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50화
민혁과 종혁이 각방에서 제복으로 갈아입고, 소라의 양옆으로 모였다.
“이거 생각보다 어깨가 당긴다.”
어깨에 딱 맞춘 제복 상의는 멋은 있었지만 움직이기 편한 복장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허리를 펴고 곧은 자세를 만드는 제복의 기능에 종혁이 작게 감탄했다.
삼인방은 진희가 기다리는 방으로 걸어갔다.
“……어?”
사이좋게 걸어가던 중, 삼인방은 복도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 걸 눈치챘다.
퇴소식의 강당과는 다른 고풍스러운 장식이 복도를 치장하고 있었다. 금박이 새겨진 붉은 카펫 위를 걷고 있자니, 이곳이 보육원이 아니라 어디 궁전에라도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늦었군.”
“아, 죄송합니다.”
복도의 끝엔 카온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제복을 입은 그는 무뚝뚝한 눈동자로 문을 열며 말했다.
“제식을 맞춰 입장해라. 단장님이 기다리신다.”
“예.”
그제야 아이들은 표정을 굳히고 몸가짐을 바로 했다. 자신들은 이제 더 이상 보육원의 아이가 아니었다. 정기사 서임식을 받으러 가는 수습 기사이자, 파란 기사단의 단원이었다.
허리춤에 찬 가검을 똑바로 차고, 소맷부리를 단정히 매만졌다.
그리고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제식을 맞추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방 안은 적막했다. 넓은 방이었지만, 안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감으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수습 기사들은 자신들을 기다리는 단원들을 마주했다.
말석부터 김이선과 PD, 김유나, 라이샤, 서한과 현성이 자리했다.
서한과 현성은 카펫의 끝, 단상의 양옆에 서 있었다. 각각 화려하게 장식된 제복을 입고선, 지금껏 본 적 없는 단호한 눈빛으로 수습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수습 기사, 입장.”
문을 닫고 들어온 카온이 수습 기사들 앞에 섰다. 그리고 수습 기사의 입장을 알림과 동시에 앞으로 걸어 나갔다.
자신들에게 따라오라고 하는 말임을 알아들은 수습 기사들이 제식에 맞춰 전진했다.
차렷 자세로 대기하고 있는 단원들에게 시선이 가려 했지만, 애써 참고 진희의 앞에 섰다.
단장 자리에 도달하자 카온은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켰다. 단상 위에 있던 진희가 입을 열었다.
“수습 기사 3인, 앞으로.”
소라와 민혁, 종혁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예를 표하라.”
진희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목소리만으로도 어깨가 눌려, 시선을 피해야 할 것만 같았다. 수습 기사들은 심호흡하며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수습 기사, 장소라, 김민혁, 정종혁. 세 기사의 정기사 서임식을 거행한다.”
진희가 검을 뽑아 들었다. 바르그가 아닌 화려하게 장식된 예장용 검이었다.
“금일, 성인이 된 세 기사를 파란 기사단의 정식 기사단원으로 임명한다.”
진희의 목소리에 마력이 담기기 시작했다. 방을 가득 채운 그녀의 목소리는 수습 기사 세 명의 몸을 옭아맸다. 뻣뻣하게 굳은 세 기사의 앞에 선 그녀가 서임식 맹세문을 외웠다.
“기사, 적을 패퇴시킬 수 있는 기사에게 검을 하사하노라.”
“기사, 가족을 지킬 수 있는 기사에게 방패를 하사하노라.”
“기사, 명령을 따를 수 있는 기사에게 투구를 하사하노라.”
“기사, 전령을 알릴 수 있는 기사에게 군화를 하사하노라.”
“기사, 정의를 품을 수 있는 기사에게 명예를 하사하노라.”
진희는 세 수습 기사의 어깨에 차례로 검을 얹었다.
“기사여, 기사로서 소임을 다할 것을 명예와 목숨에 맹세하겠느냐?”
“……예.”
“가족을 지키고 기사도에 걸맞은 무도를 보일 것을 맹세하겠느냐?”
“예.”
“마지막으로, 파란 기사단의 단원으로서 기사단을 위해 검을 들겠느냐?”
“예!”
대답하는 목소리는 점차 힘을 키웠다. 이윽고 서로를 옭아맸던 마력이 풀리고, 기사단장의 검이 검집으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서라.”
세 기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금일, 성인이 된 세 기사를 파란 기사단의 정식 기사단원으로 임명한다.”
그녀의 말을 끝으로, 세 기사의 서임식이 끝났다. 단원들의 절도 있는 박수와 함께 진희는 세 기사에게 축복을 내렸다.
“경들에게 승리의 길이 있기를.”
그리고 기사단장이 아닌, 언니로서의 밝은 웃음을 지으며 진희가 덧붙였다.
“축하해, 얘들아.”
아이들이 처음으로 기사로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 * *
“고생했어.”
“서한 씨도 고생하셨어요. 서 있느라 피곤했죠?”
“오그라드는 손발 펴느라 힘들었다.”
모든 식이 끝난 밤, 보육원에선 파티가 열렸다. 성인이 된 삼인방은 주인공으로 여기저기에 불려 다니며 축하를 받고 있었다.
“술이 없는 파티라니 좀 싱겁긴 하네요.”
“보육원이잖아.”
서한이 핀잔을 주자 진희가 그도 그렇죠, 하고 웃었다. 식이 끝나고 진희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파티에 잠깐 참가하긴 했지만, 아이들과 삼인방의 이별을 위로하는 자리에 자신이 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몰래 빠져나온 것이다.
“하지만 난 가져왔지.”
서한이 손에 들고 있던 술을 흔들었다.
“비싼 술이에요?”
“많이 비싸. 가출하면서 몰래 훔쳐온 거거든.”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우는 줄 모른다던데.”
“지금 쓰는 속담 맞냐, 그거?”
피식 웃은 서한이 진희의 곁에 앉았다. 진희의 방은 보육원 건물 2층에 있어, 바로 아래 공원과 강당이 훤히 보이는 창문이 있었다.
“이 추운 날씨에 잘도 노네.”
아무리 겨울이 막 지나갔다 한들, 추운 날씨임은 변함없었다. 두꺼운 겉옷을 입고 땀나도록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서한이 중얼거렸다.
“참고로 신현성은 떨궈놓고 왔다.”
“아하, 어째선지 같이 등장 안 하시더니.”
“애들한테 먹잇감으로 던져줬거든.”
서한과 달리 현성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대단했다. 특히 손재주가 뛰어난 현성은 아이들에게 종이접기나 퍼즐 따위를 곧잘 부탁받곤 했다.
서한은 그걸 이용해 현성을 멀리 떨어뜨려 놓는 데 성공했다.
“카온은 정리하느라 바쁘고.”
지은정이 아이들과 파티를 즐기고 있었기에 그녀의 빈자리를 카온이 채워주고 있었다. 쉴 새 없이 간식을 내오고 카온의 커다란 뒷모습을 보며 진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초코파이를 들고 날래게 움직이는 덩치 큰 용인의 모습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귀여웠다.
“왜 그렇게 떨어뜨려 놓으셨는데요?”
“모르는 척하기냐?”
서한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술잔을 내밀었다. 진희는 그 술잔을 받고 비스듬히 기울여 서한에게 내밀었다.
서한은 술병의 뚜껑을 따고 진희의 잔에 술을 채웠다.
“맥주 아니니까 안 기울여도 돼.”
“브랜디예요?”
달콤한 향과 연갈색 액체를 보며 묻자, 서한이 고개를 끄덕이고 술병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진희가 서한의 잔에 술을 따랐다.
“금강 에디션인가 뭔가. 프레스티지라더라.”
“그게 뭔데요?”
“있어, 비싼 거.”
안주는 아이들이 먹던 과자들이었다. 브랜디에 어울리는 안주는 아니었지만, 안주 타령을 할 만큼 둘은 분위기를 못 읽진 않았다.
짠, 청량한 음색을 내며 두 잔이 부딪쳤다.
“……맛있네요.”
한 모금 마신 진희가 조금 놀랍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헌터가 된 이후 바빠서 제대로 술을 즐긴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고가의 술을 마신 건 전생에서 마신 술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 브랜디는 전생에서 마신 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맛있었다.
“현대의 술이란 게 참 대단하긴 해요. 중세 수준과는 차원이 다르네요.”
잔에 남은 한 방울까지 삼킨 진희의 감탄에 서한이 혀를 차며 말했다.
“아직도 전생 얘기야?”
“왜요, 찔려요?”
“당연히 찔리지. 널 죽인 게 나라는데 좋게 들리겠어?”
서한의 얼굴엔 죄책감이 어려 있었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웠던 진희가 그의 뺨을 찌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와 지금은 달라요. 걱정 말아요, 당신이 케네스와 닮긴 했어도 케네스처럼 멍청하진 않으니까.”
“……황태자가 멍청했어?”
“으음, 멍청하다고 해야 할까요, 무능하다고 해야 할까요. 외모는 잘생겼는데 속은 좁았죠. 아니, 검술은 뛰어났으니 무능하진 않았나.”
케네스는 황태자로 인정받을 만한 실력은 출중했었다.
그야말로 문무겸비의 표본으로, 바제트가 없었다면 제국의 일검은 황태자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진희가 케네스에 대해 떠올리고 있을 때, 서한은 한 문장에 꽂혔다.
“잘생겼다고?”
“네? 네. 잘생기긴 했죠.”
“그럼 난?”
“…….”
유치하다. 그리고 찌질하다. 진희가 싸하게 식은 눈으로 서한을 바라보았다.
서한은 부자연스러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잘생겼다는 소리 듣고 싶으세요?”
“…….”
부정을 하지 않아서 더 우스웠다. 진희는 쯔쯔, 하고 혀를 차며 서한의 잔에 술을 따랐다.
“서한 씨도 나쁘지 않은 외모예요.”
“나쁘지 않은?”
“적당한 외모죠.”
“적당한?”
“볼만한 외모.”
“…….”
“술잔이 비었는데, 채워줄 사람 어디 갔나?”
서한이 이를 갈며 진희의 잔에 술을 채웠다.
“사람 마음 뻔히 알면서 그러면 재밌나?”
“그야 재밌죠. 뻔히 보이는 속마음만큼 즐거운 게 또 있어요?”
“정말이지.”
말재주에선 당해낼 재간이 없던 터라, 서한은 말없이 술을 비울 뿐이었다.
둘의 대작은 제법 길게 이어졌다.
아무 말도 없이 술을 따르고 마시길 수십 분, 이윽고 브랜디 한 병이 모두 동이 났다.
“서진희, 너는 어떻지?”
“뭐가요?”
“속마음 말이야.”
서한은 술잔을 내려놓고 진희를 바라보았다. 진희의 눈은 여전히 창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모습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자애로워 보이기도 했지만, 어떤 면에선 외부인의 모습처럼 낯설었다.
“한 번도 내게 진심을 말한 적 없지?”
“…….”
“나뿐만 아니라, 신현성에게도.”
진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한은 굳이 카온에 대해선 말을 꺼내지 않았다.
카온은 기사단원 중 진희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인물일 것이다.
서한은 진희가 유일하게 본모습을 보여주는 게 카온의 앞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의 감정이 아닌, 가족애나 동료애에 비롯된 것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물론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 같지만.’
이따금 카온이 보이는 적대 어린 모습이 무엇 때문인지 뻔히 보였지만 서한은 입에 담지 않았다.
“네게 있어서 나는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