치하려 마음먹은 것이다.
서혁은 그 정보를 마지막 거래 수단으로 남겨두었다.
괴짜의 보물이 될 수도, 혹은 역린이 될 수도 있는 마지막 수단.
“자, 완성이다.”
서혁은 거울에 좌표를 적으며 웃었다.
드디어 작전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35. 방아쇠
“방위대 개편 소식을 알릴 때네요.”
드디어 관리본부의 숙청이 마무리되었다. 아직껏 살아 있는 몇 적폐 빼곤, 대부분의 인물이 경질당하거나 대중의 질타를 받았다.
반대로 헌터 길드의 평판은 수직 상승했다. 비인증 헌터들을 잡아들이고, 헌터 승급시험을 재정립하며, 정부의 적폐를 드러내는 데 앞장선 헌터 길드의 대표 조혜수는 이미 정치인 수준으로 유명해졌다.
파란 기사단의 유명세도 같이 올랐다.
최근엔 길을 가다가도 진희의 팬이라며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을 지경이었다.
대중의 호의와 환호를 보며, 진희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진희의 곁에서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서한이 물었다.
“뭘 알려? 그냥 알아서 진행되는 것 아니었어?”
서한의 물음에 대답한 건 건너편에서 초췌한 안색으로 엎어져 있던 현성이었다. 그는 최근 방위대 일로 돌아다니느라 피로에 절어 있었다.
“예, 다음 주면 방위대 대장으로 발령될 겁니다. 덕분에 단숨에 소령까지 승진했네요.”
“에이, 초고속 승진인데 그렇게 끝내긴 아쉽죠.”
현성의 직위는 방위대 무력집행부 대위였다. 하지만 최근 벌어진 일들을 해결한 공을 높이 사, 정부에서 소령이란 유례없는 승진을 시켜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