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47화
“넌 왜 여기 있냐.”
“여기 밥이 맛있어.”
식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와구와구 밥을 먹고 있는 정상진을 보며 진희가 물었다. 그는 진희가 시킨 일 때문에 한동안 보육원을 비웠다가 최근에서야 돌아왔다.
보육원에서 지내는 것도 아닌데, 틈만 나면 와서 애들과 장난을 치거나 밥을 먹고 돌아가곤 했다.
“오늘 반찬은…….”
역시나 밥이었다. 빵이 아님에 시무룩해하는 진희를 보며 지나가던 종혁이 말했다.
“그래도 오늘 점심은 샌드위치 나온다던데요?”
“그건 서한 씨가 좋아하는 거지,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야.”
“단장으로서 권력을 행사해 보지?”
서한의 말에 진희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흔들었다.
“원래 먹는 걸로 탄압하면 바로 탄핵당해요.”
“누가 널 탄핵하는데?”
“애기방의 애들. 저번에 몰래 요플레 두 개 먹었다고 사무실까지 쫓아와서 화내더라고요.”
“……하긴, 걔들은 무섭지. 도망치는 수밖에 없어.”
그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누가 잘못했어요, 저게 잘못했어요’ 떠들 땐 정말 귀를 막고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서한이 진희의 말에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정상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S급이 애들한테 도망치네.”
가람 보육원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한 광경이었다.
이윽고 카온이 진희의 밥을 퍼왔다.
소세지 볶음과 취나물무침, 버섯볶음, 소고기 뭇국, 현미밥. 여전히 한식다운 반찬이다.
“이거 버섯 맛있네. 무슨 버섯이야?”
“이 양반이 따온 거라, 저도 잘 몰라요.”
주방 여사님이 허허 웃으며 이주민을 가리켰다. 이주민 중 가장 어린 남자 이주민은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저번에 산책 나갔는데 식용 버섯이 좀 있더라고요. 그래서 캐왔어요.”
“이 근처에 버섯이 자라? 어딘데?”
“여기 앞 강 옆이요.”
“강이라면…….”
서한이 헉, 하고 입을 다물었다. 신림의 강가 근처는 온갖 몬스터의 사체와 부산물이 떠다니는 오염지대였다.
“괜찮습니다. 독은 없습니다.”
이미 독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봤다는 카온이 무덤덤하게 버섯을 씹었다.
“…….”
용인은 괜찮을지 몰라도, 일반인에겐 부담되는 식재료였다. 진희와 서한은 말없이 버섯을 접시 구석으로 치우고 식사를 시작했다.
* * *
“우리 목표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어요.”
아침 식사에 이어진 브리핑은 PD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느새 기사단의 참모 역할이 된 그녀는 단원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브리온의 몰락, 그로 인한 방위대의 권력 선점, 테러범들의 타도와 이주민 구출. 하지만 여기에서 추가된 게…….”
“금강이지.”
PD가 눈치를 보는 듯하자, 서한이 PD의 말을 대신해 주었다.
“……맞습니다.”
금강의 배신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브리온과 금강이 한통속이었던 사실을 알게 된 지금, 기사단의 가장 강한 우방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금강은 이제 더 이상 아군이 아닌 적군으로 봐야 했다.
“세영 씨에겐 연락 없죠?”
“없어. 녀석한테도 생각이 있겠지.”
서한은 세영의 이상주의를 의심하지 않았다. 세영이 이토록 썩어버린 금강을 가만둘 리 없었다. 적어도 적이 될 일은 없을 것이란 서한의 말에 PD가 다행이라는 듯 말을 이었다.
“그나마 괜찮은 소식이네요. 완전한 적이 아니란 건 대응할 방법이 남아 있단 소리니까요.”
PD는 기사단의 전력을 무시하지 않았다. 한쪽으로 치우쳐지긴 했지만, 진희를 필두로 한 간부들의 힘은 이미 대기업들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S급 헌터 둘을 아이 다루듯 죽이고, 클로이와 함께 수많은 헌터를 물리친 진희의 무력은 이미 인외의 경지였다.
하지만 금강과의 싸움은 무력이 아니라 자본, 혹은 정치의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기사단에겐 아직 금강과 맞설 만한 권력이 부족했다.
“그래도 다행히 명분은 우리 쪽에 있어요.”
PD는 인터넷에서 떠도는 파란 기사단의 반응에 대해 알려주었다.
파란 기사단의 이름값은 천정부지로 솟구치고 있었다. PD의 채널에 방영된 영상은 세계로 퍼졌고, 공중파 뉴스에서도 심심찮게 기사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최근 보육원에 틀어박혀 일만 하던 진희는 실감이 나질 않았지만,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내내 흥분에 차 자랑하곤 했다.
“아직 연구소의 영상을 브리온이라고 밝히진 않았지만, 인체실험까지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여론은 충분히 달궈졌어요. 당장에라도 브리온을 공격할 수 있어요. 금강이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언론에서 파란 기사단은 정체불명의 기업의 악행을 막는 정의의 단체로 그려지고 있다.
거기에 진희의 업적이 드러나며 신흥 강자로 떠오르는 판국이었다.
“하지만 지금 공격하진 않을 거야.”
진희는 PD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이세영의 의견도 들어봐야 하고, 당장 급한 게 생겼거든.”
“괴짜의 행방이죠?”
“응, 금강은 당장엔 움직이지 못한다고 하니까.”
연구소의 파괴에도 브리온과 금강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이영한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서한은 금강이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 단언했다.
진희가 설명해 달란 뜻으로 턱짓하자, 서한이 자신을 바라보는 단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이영한 회장의 몸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인 것 같아.”
“지병인가요?”
“정확히는 몰라. 하지만 믿을 만한 정보통이 그렇게 말하더군.”
서한도 회사 생활을 허투루 한 건 아니었다. 지금도 금강 안에선 그의 충실한 부하들이 남몰래 금강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었다.
가장 주목할 소식은, 이영한이 아직도 병원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머니의 증언도 있으니까 확실한 정보야.”
“아프다곤 해도 명령 정돈 내릴 수 있지 않나요?”
“그렇긴 하지만, 그 명령에 따를 만한 사람이 별로 없거든.”
서한이 한국 본사를 책임지면서, 이영한은 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했다.
유럽의 진출은 세영에게 맡기고, 본인은 중국과 미국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금강의 S급, A급 헌터는 내가 스카우트하거나 키운 사람들이야. 이영한 회장의 직속 헌터들은 모두 중국과 미국에 가 있어. 그쪽 사업을 접을 게 아니라면 함부로 빼 오진 못하지. 국내의 헌터들에게 명령한다 해도, 내게 미리 알려주긴 할 테고.”
서한은 부하들을 신뢰하고 있다. 다소 안이한 생각에 PD가 괜찮냐는 듯 진희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진희와 곁에 있던 현성도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육원에서 장난스러운 모습을 많이 보여서 그렇지, 금강의 서한은 존경할 만한 인물이었다.
“브리온의 카트리지도 다시 만들지는 못할 거예요. 그건 확인했어요.”
가만 듣고 있던 유나가 말했다.
“영혼 추출기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건 두 가지예요. 하나는 해저 던전에서 채굴되는 수정, 다른 하나는 이주민들의 혈액. 해저 던전은 관리자가 죽음으로서 폐쇄됐고, 이주민들은 우리가 모두 구출했으니 만들 방법은 없을 거예요.”
물론 브리온이 새로운 추출기를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그건 기적 이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며 유나는 단언했다.
“그런 기술이 있었다면 카트리지를 만들 게 아니라 헌터 인조인간을 만들었겠죠.”
각자의 의견이 교환되고, 우선순위가 정해졌다.
“괴짜를 찾아 인질을 되찾는다.”
“거기에 테러범의 동료도 있다고 했죠? 괴짜를 우리가 먼저 잡기만 한다면 일석이조네요.”
“하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정보가 부족해요.”
현성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금강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서혁마저 납치된 지금 기사단의 정보는 오직 PD와 헌터 길드에 의지해야 했다.
PD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여론과 인터넷 안에서의 이야기들뿐이고, 헌터 길드는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다. 카트리지 오용으로 인해 늘어난 사망자들의 관리와 비인증 헌터의 수색 때문이다.
괴짜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니, 인터넷 조사로는 한계가 있었다. 사람이라도 뿌려 찾아보기엔 기사단의 수는 너무 적었다.
방법을 찾기 위해 회의가 잠시 정체되던 중, 문득 이선이 입을 열었다.
“꼭 우리가 찾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응?”
“사람을 쓰면 되잖아요.”
“헌터를 쓰잔 이야기야?”
“아니요, 그럼 돈이 너무 많이 드니까요. PD님의 힘을 빌리는 거예요.”
이선의 말에 PD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힘을 빌리는데요?”
“유무브에 다 올려버리죠.”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이선이 설명을 덧붙였다.
“PD님의 채널 조회수는 수천만을 찍잖아요. 헌터에 관심이 있는 대중은 대부분 보는 채널이니까요. 그럼 거기에 아예 공개수배를 해버리는 거예요.”
“괴짜를?”
“괴짜뿐 아니라, 테러범까지요. 지금껏 우린 모습을 감춰야 했고, 브리온을 기습한다는 것 때문에 비밀스럽게 움직였지만…… 이제 그럴 필요 없잖아요?”
그도 그랬다. 파란 기사단의 최근 활동 방향은 힘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혼란스러운 헌터 시장에서 본모습을 드러내, 새로운 강자로서 자리를 차지하는 게 목적이었다.
굳이 모습을 숨겨가며 활동할 이유가 없었다.
“괜찮은데요?”
현성이 턱을 괴며 이선의 말에 동의했다.
“우리가 먼저 대중에 괴짜에 대한 정보를 퍼뜨린다면, 괴짜로선 대응할 방법이 없을 겁니다. 그간 빌붙어 살았던 이세영도 괴짜와 결별했고, 국내에서 괴짜의 편을 들어줄 사람도 없어요.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건 지명수배자들에게도 곧잘 사용되는 방법이고요.”
얼굴과 신상이 알려진 지명수배자들은 주변 사람들의 눈을 피하다, 결국 자수하거나 들켜 체포되곤 한다. 이 단순한 방법을 지금껏 깨닫지 못한 게 우스울 지경이었다.
현성은 진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반대할 사람도 없습니다. 일반인이라면 인권이나 초상권 문제도 있겠지만, 괴짜는 불법입국자에요. 그 누구도 괴짜의 입장을 대변해 주지 않을 겁니다.”
“꼭 우리가 악당 같네요.”
“아뇨, 모두가 우리 편을 들 겁니다. 우리야말로 정의니까요.”
진희가 곧잘 했던 말이었다. 현성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고, 진희는 마주 웃음을 터뜨렸다.
* * *
“당신 진짜 대단하구나.”
괴짜 니케는 서혁이 조사한 결과를 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서혁의 컴퓨터를 통째로 뜯어온 니케가 그의 컴퓨터 안의 정리된 파일을 쪽 훑어보며, 몇 번째인지 셀 수 없는 칭찬을 보내왔다.
“작은 단서 하나로 유추해 나가는 과정이 무슨 추리 만화 수준이네. 당신 추리 작가 하면 잘하겠다.”
“개소리 그만하고, 적당히 보시지? 너 보라고 준비한 게 아니거든.”
서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는 지금 괴짜가 준비한 정체불명의 저택에 감금되어 있는 상태였다.
밖으로 나가는 문이 존재하지 않는 이 괴이한 저택에서 벌써 일주일 동안 나가지 못했다.
식사는 꾸준히 준비해 주지만, 어떤 통신도 되지 않는 이곳에서의 생활은 서혁에겐 감옥과도 같았다.
“당신 나랑 일해 볼 생각 없어? 나 돈은 좀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