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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152화 (152/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52화

자이로는 진희를 관찰했다. 진희를 관찰하는 시간은 청하, 소라와 달리 매우 길었다. 소라와 이선의 대련이 끝날 때쯤, 왠지 모를 식은땀이 흐른 자이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승리가 보이는군요.”

추상적인 운명이었다. 하지만 달리 표현할 길도 없었다.

“상대가 누구라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그걸 증명하는 영혼의 단단함이, 대단하군요. 그야말로 승리의 여신입니다.”

“그게 다가 아니죠?”

“…….”

자이로의 눈동자에서 보이는 건 감탄보단 공포에 가까웠다. 자신의 영혼에서 뭔가를 본 것일까 궁금한 진희였지만, 그가 대답해 주지 않으리라 생각해 피식 웃고 고개를 돌렸다.

대련은 이선의 승리로 종료되었다. 대련에 대해 피드백해 주고, 새로운 검술을 알려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에게 향했다.

“단장님.”

자이로는 침을 꿀꺽 삼키곤 걸어가는 진희를 향해 말했다.

“단장님의 운명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다쳐도, 자신을 위해 살아갈 건가요?”

“전 제 자신이 가장 중요해요.”

“단장님이 희생하지 않으면 이 세계가 위험하다고 해도?”

진희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던 그녀는 잠깐 고민에 잠기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 게 뭐예요.”

그녀다운 오만하고 이기적인 대답에, 자이로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 * *

“전 아직 멀었나 봐요.”

“아냐, 충분히 잘했어.”

이선에게 진 소라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하자, 진희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선은 베테랑 헌터였고, 소라는 이제 막 1년 차의 신입 헌터였다. 실전 경험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이선과 대등하게 싸웠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너보다 쟤들이 더 실망스러울걸.”

진희가 손가락으로 강당 구석에 있는 남성진을 가리켰다. 청하와 민혁, 종혁은 멍하니 이선과 소라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따라 하기엔 까마득한 수준의 대련이었다. 저번 달까지만 해도 비등비등했던 삼인방이었지만, 뚜렷한 실력이 차이가 나기 시작하니, 소라가 훈련할 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진희는 아이들에게 너희의 재능도 특별하니 걱정 말라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위로가 먹혀들진 않은 것 같았다.

소라는 아이들 앞에 섰다. 물끄러미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들에게 소라가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 노오력을 했어야지.”

“뭐…… 야!”

민혁이 발끈해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소라가 혀를 차며 말했다.

“민혁이나 종혁이나 연애에만 신경 쓰고 그러니까 약한 거야. 나처럼 열심히 수련하면 좀 좋니?”

“연애 아니라니까!”

“으, 응? 난 연애하는 사람 없는데?”

민혁은 유나가 떠올라 버럭 소리를 질렀고, 종혁은 무슨 소린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민혁과 소라는 잠깐 말싸움을 멈추고 종혁을 바라보다, 이내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돌렸다. 본인만 모르는 새삼스러운 썸인 듯했다.

“왜? 팩트 말하니까 꼽니?”

“너 진짜…….”

“아니면 덤벼보든지. 한 번이라도 공격에 성공하면 취소해 줄게. 아니면 뭐, 유나 언니한테 연락해서 네가 요즘 연애에 정신 팔려서 해롱해롱 하다고…….”

“덤벼.”

민혁이 이를 악물고 소라에게 달려들었다. 청하는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종혁은 덜했지만, 민혁은 소라에게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다. 말이 없지만 승부욕이 강한 그는 진희 몰래 바깥에서 유나와 곧잘 마법 수련을 하고 돌아왔다.

그의 노력을 알고 있던 청하였기에, 소라의 도발이 민혁을 꾸짖는 게 아니라 승부욕을 돋우기 위한 방식임을 눈치챘다. 소라 나름의 동기부여인 것이다.

결국 대련은 다시 한번 불타올랐다. 한 번이라도 유효타를 먹이려는 민혁의 노력과, 계속해서 놀려대는 소라 덕분에 이번 대련은 아까보다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소라마저도 피곤해하며 주저앉았고, 공격에 성공한 민혁은 탈진해서 바닥에 쓰러졌다.

“잘들 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희가 헛웃음을 지으며 다가갔다. 식당에서 가져온 물통을 아이들에게 하나씩 쥐여 주고, 문득 떠오른 의문에 종혁에게 말했다.

“너희들 승급 해야 하지 않아? 아직 D급이지?”

소라도 마나홀이 늘어난 걸 확인받긴 했지만, 아직 B급으로 승급하진 않은 상태였다. 민혁과 종혁, 청하도 C급 수준의 마력을 가졌으니 승급을 할 수준은 되었다.

이래저래 몸을 숨길 필요가 없으니, 아이들도 어엿한 C급 면허증을 가질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으음, 근데 요즘 승급이 힘들다고 하던데요.”

“왜? 그냥 센터에 가서 등록하면 안 돼?”

“비인증 헌터가 엄청 많아졌잖아요. 카트리지 같은 이상한 방법으로 마력을 늘린 사람도 있고요. 그래서 요즘은 정기적으로 상급 헌터의 감독하에 승급 시험을 진행하나 봐요.”

“C급 승급에 시험도 봐?”

진희는 마력 감응력만 확인하고 C급 면허증을 받았었다. 그러나 최근 비인증 헌터로 인한 사건들 때문에 헌터 등록을 할 땐 복잡한 절차를 치르는 듯했다.

“시험이라기보단 그냥 면접이나 그런 건데…… 말이 많아요.”

종혁의 말은 이랬다.

관리 본부가 제 역할을 못 하게 되자 승급 시험에 기업 소속의 헌터들이 찾아와 시험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시험의 객관성과 시험관의 편애였다.

“금강과 브리온 쪽에선 아무도 감독을 하지 않는데요. 덕분에 중견 기업의 헌터들이 차출되는데…….”

“아, 내가 A급 시험 봤을 때 같은 상황이구나.”

진희가 A급 시험을 봤을 때도, 관리 본부의 한만성이나 기업의 헌터들이 진희를 헐뜯으려 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의 열화판이 지금 승급 시험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저희도 시간 좀 지나면 가려고 했어요. 당장은 가봤자 좋은 꼴 못 볼 것 같아서.”

“왜 좋은 꼴을 못 봐?”

“그야, 감독들이 자기 후배들만 챙겨주지 않을까요?”

인터넷의 헌터 커뮤니티에서도 곧잘 언급되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무소속 헌터들은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으니 다음 기회를 노리겠단 말을 하곤 했다.

삼인방도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진희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너희가 걔들에게 꿇릴 게 뭐가 있어?”

“네?”

“기사단인 거 밝히면 안 돼?”

“어어…….”

그러고 보니, 자신들은 파란 기사단의 정식 단원이었다. 언론에선 대기업에 버금갈 정도로 언급이 되고 있는 유명한 단체.

“하, 하지만 저희가 파란이라고 나서면 폐를 끼치지 않을까요?”

파란은 PD와 진희를 제외하곤 언론에 드러난 얼굴이 없었다. 진희가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단원들의 신상이 공개되지 않은 파란 기사단은 신비주의 컨셉을 가지게 되었다.

진희는 헛웃음을 지으며 종혁의 말을 부정했다.

“누가 그렇게 말해? 그런 생각하지 말고, 시험 보고 와. 너희가 승급해야 나중에 던전을 가도 합법적으로 데려갈 거 아니야.”

“아, 네…….”

종혁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이 괜찮다면야 굳이 시험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민혁과 소라가 정신을 차린 후, 종혁은 승급 시험을 신청했다.

날짜는 이틀 후, 장소는 진희가 처음 C급 면허증을 받았던 헌터 센터였다.

* * *

“와, 사람 많다.”

센터 앞은 수십 명의 사람으로 시끌벅적했다. 모두가 승급을 위해 찾아온 헌터로, 삼인방처럼 어린 고등학생부터, 많게는 중년의 이르게까지 가지각색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응?”

삼인방이 센터의 직원에게 시험 등록을 하자, 시끄럽던 센터 앞에 적막이 흘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본 종혁이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 민혁의 곁에 붙었다.

“왜 그래?”

“모, 모두 우릴 보고 있는데?”

등록을 끝내자 사람들 모두가 삼인방과 청하를 지켜보고 있었다. 민혁이 인상을 찌푸리며 센터 데스크 위의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소속 : 파란 기사단, 이름 : 김민혁. 대기번호 23.]

[소속 : 파란 기사단…….]

아무래도 시험 등록을 하면 대기번호와 함께 전광판에 등록되는 듯싶었다.

파란 기사단이란 이름이 보이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것이다.

“어, 어디 숨어 있을까?”

종혁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사람들의 시선에 주눅이 든 모습이었다.

소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을 관찰하는 이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동경부터 긴장, 질투, 갖은 감정이 엿보였다.

“됐어, 숙이면 없어 보이잖아. 파란 이름을 달고 나온 거니까, 당당하게 있어.”

파란이란 이름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소라의 말에 종혁이 억지로 허리를 폈다. 그럼에도 표정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

“20번부터 30번 번호를 부여받으신 헌터님들은 2관의 면접실로 행해주시길 바랍니다.”

마침 안내방송이 나왔다. 일행은 방송에 따라 면접실로 향했다.

일행을 포함해 10명의 사람이 면접실 안에 줄 세워진 의자에 앉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역시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면접관들의 눈빛은 지나칠 정도로 뜨거웠다.

“파란 기사단…… 진짜 있었구먼, 이 파티.”

가장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중년의 사내가 불만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인터넷에서나 유행하는 건 줄 알았는데, 설마 진짜 소속 이름을 단 헌터가 나올 줄이야.”

“아, 예. 저흰 파란 기사단의 막내로…….”

“근데 수준이 왜 이래? 셋이 C급, 한 명이 B급? 난 또 A급이라도 등장하는 줄 알았네.”

사내가 대답을 하려던 소라의 말을 가로막았다. 말이 끊긴 소라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사내를 노려보자, 그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태도가 그게 뭐지? 이 자리가 어떤 자린지 감이 안 오나? 예의를 모르는군.”

“…….”

무슨 말을 해도 받아칠 게 분명하다. 이곳의 절대적인 갑은 면접관이었다. 소라는 분한 표정을 애써 감추고,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면접관들은 도와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하고, 나머지는 처음 입을 연 면접관처럼 적의와 경계가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대중에게 파란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지만, 기업들의 입장에선 눈엣가시였다. 기업이 아니다 보니 견제할 수도 없고, 인터넷에서만 활동하고 있어 꼬투리 잡기도 어렵다.

얼굴을 아는 건 그나마 진희와 PD뿐인데, 진희의 A급 승급 시험은 이미 기업들 사이에서 정평이 난 사건이었다. 그녀를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막내로 보이는 파란 기사단의 단원들이 시험을 보러 온 것이다.

면접관들은 마치 사냥감을 보는 듯한 눈으로 아이들을 훑어보았다.

‘불쾌해.’

소라가 구겨지는 미간을 억지로 펴며 한숨을 삼켰다. 뻔하고 저질스러운 적의였지만, 이 정도는 예상한 바였다.

“흠흠, 그럼 면접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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