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55화
“아직 멀었네- 저번에 클로이랑 싸웠을 때도 그 동료들한테 막무가내로 당하기만 했었지.”
카온에겐 아픈 기억이었다. 진희가 나타나다 모조리 정리하긴 했지만, 그 직전까지 카온은 일행을 지키기 위해 내내 힘든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다수의 S급과 방어전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진희가 보기엔 부족한 건 매한가지였다.
‘카온이 대련에서 지는 건 상성 때문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진희는 카온의 표정에 분함과 부끄러움이 맴도는 걸 보며 생각했다.
카온은 기교를 부리는 기사가 아니다. 오히려 방패를 들고 적을 막아내는 병사에 가까웠다.
굳건한 방어력과 견고한 강인함이 그의 장점이었기에, 서한과 현성을 일대일로 이기는 건 동실력이라 한들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그런 걸 설명해 줄 정도로 진희는 친절하지 않았다.
상성을 생각하지 않고 이길 때까지 노력하는 게 진희가 바라는 바였으니까.
“아, 근데 신림 하니까 마침 생각나네.”
진희는 책상을 뒤져 정상진이 제출했던 서류를 찾아냈다.
“무엇입니까?”
“지금 신림의 생태계를 조사해 오라고 시켰었거든. 어디 보자…….”
과거 신림은 세 조직으로 나뉘어 있었다.
조폭들의 까마귀파, 비인증 헌터들의 조직 광부, 외부 기업들의 비공식적 상점 컨테이너.
까마귀파가 몰살된 지금 여러 조폭이 세를 확장하고 있었고, 광부의 경우 브리온의 계략과 더불어 큰 이득을 보는 단체였다.
“근데 그 광부가 정리되었다고 들었거든.”
브리온의 비인증 헌터가 대부분 잡히고, 헌터 시장이 안정화되기 시작하며 광부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때 이 광부를 정리하고, 신림의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른 이가 있다고 보고를 받았다.
“정리한 녀석들이 누구인지 확인해 봐야겠어. 까먹고 있었는데, 소라 얘기 들으니 떠올랐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지금 당장 움직이자며 진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폭들 쪽은 정리하는 데 큰 무리 없을 거야. 대부분 어중이떠중이거든. 컨테이너 측은 알아서 기겠지.”
눈치가 빠른 컨테이너는 파란 기사단에 덤빌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새롭게 등장한 세력은 힘을 한번 확인해 봐야 했다.
“예, 준비하겠습니다.”
진희가 말은 하지 않았어도, 카온은 이게 진희 나름의 걱정이란 걸 눈치챘다.
소라가 활동하는 데 위협이 될 정도인지 확인하겠다는 이야기였다. 혹시라도 소라의 수준에서 감당이 되지 않는 상대라면 직접 처리할 테지.
카온은 진희 모르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 * *
“얘 그냥 바보 아니야?”
괴짜에게 납치당했던 서혁은 무선 호출기로 다른 인질과 연락을 시도했다.
아무래도 그 인질은 호출기를 잘 입수한 것 같은데, 문제는 보내오는 메시지에 오타가 가득했다.
“나가 화실 결에 틈을 만든다?”
초등학생이 봐도 풀 수 있는 간단한 암호를 못 푼 것인지, 호출기로 날아오는 메시지는 완성된 문장이 아니었다.
“내가 화장실 결계에 틈을 만들겠다, 뭐 이런 뜻인 것 같은데.”
그간의 어수룩한 대화로 짐작한 메시지는 이랬다. 서혁은 미심쩍은 얼굴로 방 화장실로 향했다.
괴짜는 아직 서혁의 계획을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최근 괴짜는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듯, 평소보다 서혁의 동선을 점검하는 시간이 짧아졌다.
서혁은 십중팔구 진희가 무슨 일을 벌였으리라 생각했다.
‘걔가 당하고 있을 성격이 아니지.’
화장실에 도착하자, 서혁은 묘하게 주변 공기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평소처럼 정체되어 갑갑했던 저택의 공기가 아니라, 창문이라도 연 듯한 청량한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 이내 말끔했던 거울이 불투명하게 안개가 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봐?”
“어, 왔다!”
서혁의 목소리를 들은 거울 건너편의 사람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린 나이의 여성 목소리였다.
“당신이 서혁이지! 서진희 아빠!”
“넌 누구지?”
“진짜 너무한 거 아냐? 그렇게 어려운 암호를 두고 가면 어떻게 해! 그거 푸느라 밤에 잠도 못 자고 온종일 고민만 했잖아.”
30분이면 풀릴 암호를 지금껏 고민했다는 점에서 서혁 마음속에서 그녀의 평가가 깎였다. 서혁은 떨떠름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너 누구냐고.”
“나? 난 마야라고 해.”
“마야?”
서혁은 어디선가 들은 듯한 이름에 미간을 좁혔다.
마야, 진희가 만난 적 있다던 테러범의 이름이었다.
“납치당한 거야?”
“맞아! 아우, 어쩌지. 부단장님도 날 찾고 있을 텐데…….”
‘……괴짜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봐야겠네.’
테러범, 괴짜, 파란 기사단, 금강과 브리온, 세력들을 빠르게 정리한 서혁이 작게 웃었다. 대충 윤곽이 보이는 듯했다.
그는 괴짜와 테러범이 같은 세력이라 생각했었다. 혹은 동맹관계라고. 괴짜가 브리온에 들러붙어 혼란스런 상황을 조장한 것은 테러범들의 활동 범위를 넓혀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 의심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괴짜는 다른 목적이 있군. 테러범과는 비슷하지만 달라. 방향이 같아서 이용한 건가. 목적은…….’
“너 말이야, 괴짜에게 뭐 들은 것 없어?”
서혁은 차분하게 마야를 심문했다. 서혁의 친근한 어조 덕분인지 마야는 순순히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긴 시간 동안 혼자 지낸 스트레스 때문인지, 마야는 마치 서혁이 자신의 친구인 것처럼 편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아마 내가 가진 헤르메스 총서가 필요했나 봐. 그래봤자 나 말고 누구도 쓸 수 없는데…… 당신 납치할 때 좀 도와달라고 한 다음부턴 이 방에 처박혀서 나가지도 못했어. 괴짜가 ‘조금만 참으면 돼’ 하고 말하긴 했는데, 거짓말이야. 벌써 한 달이 넘었잖아.”
헤르메스의 총서란 물건이 게이트를 여는 아티팩트의 이름인 것 같았다.
“그 총서를 너 말곤 아무도 못 쓴다는 거 진짜야?”
“응, 이건 내 몸에 각인된 거라서 아무도 사용 못 해.”
‘내가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을 가져왔다는 이야기는, 아무도 총서를 사용 못 하게 만들 셈인가.’
단순하게 생각하면, 남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아티팩트를 뺏어온 거겠지.
헤르메스의 총서가 어떤 물건이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궁금했지만, 아직 거기까지 물어보는 건 시기상조라 생각한 서혁이 화제를 돌렸다.
“혹시 여기서 탈출하는 방법 알아?”
“으음, 탈출할 수는 있는데, 금방 잡힐 거야. 저번에 해본 적 있거든.”
마야는 이 저택이 괴짜가 마법으로 만든 밀폐된 ‘유사성벽’이라고 말했다. 세상을 이루는 성벽의 구조를 어설프게나마 따라 한 이곳은, 말하자면 일종의 마력이 없는 던전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게이트를 열어 탈출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게이트를 여는 즉시 괴짜가 눈치를 챈다는 점이었다.
“이곳 구조가 너무 복잡해서 게이트를 열어도 바로 나갈 수가 없어. 출구를 제대로 만들지 않으면 큰일이 일어나거든. 좌표 계산이 너무 힘들어서, 저번에 나갈 땐 일주일 동안 준비했었어.”
“그리고 바로 잡혔고?”
“응, 게이트 열려고 마법을 쓰는 순간 괴짜가 돌아왔거든. 아무래도 유사성벽 안이다 보니까, 마법 같은 큰일이 일어나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나 봐.”
서혁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서혁은 서재에서 크게 다칠 뻔한 적이 있었다. 혹시 서재 어딘가에 단서가 있을까 싶어 이곳저곳을 뒤지다가, 환풍구로 보이는 천장에 들어가기 위해 의자와 책상을 발판삼아 올라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발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고, 그로 인해 어깨에 타박상을 입게 되었다.
그때도 괴짜가 빠른 속도로 나타났었다.
‘그땐 감시카메라 같은 게 있는 줄 알았는데…….’
저택엔 어떤 전자 기기도 없다. 카메라는 물론이고 도청기도 없는 걸 이미 확인한 바였다.
“혹시 여기서 크게 다치거나, 큰 소란이 일면 괴짜가 알게 돼?”
“그럴걸? 당신과 나는 이 유사성벽 속의 주민이니까, 목숨에 관련된 큰일이 일어나면 성벽이 흔들릴 거야. 생명체의 죽음은 성벽을 흔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거든.”
“그럼 만약 너나 내가 죽으면 이 성벽은 박살 나겠네?”
“그, 그렇지?”
서혁이 그 말을 끝으로 말이 없어지자, 마야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치?”
“…….”
“저, 저기요?”
“이봐, 마야. 혹시 너 그 좌표 계산이란 거, 지금 할 수 있어?”
서혁의 질문에 마야가 곤란한 듯 대답했다.
“힘들어. 그리스 시대의 위도랑 별자리로 계산하는 좌표라서, 평소에는 다른 사람이 도와줘서 답만 적어뒀다가 쓰는데…… 여긴 아예 다른 세상이라 식을 처음부터 다시 짜야 해.”
불안전한 세계다 보니 게이트를 여는 수식에도 큰 공을 들여야 한다는 말이었다.
서혁은 다시 한번 말이 없다, 이내 불투명한 거울에 입김을 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보여?’ 하고 적었다.
“어때?”
“아, 보여. 대신 거꾸로야. 거울이라 그런가?”
“지금 화장실에서만 대화할 수 있는 거지? 그 총서 덕분인가?”
“맞아. 여기가 그나마 결계가 헐거워서 그쪽 방이랑 연결할 수 있었어.”
“그럼 이 화장실 거울에 네가 말한 좌표식이란 걸 좀 적어줄래? 내가 대신 계산해 줄게.”
“뭐? 하지만 당신 마법사도 아니잖아?”
마야가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묻자, 서혁은 걱정 말라는 듯 대답했다.
“너도 계산할 수 있다며.”
“그런데?”
“그럼 나도 할 수 있어.”
“…….”
아무리 들어도 좋게 들리는 말은 아니었다. 마야가 언짢은 목소리로 뭐라 말하려던 찰나, 서혁이 덧붙였다.
“우린 이제 한배를 탔으니까, 서로 도와야지. 안 그래?”
“응…….”
마야는 서혁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부단장이 기피한 유일한 일반인이었으며, 진희가 활약할 수 있도록 지금껏 서포트한 유능한 인물이었다.
오래간만에 듣는 사람의 목소리에 친근감이 들긴 했지만, 서혁은 마냥 믿기엔 위험한 인물이었다.
‘나가기 위해서 잠깐만 이용하자…… 고 생각하고 있겠지.’
서혁은 마야의 긴 침묵의 의미를 짐작하고 있었다.
서혁 또한 마야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소 멍청한 구석이 있다고 한들, 딸의 적인 건 변하지 않았다.
이용하겠다고 생각하는 건 마야뿐만이 아니었다.
서혁은 비록 일반인이었지만 마법에 나름의 조예가 있었다. 마력을 다루지 못할 뿐, 어지간한 마법식이나 마법진 정도는 구사할 능력을 가졌다.
그 말인즉, 마야의 게이트 위치를 임의로 조작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서혁은 거울 위로 그려지는 마법식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괴짜에게 한 방 먹여줄 기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