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와 헌터의 겸직-149화 (149/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49화

33. 퇴소식, 출정식

“이야기 더럽게 복잡하네.”

진희는 혀를 차며 TV를 껐다. 점점 난해하게 변하는 장편 드라마를 보고 있자니 짜증이 일은 탓이다.

“할 거 없으면 바깥일이나 돕지?”

그때 창문 너머에서 커다란 박스를 옮기고 있던 서한이 진희를 보고 말했다. 진희는 말없이 웃으면서 그에게 손을 하늘하늘 흔들었다.

“젠장.”

진희의 웃음에 넘어가기로 한 그가 혀를 차곤 그녀를 지나쳤다.

서한의 뒤를 이어 카온도 장식물이 가득 담긴 박스를 들고 강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드디어 퇴소식이네.”

진희와 보육원 아이들이 만난 지 벌써 1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 봄이 찾아오고, 고등학교 3학년 아이들의 퇴소가 다가왔다.

보육원의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퇴소를 해야 한다. 시기는 졸업식이 끝난 직후로, 아이들은 보육원에서 쥐여 주는 돈을 가지고 성인으로서 자립하게 되었다.

올해의 퇴소자는 세 명으로, 민혁과 종혁, 그리고 소라였다.

삼인방은 이미 던전을 돌며 벌어놓은 돈으로 자립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근방에 집도 구했고, 이미 헌터 면허증을 땄으니 생활이 어렵지도 않았다.

“문제는 걔들이 아니지.”

진희는 쓰게 웃으며 강당 앞에 모인 다른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보육원의 아이들이 허망한 얼굴로 퇴소식의 준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인방은 가람 보육원의 중심이었다. 아이들이 의지하는 장남, 장녀였으며 희망의 대상이었다. 삼인방이 헌터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고 헌터가 되겠다며 진희에게 부탁하는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물론 그 아이들에게도 훈련 방법을 전수해 주긴 했지만, 아무래도 삼인방의 천재성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런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인 삼인방이 떠나는 날이 다가온 것이다.

“청하가 중심이 되어야 할 텐데.”

그 청하마저도 아이들 사이에 껴서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곁에 있는 민하가 청하를 위로하고 있었지만, 청하도 결국 초등학생 아이에 불과했다. 사랑하는 형과 누나가 집을 떠난단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순 없었다.

소라는 좀 더 보육원에 머무르면 안 되겠냐고 진희에게 물었지만, 진희는 단칼에 거절했다.

‘동생들을 위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안 돼. 여긴 보육원이야.’

이는 아이들을 돌봐온 지은정 선생도 진희의 의견에 동의했다.

삼인방이 보육원에 계속 남는다면 아이들이야 기쁠지 모른다. 하지만 보육원의 미래를 생각하면 해선 안 될 일이었다.

보육원은 부모와 가족이 없는 아이들이 찾아오는 시설이다.

가람 보육원은 진희가 후원을 시작하며, 차차 정상적인 보육원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아이들을 보호하고 자립을 도와주는 시설의 목적을 되찾은 것이다.

그런 와중에 삼인방이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온다면, 그건 성장이 아닌 퇴화를 의미했다.

‘보육원의 아이들은 시설을 나가는 걸 반겨야 해요. 이곳은 슬픈 장소니까요.’

진희는 지은정의 말을 떠올렸다.

보육원이란 결국 가족을 잃은 아이들이 보호를 위해 찾은 장소다. 아이들에겐 이곳을 나가 떳떳한 성인이 되는 게 가장 행복한 결말이었다.

시설에 머무르길 바라는 아이가 있어선 안 됐다. 보육원은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져 주지 않으니까.

“진희 씨.”

많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현성이 다가왔다. 그는 서글픈 표정의 아이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진희에게 말했다.

“말씀하신 출정식 준비도 다 됐어요.”

“고마워요.”

가람 보육원의 퇴소식 직후엔, 파란 기사단의 출정식이 이어질 차례였다.

진희는 의자에서 내려왔다.

“갈아입고 나갈게요. 애들 준비시켜 주세요.”

“네.”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곤 강당 쪽으로 걸어갔다.

강당의 퇴소식은 지은정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아이들의 축하를 받으며 퇴소식을 진행함과 동시에, 지은정이 아이들에게 주민등록증과 퇴소증을 나눠주며 끝을 맺는다.

퇴소식이 끝난 아이들에겐 보육원 건물 한편에 위치한 빈 사무실로 오도록 전했다.

아이들은 오늘 보육원을 퇴소하여 성인이 되고, 동시에 파란 기사단의 정식 단원으로 승급한다.

수습 기사가 아닌, 정식 기사로서 인정받는 날이 될 것이다.

진희는 창문을 닫고, 방구석에 놓인 제복을 꺼내 들었다. 금색과 백색의 배색과 청색의 물줄기가 그려진 화려한 기사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제복 위에 물결 문양이 박힌 가슴 보호대를 덧대고, 기사단장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금색의 망토를 한쪽 어깨에 두른다.

그리고 머리를 하나로 묶어 어깨 위로 올렸다.

[잘 어울리는군.]

“고마워.”

마침 잠에서 깨어난 바르그가 진희의 옷차림을 보고 말했다.

[의외로 제복이 어색하지 않아 보여.]

“예전에 지겹도록 입었던 거거든.”

진희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사무실을 나섰다. 그녀의 걸음걸이에 따라 망토가 바람에 흔들렸다.

퇴소식이 끝나면 다른 단원들도 제복을 입고 출정식이 이뤄지는 방으로 들어올 예정이었다.

“흠, 잘 어울리는군.”

“고마워요, 영감님.”

마침 가던 길에 영감과 마주쳤다.

지엑스의 습격이 있은 후 아예 보육원에 자리 잡은 영감은 기사단을 위한 제복을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해 주었다. 진희가 입고 있는 제복은 영감이 특별히 고심해서 만든 옷이었다.

장인의 감각으로 만들어진 옷은 과거에 바제트가 입던 황실의 제복과도 비교할 수 있는 아름다운 옷이었다.

진희의 감사에 영감이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했다.

“퇴소식엔 안 오나?”

“네, 전 후원자에 불과하니까요.”

“애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텐데.”

진희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이런 면에서 확실히 선을 긋는 진희를 보며 영감이 혀를 찼다. 냉정한지 상냥한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영감은 강당으로 향했다.

“나중에 보지.”

진희는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파란 기사단의 출정식임과 동시에 아이들의 기사 서임식이었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강고하고 위엄 어린 걸음걸이로, 그녀는 강당을 지나쳤다.

오늘은 언니와 누나가 아니라, 기사단장이 되어 아이들을 대해야 했다.

* * *

“지금껏 너희가 있어서 행복했단다.”

장소라, 김민혁, 정종혁은 강당 중앙에 섰다. 건너편엔 지은정이 붉어진 눈가를 애써 감추며 세 명의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당은 마치 작은 축제를 보는 것 같았다. 화려한 장식들로 가득 찬 강당은 평소에 훈련을 위해 찾아온 강당과는 사뭇 달랐다.

웃으며 행복해야 하는 퇴소식이었지만, 아이들의 표정은 마냥 밝진 않았다.

“앞으로 사회에 나가면 힘든 일이 많을 거야. 어른이 된 이상 너희가 감당해야 할 일이 생길 테고, 도망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도 맞닥뜨리겠지. 하지만 선생님은 너희가 헤쳐나갈 수 있는 강인한 어른이 될 거라고 믿는단다.”

지은정이 천천히 다가와 아이들 앞에 섰다. 그녀의 손엔 상장 케이스가 세 개 들려 있었다. 퇴소증과 주민등록증, 그리고 보육원에서 쥐여 주는 소정의 지원금이 담긴 케이스였다.

“내가 부족해서 너희를 지켜줄 수 없었던 걸 용서하렴.”

결국 지은정이 눈물을 보였다.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힘들었던 과거가 떠올랐다. 조직 폭력배들에게 모질게 당하던 아이들의 모습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무력함은 지금도 그녀를 괴롭혔다.

소라는 지은정의 손을 붙잡았다. 케이스를 쥐고 있던 손을 어루만지며, 소라가 어른스럽게 웃어 보였다.

“아니에요. 선생님은 언제나 우리 엄마였는걸요.”

“소라야.”

가람 보육원에선 함부로 엄마, 아빠란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본래라면 보육원의 원장에게 사용했을 호칭이었지만, 모든 직원이 나가고 전 원장마저 병상에서 죽고 난 후엔 부모의 역할을 대신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와선 지은정만큼 엄마란 호칭이 어울리는 사람은 없다고 소라는 생각했다.

“저도 선생님이 힘들었던 걸 알아요. 돈도 벌 수 없는 이곳에서 우릴 계속 돌봐주고, 한 번도 곁을 떠난 적 없잖아요. 선생님에게 가족이 있을 텐데.”

그녀는 단 한 번도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아이들 앞에서 꺼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소라는 지은정이 가끔 휴대전화로 가족과 통화하는 모습을 본 적 있었다. 그마저도 건물의 뒤편, 혹은 화장실에서 몰래 대화하곤 했다.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숨긴 것이다.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한 그녀의 배려였다.

“정말 감사해요. 비록 피가 이어진 가족이 아니라고 해도, 우린 선생님이 엄마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소라의 손 위에 종혁의 손이 올라갔다. 종혁은 언제나처럼 온화한 눈으로 지은정에게 말했다.

“선생님의 바람처럼 꼭 어엿한 어른이 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마지막으로 민혁의 손이 모두의 손을 감쌌다.

지은정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고 있을게. 너희가 멋진 어른이 돼서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단다.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 돼서, 상처받지 않아도 되는 어른이 되어주렴.”

지은정이 들고 있던 퇴소증을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장소라, 김민혁, 정종혁. 오늘부로, 가람 보육원에서 퇴소했다.

* * *

“난 안 울 줄 알았는데.”

종혁이 훌쩍거리는 코를 비비며 중얼거렸다. 지은정에게 받은 퇴소증을 소중히 짐가방에 챙겨 넣은 그를 보며 소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난 네가 펑펑 울 거라 예상했는데?”

“소라 너도 울었잖아.”

“너만큼은 아니야.”

소라와 종혁의 눈가는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퇴소식이 끝난 후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퇴소 선물과 축하를 한껏 받는 도중, 결국 소라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도 제일 많이 운 건 청하였지.”

민혁이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퇴소하는 건 소라네들인데 정작 가장 큰 소리로 울던 건 꽃다발을 건네던 청하였다.

“시영이도 울었잖아.”

“……걔는 왜 운 거야, 근데?”

드디어 금강에서 빠져나온 시영도 종혁의 퇴소식이란 말에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리고 종혁에게 어마어마하게 큰 꽃다발을 건네주며 축하한다며 울어댔다. 종혁은 떨떠름한 얼굴로 축하를 받았고, 꽃을 들고 둘이서 사진까지 찍었다.

“난 가끔 시영이의 애정이 좀 무겁단 생각이 들어.”

종혁의 말에 소라와 민혁이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여러 의미가 섞인 눈빛의 대화를 하고 나서, 가장 먼저 짐을 정리한 소라가 손뼉을 쳤다.

“자, 이제 출정식 하러 가자. 얼른 제복 입어.”

간단하게 끝내자던 퇴소식이 울음바다로 인해 생각보다 길어지고 말았다. 출정식을 기다리고 있을 단원들이 많으니, 소라가 민혁과 종혁을 다그쳤다.

소라는 이미 진작 옷을 갈아입고 짐 정리를 도와주기 위해 온 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