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48화
“어느 정도 있는데?”
괴짜가 자신이 가진 재산에 대해 말하자, 서혁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 돈 가지고 날 부리려면 이틀 정도 가능하겠네.”
“이익, 되게 비싸게 구네.”
괴짜가 컴퓨터를 끄고 서혁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에게 한 책을 던져주었다.
“자, 당신이 달라고 했던 책.”
서혁은 잠자코 책을 받아 들었다. 그 책은 서혁의 자택에 있던 소설책이었다. 그는 니케에게 다른 건 다 필요 없으니, 이 책을 가져다 달라고 요구했다.
“나 진짜 착하지 않아? 인질 요구도 다 들어주잖아.”
“그래그래, 착하다, 착해.”
서혁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펼쳤다.
“그게 그렇게 읽고 싶었어?”
“네가 날 끌고 오지만 않았으면 다 읽었을걸. 난 결말이 궁금하면 잠도 못 자.”
실제로 서혁은 책의 결말이 궁금하다며 일주일 내내 잠을 설쳤다. 그 모습에 못 이겨 니케가 책을 가져다준 것이다.
“무슨 내용이야?”
“연애 소설.”
“히히, 로맨틱한 남자네.”
니케는 책에 빠진 서혁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그럼 좀 더 기다리고 있어- 곧 풀어줄 테니까.”
“…….”
그 말을 믿지 않는 서혁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서혁은 니케의 저 실없는 미소가 거짓된 표정이라고 생각했다.
‘컨트롤 프릭(Control Freak) 수준이군.’
세간에 알려진 괴짜의 평가를 모두 수정해야 한다며 서혁이 낮게 웃었다.
니케는 매일 한 번씩 찾아와, 서혁의 상황을 관찰했다. 저택에 카메라나 도청기는 없었지만, 그가 어딜 드나들었는지 모조리 확인하곤 했다.
니케는 그걸 숨기기 위해 농담을 하곤 했지만, 서혁은 특유의 눈썰미로 니케의 수작을 모두 지켜보았다.
광기 어린 괴짜,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폭탄이란 소릴 듣던 니케라곤 생각할 수 없는 섬세한 행위들이었다.
서재의 책 순서를 외우거나, 욕조의 물기를 확인하고, 식당의 잔반을 확인하는 모습에 서혁은 소름마저 돋았다.
‘자기가 직접 통제하지 않으면 성미가 안 풀리는 타입이야.’
니케는 서혁에게 완벽히 통제된 생활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가 갈 수 있는 장소,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을 제한하기까지 했다.
일반인인 서혁은 알 수 없는 기묘한 결계들은, 그가 정해진 시간 외에 이동할 수 없도록 발을 붙잡았다.
‘아마 다른 인질을 못 보게 하려는 거겠지.’
이 저택엔 서혁 말고도 다른 인질이 있다. 그는 일주일간 니케의 감시 범위, 저택의 구조와 자신의 활동 시간을 비교해 판단했다.
정해진 시간에만 열리는 문들은 이 저택에 서혁 말고 다른 거주자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욕조의 물기나 서재의 책 순서를 확인하는 니케처럼, 서혁 또한 저택 곳곳에 단서를 수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니케는 서혁과 다른 인질이 마주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것도 이제 끝이지만.”
서혁은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소설책은 아무런 마법적 장치가 없는 평범한 책이었다. 그렇기에 니케도 책을 가져다 달란 서혁의 요구에 흔쾌히 응했던 거겠지.
하지만 이 책엔 평범하겐 알 수 없는 숨겨진 장치가 있었다.
“읏차.”
그가 책등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꾹 눌렀다. 그러자 등 부분이 벌어지며, 작은 원통 하나가 떨어졌다.
이 책의 주제는 장거리 연애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멀어지게 된 연인이, 그들만의 수단으로 연락을 주고받아 결국엔 이어지게 된다는 고리타분한 내용이었다.
유명한 책은 아니었지만, 이 책에 숨겨진 출판사의 기행 때문에 인터넷에선 작은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보네, 이 삐삐.”
바로 책에 주인공들의 연락수단이었던 기계를 숨겨놓은 것이다. 책을 모두 읽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장치였다.
얇은 원통 안에 들어 있는 건 버튼이 하나만 달려 있는 무선 호출기로, 작중 주인공들은 이 호출기를 이용해 서로 짧은 대화를 나누곤 했다.
원통 안에 든 호출기는 두 개였다. 소설처럼 긴 거리에서 사용할 순 없지만, 이 저택의 크기라면 충분히 수신 가능한 범위였다.
서혁은 책과 호출기를 들고 로비로 나갔다. 마침 식당이 열리는 시간이었다.
호화스러운 식당의 한구석에 빵과 과일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접시 아래에 정체불명의 마법진이 그려진 걸로 보아, 시간이 되면 음식을 접시 위로 소환하는 마법이 아닐까 싶었다.
그는 빵 한 점을 입에 물고, 접시 곁에 책을 놔두었다.
그리고 그 위에 호출기 하나를 올려두었다.
‘삐삐의 암호를 풀 수 있는 페이지는…….’
그는 과일의 껍질을 벗겨 책 사이에 꽂았다. 호출기의 사용법에 대해 적힌 페이지였다.
빵을 빠르게 먹어치운 그는 식당을 나섰다.
아마 수 시간이 지나면, 서혁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 식당에 찾아와 책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삐삐를 사용해 서혁에게 연락을 하겠지.
그 인질이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서혁은 그를 숨기려 하는 니케의 계획을 망가뜨리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일반인인 서혁은 니케에게 반항할 수단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짜고 있는 계획을 방해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머지는 그의 딸, 진희가 해줄 것이라 믿었다.
분명 진희도 바깥에서 니케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으리라.
“자,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누구도 대답해 주지 않는 적막한 저택에서 서혁은 즐겁다는 듯 웃었다. 이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즐기는 건 딸이나 아버지나 마찬가지였다.
* * *
“이게 무슨…….”
부단장 미카일은 모니터 속의 영상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의 부하인 마노가 다급히 불러 와봤더니, 상상도 못 한 영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가 전복을 노리던 테러범! 드디어 신상 공개!]
[파란 기사단이 노리고 있던 테러범의 정체를 여러분께 공개합니다.]
[구독, 좋아요를…….]
유무브에선 미카일의 얼굴이 대놓고 팔리고 있었다. 밝고 활기찬 내레이션은 미카일을 테러범이라 소개하며, 그를 찾는 사람에겐 파란 기사단의 감사와 선물이 있을 거란 이야기를 계속했다.
무슨 시청자 추첨 영상도 아니고, 가볍고 우스운 편집으로 미카일을 강조했다.
“이, 이 영상 못 내리나요?”
“못 내립니다. 신고해도 소용없을 거예요.”
분명 초상권, 저작권을 들이밀면 영상이 내려가긴 하겠지만, 미카일은 주민등록도 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가 아무리 온갖 마법에 능하다 한들, 인터넷에 게시된 영상을 내리는 편리한 마법을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세상에, 마야와 레인의 얼굴까지 나오다니…….”
“앞으로 던전 바깥엔 저 혼자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변장을 매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마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력을 숨기고 얼굴을 가리는 변장 마법은 마노의 특기 마법이었다. 하지만 워낙 세심한 마법이었기에, 한 번 사용하는 데 며칠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곤 했다.
“하필 이런 때에…….”
미카일이 그답지 않은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마야가 없는 상태에서 미카일의 행동반경은 제한되어 있었다. 헤르메스의 총서를 가진 마야는 게이트를 여닫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동료들의 이동을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납치된 그녀를 되찾기 위해 파란 기사단에도 협력을 구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게다가 선제공격을 가한 파란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저쪽도 제법 머리를 쓰는군요.”
마노는 마우스를 조작해 해당 채널을 돌아보았다. 국내 1위 헌터 채널이란 간판이 적힌 페이지에서 괴짜와 미카일의 얼굴이 대문에 당당히 걸려 있었다.
“도움을 구하러 간 게 오히려 하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안일했어요. 부모를 잃은 바제트 경이라면 당연히 제안을 받아들이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진희는 바제트가 아니었다. 그 당연한 사실을 또다시 깨달았다.
피차 다급한 상황이니 잠시 동안 동맹을 맺자는 제안을 깔끔하게 걷어찬 그녀는, 오히려 그 정보를 이용해 미카일에게 역공을 가했다.
“마야가 없으니 두 발로 걸어 다닐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얼굴까지 팔려버렸으니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게 되었군요. 외통수입니다.”
미카일의 허를 찌른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미카일은 생각도 못 한 공격에 분한 듯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이곳이 마법의 세계가 아닌, 과학의 세계라는 걸 깜빡한 그의 실수였다. 설마 적의 얼굴을 널리 퍼뜨려 대중까지 이 판에 참가하게 만들 줄이야.
“그래도 온갖 허위 제보가 난무할 테니, 저희가 가만히만 있으면 들킬 염려는 없을 겁니다.”
마노가 영상의 댓글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몇만 명의 사람이 제보하고 있었지만, 모두 거짓말뿐이었다. 다들 파란 기사단의 선물에 정신이 팔려 거짓 증언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움직일 수 없다는 건 마찬가지군요.”
“안타깝게도 그렇지요.”
미카일의 위치를 알게 된다면 진희는 만사를 제쳐 두고 달려올 것이다. 환생한 후의 행보를 살펴보면 뻔한 일이었다. 그녀는 한 번 죽이겠다 말한 적을 놔주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바제트와 달리 용서가 없었다.
“……단장님을 깨워야겠어요.”
“저번엔 아직 불가능하다 하셨잖습니까?”
“맞아요. 헤르메스의 총서로는 불가능했거든요.”
반신의 저주를 풀고 단장을 구할 방법은 진작 알아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이행하기 위해선 준비물이 필요했다.
“삼라만상이 필요해요.”
괴짜가 가진 삼라만상이 가장 중요한 준비물이었다.
“단장님의 환생체는 이미 확보해 뒀지만, 영혼을 일깨우기 위해선 그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괴짜를 찾으려 했지만…….”
금강, 이세영의 곁에 있는 괴짜와 만날 방법이 없었다. 미카일이 자신을 찾고 있는 걸 눈치라도 챈 듯, 괴짜는 이세영의 곁에서 딱 달라붙어 틈을 내주지 않았다.
진희가 브리온의 연구소를 습격한 그때, 그제야 허점이 보여 괴짜를 만나려 했지만 마야의 납치로 인해 발이 묶이고 말았다.
마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결국 괴짜를 찾아야 한단 말씀 아닙니까?”
돌고 돌아 원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마야를 찾기 위해선 괴짜를 찾아야 하지만, 그들의 전력으론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단장을 부활시켜 도움을 받고자 하지만, 그것도 결국 괴짜를 잡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마노의 물음에 미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말하는 건 괴짜의 삼라만상이 아니에요.”
총서란 온갖 책이나 이야기를 하나로 묶은 모음집을 뜻한다.
헤르메스의 14개의 마법 조항, 에메랄드 타블렛을 하나로 묶은 것이 ‘헤르메스의 총서’라면, 세상 만물의 진리를 하나로 묶은 게 삼라만상의 총서였다.
“괴짜가 가지고 있는 건 삼라만상의 총서이자 사본이에요. 애당초 삼라만상은 헤르메스의 총서처럼 뚜렷한 원본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삼라만상은 계속해서 기록되고 있는 지구의 일기 같은 거예요. 우린 그 일기를 기록하는 자를 찾는 겁니다.”
삼라만상은 사물과 현상, 그리고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형태 없는 기록이었다.
괴짜는 삼라만상의 사본을 20년 전에 획득했다. 어디서 그것을 얻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환생을 거듭해 온 미카일은 그 정체를 예상할 수 있었다.
“이야기를 수집하는 자. 세계의 운명을 기록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이라면 반신의 저주를 풀 수 있을 거예요.”
목표는 정해졌다. 단장만 돌아온다면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단장이 돌아오면…… 서진희를 칩니다.”
더 이상 진희가 활개를 치게 놔둘 순 없었다. 미카일의 눈에 서슬 퍼런 살기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