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와 헌터의 겸직-154화 (154/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54화

“어떤 부탁인지 듣고 나서 정할게. 재밌으면 돕지, 뭐.”

가벼운 어조에 레인이 발끈한 얼굴이었지만, 마노가 제지했다.

기록자란 인간들은 하나같이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운명의 영향을 받지 않는 불로불사였기에 모든 일을 장난으로 보는 경향이 짙었다.

“성벽을 부수는 일이 될지라도?”

단장의 귀환은 곧 그들의 단체, 카르나의 재건을 뜻한다. 수많은 세계를 무너뜨린 그들은 지구의 성벽마저도 부술 작정이다. 그 말은 곧 세계의 멸망, 혹은 혼돈의 시작을 뜻했다.

미카일의 말에 사내는 잠깐 고민하는 듯싶더니, 이내 웃음으로 대답했다.

“응, 아무래도 좋아. 요즘 터지는 사건들이 너무 뻔한 결말만 보여서, 돕는 게 더 재밌을 거 같거든. 밸런스를 맞춰야지. 이 시나리오는 영웅 쪽 힘이 너무 강하잖아?”

믿을 만한 인물은 아니지만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카일은 긴장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단장을 부활시키고 싶습니다. 반신의 저주를 역풀이해서 단장을 온전하게 환생시키길 원해요.”

“오호라, 로맨티시스트의 귀환인가. 재밌긴 하겠네.”

사내는 미카일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미카일은 그의 손을 맞잡았다.

“협력할게. 나도 거짓 신을 사랑해서 주신을 배신한 기사란 양반을 보고 싶으니까. 물론 거래니까 대가는 받을 테지만.”

단장만 있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 미카일의 열망 서린 눈동자가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이 불길한 사내에게 무엇이든 대가로 바칠 수 있었다.

* * *

보육원의 삼인방은 퇴소식 이후, 신림역 주변에 집을 사기로 했다. 짧지만 헌터로 모은 돈이 제법 있었기에, 서로 돈을 모으면 괜찮은 아파트에 이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삼인방이 성인이 된 직후, 진희는 아이들의 숙소를 대신 결정했다.

‘이미 준비해 뒀어. 여기로 가봐.’

장소는 마찬가지로 보육원 근처였다. 걸어서 30분 거리에 위치한 집은, 신림역 주변이다 보니 인적이 드문 폐허 한가운데 위치했다.

3층의 넓은 현대식 저택이었다. 연병장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거대한 앞마당과, 주변 광경과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신축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집을 준비해 준단 진희의 말에 단독주택이나 아파트를 생각하고 있던 아이들은 입을 떡 벌리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마스터가 반년 전부터 준비한 숙소다.”

아이들이 퇴소할 때를 대비해 건축한 건물이었다. 꼭 보육원 아이들의 자립을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기사단 단원들이 늘어났을 때 본거지 역할을 할 건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주요 간부는 보육원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신입 단원이나 수습이 지낼 장소가 필요했다.

“아무리 그래도 스케일이 남다르네.”

숙소보단 호텔에 가까운 넓고 말끔한 외견에 종혁이 질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매일같이 지내다 보니 깜빡했지만, 진희는 아이들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부자였다.

아이들 모르게 던전을 드나들며 모아온 재산은 이런 저택 하나 어렵지 않게 지을 만한 수준이었다.

“짐을 옮기고 1층으로 내려와라. 방은 알아서 잡아. 중앙 계단을 기준으로 좌측이 여성, 우측이 남성 숙소다. 복도는 양측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니, 1층에서 각 계단으로 올라가.”

아이들과 함께 숙소를 찾아온 카온은 평소처럼 무뚝뚝한 어조로 명령했다. 삼인방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방으로 향했다.

기본적으로 룸메이트가 있던 보육원과 달리, 숙소는 각방을 쓸 수 있었고 방마다 일반 아파트처럼 취사부터 화장실, 샤워 시설까지 모두 설비되어 있었다.

삼인방은 아직도 이곳이 자신의 집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 표정으로 다시 1층에 모였다.

카온은 작게 헛기침하며 아이들의 시선을 모았다.

“이곳은 마스터가 파란 기사단의 숙소 및 본부로 예정된 건물이다. 현재 이곳에 상주하는 인원은 너희 셋. 이후에 김이선, PD, 김유나 또한 이주할 예정이다. 대부분이 출퇴근의 형태로 다니겠지만, 사람은 점차 늘 거야.”

“어? 그럼 꼭 여기에 안 살아도 돼요?”

기사단이라면 무조건 여기에 살아야 하는 줄 알았던 종혁의 질문에 카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요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뒤쪽 벽에 걸린 액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곳엔 기사단의 생활 방침에 대해 적혀 있었다.

“아직 신입인 너희는 저 규칙을 모두 지켜야 한다. 숙소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야.”

아이들은 액자에 적힌 글들을 읽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나 다를까, ‘1주일 중 4회 이상 체력 및 마력 훈련’, ‘3회 이상 대련 및 결과 기록’, ‘매달 말일 성과 보고’ 따위의 사항이 적혀 있었다.

모두 보육원에서 다뤄졌던 생활규칙이었다. 자취하면서 이 규칙을 따르긴 어려웠다.

“물론 규칙을 어긴다고 처벌을 하진 않는다만…….”

카온의 눈길에 아이들은 시선을 피했다. 저렇게 말해도 어긴다면 단단히 혼날 게 뻔했다.

반강제적인 규칙이지만, 아이들은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강해지는 것에 재미가 들린 시기였던 터라, 규칙이 없더라도 훈련은 계속했을 것이다.

단지 자취에 약간의 꿈을 가지고 있던 아이들이었기에, 실망의 기색이 언뜻 엿보였다.

이윽고 카온은 덤덤히 숙소의 안내사항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부분 대단찮은 이야기였다. 식사나 빨래, 취침 시간 따위에 대해 말하는 그를 보며 소라가 문득 떠오른 궁금증에 질문했다.

“던전은 우리끼리 들어갈 수 있나요? 단원이 되면 인솔자가 필요 없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간 삼인방은 카온이나 서한, 현성, 진희와 같이 던전에 출입했었다. 아직 미숙한 아이들을 위해 인솔자가 항상 동행한 것이다.

진희는 곧잘 아이들에게 정식 단원이 되면 인솔자 없이 다녀야 한다고 말했다.

“가능하다. 보고만 하고 간다면야.”

“알겠어요.”

카온은 짐짓 각오 어린 표정으로 대답하는 소라를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딜 갈 셈이지?”

“이 주변 청소요.”

“뭐?”

“보육원 있는 동네치곤 치안이 안 좋잖아요. 그 조폭들도 아직 안 사라졌고.”

소라의 말에 종혁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진짜 조폭하고 싸우려고?”

“응.”

진희가 꼬박꼬박 보육원 주변을 청소해 주고 있었지만, 그녀는 굳이 신림 중심부까진 침입하진 않았다.

그녀가 워낙 바쁜 것도 있었지만, 까마귀파를 홀로 무너뜨린 그녀의 실력을 알게 된 적들이 몸을 숨겼기 때문이다.

진희는 덤빌 의사가 없는 그들을 굳이 찾아낼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라에겐 그들을 물리쳐야 할 이유가 있었다.

“복수냐?”

“그것도 조금 있어요.”

소라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박민성에 대한 복수는 확실히 끝났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박민성의 목숨을 끊었고, 그에 대한 죄책감은 털어버린 지 오래다.

“제 동생들 사는 곳에 그런 인간들이 아직도 버젓이 있다는 게 거슬린 것뿐이에요.”

하지만 박민성과 같은 부류의 인간들을 물리치고 싶다는 감정은 남아 있었다.

신림은 그야말로 악의 소굴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보육원이라는 안전한 울타리에 익숙해져 느낄 수 없었겠지만, 소라만은 이곳이 얼마나 추악한 동네인지 잘 알고 있었다.

공권력은 무의미하고 힘을 가진 이들은 외면하는 더러운 장소, 소라는 이 신림을 말 그대로 청소하고 싶었다.

다신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그리고 동생들이 현실을 알지 못하도록.

“너희에겐 힘들 텐데.”

카온의 냉정한 말을 소라는 부정하지 않았다.

실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과거 까마귀파의 두목은 A급의 대단한 실력자였지만, 그를 제외한 조직원들은 그래봤자 B급의 헌터들이었다.

B급의 마력을 가지고, 천재적인 센스의 소라에겐 위험한 상대가 아니었다.

곧 성장할 민혁과 종혁도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하지만 범죄와 맞선다는 건 힘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의 아지트도 알지 못하는 삼인방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무찌른다고 덤벼들어 봤자, 그들은 진희에게서 도망쳤던 것처럼 몸을 피해 다른 은신처를 만들 것이다.

“알아요. 그러니까 사람 한 명 붙여주세요.”

“누구를?”

“PD 언니가 있음 좋겠지만, 바쁘신 것 같으니까. 최근 보육원 들락날락하는 그 꼬맹이요.”

“……정상진?”

진희에게 싸움을 걸었다가 된통 당했던 비인증 헌터, 정상진이 떠올랐다. 그는 아직도 진희에게 심부름을 받아가며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있었다.

“네. 그 사람이라면 신림에 대해 잘 알 테니까요.”

“믿을 만한 인물은 아니다.”

“안 믿어요. 어디까지나 거래니까. 저도 모아놓은 돈은 있거든요.”

원래라면 자취를 하며 사용될 돈이었지만 숙소가 생겼으니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정상진은 몸값이 매우 싼 A급이니, 무리한다면 고용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소라가 한번 결정하면 절대 바꾸지 않는 성격임을 잘 알기에, 카온은 팔짱을 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포기한 셈이다.

“주선은 해보마. 하지만 마스터가 그만두라고 할 수도 있어.”

“언니가 그만두라고 하면 그럴게요. 그럴 리 없지만.”

“…….”

카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야 진희라면 재밌을 것 같으니 해보라고 승낙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 *

“괜찮네, 해보라고 해.”

“예.”

카온의 예상대로, 진희는 소라의 제안을 허락했다. 정상진을 숙소로 보내고 소라가 원하는 만큼 정보를 제공해 주라 전했다.

“그래도 정상진 고용하는 비용의 절반은 우리가 대줘. 나도 신림 청소는 찬성하니까.”

“정상진을 믿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럴 리 있어? 걔는 태생이 낭인이야. 지금이야 재미있다고 붙어 있지만, 싫증 나면 알아서 떠날걸? 큰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아. 마찬가지로 큰일을 맡기지도 않을 거고.”

“알겠습니다.”

자신의 사람을 알게 모르게 챙기는 진희의 성격 탓에 걱정한 카온이었지만, 진희의 단호한 말에 안심한 듯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고 진희가 불만스럽다는 듯 눈가를 좁혔다.

“설마 내가 그런 양아치를 믿을 것 같아?”

“마스터는 승부욕 강한 사람을 좋아하니까요.”

“그건…… 그렇지.”

그녀가 향상심과 승부욕이 강한 사람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었다. 당장 기사단원 중에서도 그런 인물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선만 하더라도 B급이 되겠다는 일념에 무례를 범하며 찾아왔는데, 결국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던가.

“서한 씨도 그런 편이었지.”

“…….”

카온은 진희의 중얼거림에 순간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모습을 모를 리 없는 진희가 느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사란 모름지기 강해야 하니까 말이야. 그치?”

“예.”

“우리 카온은 서한 씨나 현성 씨에게 대련해서 이겨본 적 있어?”

“……없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