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와 헌터의 겸직-156화 (156/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56화

“진짜 본격적으로 준비했구나.”

진희는 신림의 폐허를 수색하며 나아갔다. 그녀를 보필하고 있던 카온은 자신들에게 덤벼오는 폭력배를 한 손으로 날려 버리며 물었다.

“이쪽이 맞습니까?”

“응, 맞아. 정상진 보고가 맞다면 말이야.”

서진희라는 인간재앙을 만나 까마귀파가 몰살당한 후, 신림의 조직들은 본거지를 숨기기 위해 철저히 움직였다.

주변에 온갖 보초를 세워둬 신분을 수색했고, 전투원들은 시도 때도 없이 주변을 정찰했다.

하지만 이미 본거지의 위치를 아는 진희에게는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녀는 방해하는 조직원들을 모조리 물리치며 본거지로 나아갔다.

“여기네.”

도착한 곳은 백화점이었다. 언뜻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듯했지만, 그녀는 조직의 본거지가 이 백화점 아래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려가자.”

진희는 카온에게 따라오라고 말한 뒤, 멈춰버린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내려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덤벼들던 적들이 어느새 모습을 감추었다.

‘소식이 들어갔겠지.’

진희가 찾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아무리 많은 인원을 투자해 봤자 소용없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자 만난 건 싸울 의사가 없는 이들이었다.

실력은 얼추 B급. 긴장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진희가 입을 열었다.

“광부 두목을 만나고 싶은데, 어디 있어.”

“……광부 조직은 해체했습니다.”

대답한 것은 가장 앞에 있던 중년의 사내였다. 팔의 문신이 드러나는 검은색 양복을 입은 그는 정중한 말투로 말했다.

“까마귀파도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잔당은 모두…….”

“알아, 광부가 망했다면 그 자리를 대신한 사람 있을 거 아니야. 그 사람한테 안내해.”

“…….”

모두 알고 찾아왔다. 사내가 식은땀을 흘렸다. 신림에 존재하는 조직들은 과거보다 더 은밀하게 움직였다.

까마귀파의 몰락을 지켜본 조직들은 자신들의 정보를 병적으로 숨겨왔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진희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컨테이너는 안 왔나 보네? 숨어 있나?”

“……안내하겠습니다.”

그는 잠자코 앞장서기 시작했다.

백화점 지하는 기이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식품코너였을 매장엔 온갖 사람들이 몬스터의 사체나 마석을 거래하고 있었고, 영화관으로 보이는 구석엔 장비를 제련하는 대장장이가 불을 지피고 있었다.

거대한 지하에 나름대로 생태계를 구축한 것이다.

‘게다가 호의를 가진 것 같진 않고.’

수많은 사람이 알게 모르게 진희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 감춰진 속내는 하나같이 어두웠다.

진희의 얼굴과 이름은 신림에선 유명했다. 파란 기사단이 출범하기 전부터 까마귀파를 홀로 말살시키고, 세 조직의 본거지를 옮기게 만든 주범이었으니까.

자신들의 거점을 또다시 없애려는 것인가 의심하는 거겠지.

“여깁니다.”

사내가 안내한 장소는 지하의 가장 구석, 작은 보석점이었다. 다른 상점들과 달리 말끔한 외관을 한 보석점은 형광등 빛이 환하게 비춰 진짜 영업하는 상점처럼 보였다.

“전 이만…….”

“수고했어.”

“…….”

사내는 돌아서며 작게 혀를 찼다. 딴에는 들리지 않게 자그마한 소리로 말한 거겠지만, 카온과 진희의 귀에 안 들릴 리 없었다.

“…….”

“놔둬. 새파랗게 어린 애들에게 무시받는데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

카온이 가만히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다 앞으로 나서려 하자, 진희가 막았다.

“조폭들 심보야 뻔하지.”

조폭이란 곧 죽어도 자신이 강자라고 뽐내고 싶어 하는 하급 인생의 집합체다. 그들에게 겸손이나 예의를 바라는 게 우스운 일이었다.

물론 자신이 불청객이란 점도 있었지만, 진희는 애당초 저들에게 친절한 안내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곧 정리될 인간들이니까.”

간부라고 나온 이들의 실력을 보아하니, 삼인방의 수준이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듯했다.

진희는 걱정을 접어두고 보석상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입니다.”

그리고 보석상 안, 말끔한 소파에 앉아 있는 인물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창백한 피부의 사내가 태연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영?”

그는 과거 브리온의 오브를 제작하는 ‘공장’에서 만난 사내, 박영이었다.

공장에서 오브를 만들고 있던 이주민이자, 진희가 스카우트하기 위해 명함을 건넨 사내였다.

“누굽니까?”

“기억 안 나?”

진희는 카온에게 박영에 대해 설명했다. 브리온이 비인증 헌터들을 이용해 헌터 시장을 혼란에 빠뜨릴 때, 그들이 헌터들에게 건넨 장비의 제작을 박영이 담당했다.

“지하실에서 만났잖아. 그때 네가 쟤 머리 바닥에 처박았을걸?”

“……그건 불필요한 설명 아닐까 싶습니다만.”

박영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카온이 그제야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네가 왜 여기 있어? 공장에서 탈출한 거야?”

진희는 공장에 있는 박영을 보고 그가 감금되어 있음을 눈치챘다. 바르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다른 세상에서 온 이주민이었고, 모종의 이유로 감금당해 아티팩트를 만들고 있었다.

“브리온이 공장에서 손을 뗐습니다. 공장의 주 거래처가 사라지다 보니 제법 크게 혼란이 일었지요. 덕분에 탈출했습니다. 당신 덕분이죠.”

박영은 진희가 브리온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윽고 브리온이 공장에서 나가고, 온갖 비인증 헌터가 잡히고 있단 소식에 이 모든 게 진희가 벌인 일이란 걸 눈치챘다.

“그럼 왜 나한테 안 왔어? 그 스카우트 진심이었는데.”

“처음엔 파란 기사단에 흥미가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전 이런 일이 더 잘 맞거든요.”

“이런 일?”

“전 최전선엔 관심이 없어서요.”

공장에서 탈출한 박영은 진희의 명함에 적힌 보육원에 찾아간 적 있었다. 그는 그곳에 있는 기사단 일행을 보고 발걸음을 돌려, 이곳 신림의 조직으로 들어왔다.

“당신네 기사단은 위험합니다. 전 안전한 직장이 좋아요.”

“여기가 안전하다고?”

진희가 헛웃음을 지었다. 신림이 안전한 장소라니, 농담으로도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오래 살다 보면 감이 좋아지죠. 당신의 곁은 명예로운 자리가 될 순 있으나, 그만큼 목숨이 위험한 자리예요. 이 세상에서 당신의 곁만큼 안전하지만 동시에 위태로운 자리는 없습니다.”

미래를 단정 짓는 듯한 말투에 진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도 혹시 운명을 본다든가, 그런 재주 있어?”

“별을 보는 고풍스러운 재주는 아닙니다. 그저 학자로 장수하다 보니, 이 세상의 주인공이 누군지 감이 오는 것뿐입니다.”

“주인공?”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당신의 운명이 곧 세상의 운명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 그런 사건의 중심에서 지낼 생각이 없어요. 그래서 이곳으로 왔습니다.”

박영은 진희를 소파로 안내했다. 마치 자신의 안방인 양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진희가 더 말해보라는 듯 턱짓했다.

“여기서 뭘 하는데?”

“단순합니다. 청소를 돕는 거죠.”

청소란 단어에 카온이 순간 움찔 떨었다. 마치 자신들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진희는 조금의 표정 변화 없이 다시 물었다.

“누가 하는 청소인데?”

“이세영 씨입니다.”

이세영? 진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세영 씨가 시킨 일이라고?”

“흠, 모르고 계셨군요. 당신이라면 당연히 알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

박영이 진희의 앞에 마주 앉으며 말했다.

“이세영 씨가 금강을 청소하기 위한 밑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박영의 말은 이랬다.

신림의 조직 중 ‘컨테이너’는 외부의 기업들이 비공식적으로 연합한 단체다.

당연히 이 중엔 브리온도 있었는데, 그들은 신림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던전에서 자원을 채취해 불법 거래를 일삼고 있었다.

신림에 들어오는 돈 대부분은 컨테이너를 거치게 되는데, 세영은 이것을 막기로 결심했다.

“청소 구역은 신림뿐만이 아닙니다. 강변이나 의정부, 부산 쪽의 불법 시장도 청소를 준비하고 있죠. 브리온이 불법으로 활동하는 곳 전부를 노리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금강이 활동을 중지한 사이, 세영은 독자적인 세력을 이용해 브리온과 금강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첫 번째가 브리온의 한국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거기에 제가 참가한 거죠.”

“네가 무슨 재주로 세영 씨랑 일을 해?”

“이주민인 걸 밝히고, 제 지식을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파란 기사단에 합류하길 포기한 그는 곧장 세영을 찾았다. 세영에게 자신의 가치를 입증시킨 후, 등용을 부탁한 것이다.

진희가 이해가 안 된단 표정으로 물었다.

“선택이 너무 빠른데? 너 운명 못 보는 거 맞아?”

“제 지식을 가장 탐내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겐 이주민 동료가 있지만, 이세영 씨는 다를 테니까요. 그는 언제나 이주민 부하를 갖길 원했습니다.”

세영은 세상의 질서를 원한다. 삼라만상을 이용해 운명을 엿보는 이영한 회장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운명과 성벽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필요했다.

진희는 의도적으로 세영에게 성벽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다. 운명과 성벽에 대해 설명하려면 자신의 전생에 대해 말해야 했기 때문이다.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고, 세영을 동료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 사실을 세영도 알고 있기에, 진희가 아닌 다른 정보 제공자를 찾기 시작했다.

때마침 등장한 게 박영이었다.

“매우 공교로운 타이밍이군.”

가만히 듣고 있던 카온이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세영이 운명에 대해 해박한 이주민을 원하던 때에 마침 박영이 등장하다니, 우연이라 하긴 너무 공교로운 시기였다.

박영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 능력 덕분입니다. 전 인간의 감정이나 욕망을 읽어낼 수 있거든요.”

이주민은 각자 특별한 능력을 가지곤 했다.

파란 기사단에 의탁하고 있는 자이로 장로의 부족은 영혼을 다루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따지고 보면 카온 또한 용인으로 햇빛에 몸이 치유되는 특징을 가졌다.

박영은 생물의 욕망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일종의 감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단한 건 아닙니다. 굳이 따지면 그냥 눈치 특별히 좋은 수준이죠. 지금 당신의 호위가 절 경계하고 있다는 걸 보지 않고도 느끼는 정도입니다.”

“그럼 난 어때?”

“무관심하군요. 약간의 호기심이 있지만, 재미없으면 당장 자리를 떠날 정도의 무관심입니다. ……역시 당신은 해괴한 사람이네요.”

정답이라며 진희가 작게 웃었다. 시종일관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박영의 이야기를 경청했으면서, 진희의 속내는 그다지 동하지 않았다.

“넌 내 사람이 아니니까.”

“…….”

유치하지만 그만큼 잔인한 태도였다. 박영은 순간 숨을 삼켰다. 진희의 말이 진심이란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