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51화
“정의해 주길 바라시나요?”
“희망이라도 있어야 붙잡아보지 않겠어?”
서한의 말에 진희가 쓰게 웃었다.
“너무 소극적으로 다가오시네요. 좀 더 무드 있게 말해봐요.”
“소용없다는 걸 아니까. 허세를 부려도 좋아하는 척도 안 할 거잖아.”
돌려 말하는 것도, 거짓을 꾸며내는 것도 통하지 않음을 서한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진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달빛을 반사하던 진희의 나른한 눈동자가 서한을 담았다.
“그럼 서한 씨에게 전 어떤 사람이죠?”
역으로 돌아온 질문이었지만, 서한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동경, 집착, 소유욕, 죄책감. 그런 것들.”
“적나라한 감정들이네요.”
“애정이라고 정리해 줄까?”
“듣기 나쁜 말은 아니네요.”
서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또다시 진희가 말을 흐리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감상을 묻고자 하는 게 아니야. 난 네 감정을 듣고 싶은 거야.”
진희는 언제나 애정 바로 한 걸음 전에서 멈췄다. 서한과 현성, 카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선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무너진 적이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이들에게 진희는 ‘거기까진 필요 없어’ 하고 거절해 왔다.
하지만 서한은 이 위태로운 관계가 오래가기 힘듦을 알고 있었다. 애정이란 인내를 포함하지 않은 단어다. 또한 애정과 가장 먼 단어는 다름 아닌 양보였다.
“서한 씨는…….”
진희는 손을 뻗어 서한의 뺨을 어루만졌다. 케네스와 똑 닮았지만, 그것보단 좀 더 매섭고 날카로운 턱선이 만져졌다.
“얼굴은 취향이에요.”
“다른 건?”
서한이 진희의 손을 붙잡았다.
“성격도 좋아요. 전 자기 일에 확신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니까.”
“또?”
“꾸준히 노력하는 점도 보기 좋네요. 당신도 천재니까, 더 강해질 수 있어요.”
“그리고?”
“본인은 기억도 안 나는 주제에 죄책감 갖고 나서는 것도, 나쁘진 않아요. 귀여우니까.”
“그래서?”
“꽤나 좋아하는 편이에요. 당신을.”
윽, 서한이 이를 악물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몸이 앞으로 쏠릴 것 같았지만, 태산 같은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그 모습이 귀여운 듯 진희가 낮게 웃었다.
“서한 씨는 제 어떤 점에 반했나요?”
“매력적인 점.”
“……끝?”
“더 필요해?”
말하자면 한 시간 내내 말해줄 수 있다는 듯 짜증스러운 안색의 서한을 보고 진희가 작게 신음했다.
“꾼이네, 이거.”
“몰랐냐? 잘생긴 사람은 원래 꾼이야. 너도 꾼이잖아.”
“들켰네.”
서한과 진희의 웃음이 서로 겹쳤다.
웃음이 잦아질 때쯤, 서한이 천천히 진희의 곁으로 움직였다. 뻔하고 유치한 움직임이었지만, 진희는 구태여 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말이에요.”
그리고 서한의 얼굴이 진희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브랜디로 인해 향긋한 내음이 나는 서로의 입술이 닿기 직전, 진희가 입을 열었다.
“아직 안 돼요.”
“뭐?”
턱, 진희가 서한의 턱을 붙잡았다. 서한이 고개를 빼려 했지만 진희는 다른 손으로 서한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목으로 손을 올렸다. 마치 당장에라도 목을 조르려는 듯한 진희의 손길에 서한의 몸이 경직됐다.
“좋아하긴 해요. 하지만 아직 부족해요.”
“뭐가, 또?”
“다.”
진희가 엉덩이를 들어 허리를 폈다. 서한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오른 그녀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좀 더 노력해 봐요. 놀랄 정도로 강해지고, 누구도 당신의 애정에 반박할 수 없도록 유명해진 상태에서, 다시 도전하세요.”
“…….”
“제 곁에 홀로 서기엔, 아직 모자라요.”
탐욕스러운 눈동자였다. 메마르고 느긋한, 나른했던 눈동자는 어디 가고,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마냥 번들거리는 눈으로 서한을 내려다보았다.
당장에라도 삼켜버릴 정도로 욕망에 번들거리는 그녀의 눈에 목이 말랐다.
“그러니까 지금은…….”
진희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서한의 목과 어깨를 잡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브랜디의 향은 아직도 진하게 남아 있었다. 선명한 알코올과 과일의 향기가 타액과 섞여 달콤한 내음을 풍겼다. 서로의 입술이 열리고, 진희의 혀가 서한의 입술을 핥았다.
“……윽!”
서한의 혀가 엉키기 위해 진희의 입술을 붙잡으려 했으나, 진희는 다시 고개를 들어 멀어졌다.
말라버린 서한의 입술을 타액으로 적신 그녀가 쪽, 하고 서한의 입술에 짧게 입 맞추고 떨어졌다.
“이 정도로 만족하세요.”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빈 브랜디 병을 흔들더니 더 마실 게 없단 걸 확인하곤, 방을 나서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술 맛있었어요. 다음에 또 마시죠.”
진희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닦고, 문을 열었다. 아직 번들거리는 입가를 정리하지 못한 서한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 애들 좀 보러 가야겠어요. 그럼 좋은 밤 되세요.”
여운이 남는 웃음소리를 남기고, 진희는 방을 떠나갔다. 서한은 그 모습을 보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 상태에서 어떻게 자냐고.”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창문 너머에서 들리는 왁자지껄한 아이들의 목소리만이 그의 안타까움을 위로해 주었다.
34. 일상과 비일상
“으음, 상대가 안 되네.”
삼인방이 보육원을 나가서 살게 된 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삼인방은 곧잘 보육원을 찾아와 수련하곤 했는데, 오늘은 소라와 남은 아이들 간의 대련이 있는 날이었다.
진희는 뻗어버린 민혁과 종혁, 청하를 보며 혀를 찼다.
소라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서 진희를 돌아보았다.
“어…… 어떻게 하죠?”
“대련 상대를 바꾸자.”
소라의 실력이 너무 급하게 상승해서 다른 아이들과 대련이 불가능했다.
가진 마력에 비해 무술 실력이 뛰어난 소라였기에, 라이샤의 선물 덕분에 B급 수준으로 성장한 지금은 아이들이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다.
일대일만 보면 PD와 겨뤄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다.
“하지만 PD는 바쁘기도 하고…… 이선, 네가 해볼래?”
“네, 네?”
수련을 지켜보고 있던 이선이 뒷걸음질 쳤다.
“저, 저는 못 이길 것 같은데요.”
“아냐, 너도 B급 됐잖아.”
“그렇지만…….”
이선은 최근 B급에 도달했다. 마나홀이 팽창하여 생기는 고통을 모두 참아낸 그녀는, 이윽고 진희의 손길 아래서 새로운 B급 헌터로 각성했다.
하지만 아직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없는 상태였다. 던전을 가본 것도 아니고, 기나긴 C급 생활이 몸에 밴 탓에 대련에 소극적이었다.
“언제까지 대련을 피할 거야? 힘은 사용하지 않으면 늘지 않아.”
“……알겠습니다.”
이선이 진희의 다그침에 각오를 다진 표정을 하고 앞으로 나섰다. 이선의 무기는 검과 방패. 탱커형 전사에게 잘 어울리는 장비였다. 소라는 여전히 건틀렛을 끼고 있었다.
거듭된 승리에도 소라는 방심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새로운 상대의 등장에 당황하지 않고 자세를 잡았다. 이선도 긴장 어린 표정으로 방패를 들고 소라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이곳의 기사님들은 쉬는 일이 없군요.”
그때, 진희의 곁에 이주민의 장로가 다가왔다. 이주민의 대표이자 보육원의 직원들을 담당하는 부장이 된 그의 이름은 자이로였다.
“일은 끝났나요?”
“네, 단장님 말씀대로 진행했습니다.”
진희는 그에게 보육원의 정비와 직원 교육을 일임했다. 영혼이 서로 이어진 이주민들은 한 명을 교육하면 나머지 모두가 이해하는 진풍경을 보여주었기에, 교육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대신 정상진 씨의 방해가 좀 있었습니다만…….”
“……걘 무시해요.”
정상진은 최근 일을 몇 개 맡겼더니, 자기가 보육원 일원이라도 된 양 매일 찾아왔다. 마음 같아선 쫓아버리고 싶은데 정상진을 잘 따르는 애들이 제법 있다 보니 그마저도 시원찮았다.
“어린 기사님들이 대단하군요. 저희 부족의 전사도 저 정도로 강하진 않았습니다.”
자이로가 추억이 어린 눈으로 이선과 소라의 대련을 지켜보았다. 서로 타입이 비슷하다 보니 실력은 백중지세로 보였다.
“흐음, 그러고 보니 영혼의 성향도 서로 비슷하군요.”
“그런 것도 보여요?”
“저희 부족은 영혼을 다루는 게 숙명이니까요. 영혼을 보고 운명을 점지하거나, 숙명을 정의하는 게 장로의 일이랍니다.”
“예언 같은 건가요?”
“그보단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는 게 맞겠군요. 물론 영혼이란 변칙적이고 진화하는 것이기에, 정확하진 않습니다만, 그 사람의 미래를 위해 제안하는 일이지요.”
진희가 흥미 어린 눈으로 자이로를 바라보았다.
“예를 들면요?”
“예를 들면…… 소라 경의 경우, ‘맞서 싸우는’ 숙명을 타고났군요. 날카롭지만 견고하고, 부러지기 쉬우나 언제고 다시 날을 세우는 특징을 가졌습니다. 저희 부족에선 이런 영혼을 보고 ‘꺾이지 아니한 늑대’라고 표현합니다.”
“문학적이네요.”
“네, 시와 노래로 운명을 표현하니까요.”
자이로 부족은 영혼의 색뿐 아니라 형태와 그간 살아온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어렴풋한 과거의 행적과 영혼의 상태를 빗대어 하나의 시로 숙명을 표현하는 게 그들의 문화였다.
“부족은 모두 똑같은 숙명과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혼이 연결되어 있으니 당연하겠지요.”
“그럼 청하는 어때요?”
“청하 군은…….”
자이로는 강당 구석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청하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가족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정의심이 깊군요. 그리고 티끌 하나 없습니다. ‘백색 직검’이라 부르겠군요.”
제법 맞는 말이었다. 청하는 민하가 납치되었을 때 일반인의 몸으로 B급 조직 폭력배에게 도전한 경력이 있는 아이였다.
“정말 점 보는 것 같아서 재밌네요.”
“그러나 점과 달리 저흰 가장 중요한 건 알려주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게 뭔데요?”
“영혼의 본질입니다.”
“본질이요?”
진희의 질문에 자이로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예를 들어, 지금 당장에라도 꺼질 것 같은 영혼의 주인을 보고, ‘당신은 곧 죽을 운명입니다’고 말하는 게 좋은 일일까요? 그보다는 살 가능성이 있는 미래를 제시해 주는 게 더 현명한 행위겠지요. 영혼의 본질을 함부로 밝히는 건, 그 사람이 자신의 운명에 쉽게 순응해 버리는 결과를 낳곤 합니다.”
그래서 최대한 좋은 것만 말해주고, 미래를 단정 짓는 본질에 대해선 알려주지 않는다고 한다. 살인자가 될 운명을 가진 아이에게 용병의 길을 알려주는 것처럼.
“알려달라고 해도 안 되나요?”
“안 됩니다. 어길 시 운명을 손상시키거나 단정시킨 부작용으로, 저희도 큰 아픔을 겪으니까요.”
듣자 하니 자이로의 부족은 운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했다. 부정적인 운명을 피할 길을 알려준다니, 테러범들이 그토록 부르짖는 성벽의 파괴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제 운명은 어떻게 보이나요?”
“단장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