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46화
미카일의 얼굴이 사색이 되는 걸 보며, 진희가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마법을 본 게 벌써 3번째야. 아무런 준비도 안 했을 것 같아?”
진희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헌터 길드 김유나’와 통화 중이었다.
-영혼 추출기를 이용해서 추적기를 좀 만들어봤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네요.
“무슨…….”
스피커 폰으로 바뀐 휴대폰에서 유나의 오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천재거든요. 티끌만 한 마력에도 영혼의 고유 특징이 담긴다는 걸 알게 되었답니다. 당신의 위치를 추적하는 건 이제 일도 아니에요.
마치 혈흔, 타액으로 DNA를 추적하는 것처럼, 마력에도 영혼의 기운이 담긴다는 걸 알게 된 유나의 작품이었다.
“자.”
진희가 휴대폰을 끄고 미카일에게 말했다.
“안 도망가? 곧 잡으러 갈 건데?”
미카일의 모습이 아무런 대답도 없이 사라졌다. 마법을 중지시킨 것이다.
꽁지 빠져라 도망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진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기다려, 너도 결국 내 손안이야.”
* * *
“지부장님, 괜찮으십니까?”
“들어오세요.”
세영은 초췌한 안색으로 대답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세영을 보필하는 비서였다. 그는 세영의 얼굴을 보고 낮게 한숨을 내쉬곤, 들고 있던 쟁반을 세영의 책상 위에 올렸다.
즐겨 먹던 빵과 홍차가 담긴 쟁반을 보며, 세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제가 잘못한 걸까요?”
“…….”
비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략적인 상황은 전해 들었다. 세영이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괴짜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이곳에서 지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괴짜는 모든 단서를 없애버리고 잠적했다.
나름 괴짜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던 세영에겐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 모든 게…… 괴짜와 회장님의 계획이었어요.”
세영은 유능한 인물이었다. 지혜와 지능, 헌터로서의 실력, 카리스마,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는 리더였다. 비록 이상주의적 사고로 미움받는 일이 잦았지만, 그녀가 정의롭고 능력 있단 이야기를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세영이 처음으로 패배를 직감했다.
이영한이 브리온에 대해서 말하는 순간, 자신의 모든 행적이 이영한의 손에 이뤄진 것이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어리석었다. 다른 이들의 머리 위에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제 정의는 어디 갔죠?”
헌터를 영웅으로 만들어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세영의 꿈은 실패했다.
금강은 세영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부패한 조직이었고, 그 적폐를 몰아내기 위해서 세영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영한에겐 운명을 볼 수 있는 삼라만상이 있었고, 수많은 헌터를 가졌다.
악당 브리온을 무너뜨린다 한들 이영한의 뜻대로 놀아나는 셈이고, 금강을 무너뜨리기엔 버려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후계자란 직책, 세영의 정의, 세영을 따르는 동료들, 모든 게 금강의 안배에서 태어난 것들이었다.
“이사님은…… 어떻게 나갈 수 있던 걸까요?”
그러나 서한은 그 모든 걸 버리고 떠났다. 자신보다 따르는 부하들이 많았고, 보다 유력한 후계자였던 그는 진희에게 달려갔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동시에 부러웠다. 서한을 따라가기엔 세영에게 남겨진 짐이 너무나 많았다.
“세영 아가씨.”
비서가 부드럽게 그녀를 불렀다. 세영의 메마른 눈을 바라보며, 비서가 어렸을 때 세영을 불렀던 것처럼 다정하게 말했다.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면 됩니다. 다른 이와 비교하지 않아도 돼요.”
비서가 본 세영은 대단한 아이였다.
어린 나이에도 후계자 수업을 착실히 받고, 둘째와 성벽이란 디메리트를 모두 이겨내고 당당히 유럽 지부의 지부장이 되었다.
갖은 역경에도 자신의 이상을 무너뜨린 적 없었고, 현실 속에서도 정의를 갈구하며 많은 사람을 구해냈다.
“당신이 금강의 후계자라 한들, 당신이 이룩한 일들이 모두 거짓이 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회장님이 모든 걸 계획했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 계획을 따라 당신의 정의를 버릴 생각인가요?”
“……아니요.”
비서는 차분히 주머니에서 한 수첩을 꺼내 내밀었다.
“제가 본 당신은 누구보다 정의롭고, 올바른 분이십니다. 자신을 좀 더 믿어보세요. 당신이야말로 금강을 바꿀 마지막 후계자니까요.”
“이건…….”
세영은 비서가 내민 수첩을 폈다. 그 안엔 온갖 정보가 한가득 적혀 있었다.
모두 이세영에 대한 정보였다. 그녀가 언제 잠을 자고 일어나는지, 무슨 프로젝트를 계획했으며, 어떤 인물을 포섭하려 하는지, 온갖 것이 빼곡하게 기록되었다.
“당신, 설마…….”
세영이 떨리는 눈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 비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 이영한 회장님에게 고용되었습니다. 아가씨를 보필해서 모든 걸 회장님께 보고하라고 파견되었지요. 하지만 그 역할을 그만두려 합니다.”
이 수첩은 이세영의 정보뿐 아니라, 이영한의 설계와 계획에 대해서도 낱낱이 적혀 있었다.
“이세영 지부장님, 전 당신의 비서이니까요.”
이영한이 직접 부리는 부하란 이야기는, 곧 이영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란 뜻이다.
어릴 적부터 자신을 도와준 그가 이영한의 스파이였단 건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세영의 얼굴에 잠깐 동안 좌절과 절망이 감돌았지만, 이내 이겨냈다.
비서가 어떤 의도로 말을 꺼낸 것인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그의 딸인 세영조차도 알 수 없었던 세세한 정보들을 내려다보며 비서가 말했다.
“반격하시겠습니까?”
이건 비서가 세영을 인정했다는 증거이자, 세영을 위해 자신의 직책을 버릴 각오를 한 권유였다.
이영한에 대한 패배감, 자신의 무력함에 후회하던 세영이 천천히 수첩을 덮었다.
자신의 세상이 무너졌다 한들, 자신의 정의가 퇴색될 이유가 되진 못한다.
“……물론이죠.”
“그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금강을 무너뜨리고, 그 위에 세영의 정의를 세우기 위하여. 어느새 눈빛이 돌아온 세영이 말했다.
“적폐를 색출합니다. 괴짜의 행방, 이영한 회장의 근황, 이서한 이사의 계획, 삼라만상의 기능. 모든 조사에 총력을 기울이세요. 숨길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이영한과 척을 질 거라면, 더 이상 눈치 볼 필요도 없었다.
금강이 아니더라도 세영이 가지고 있는 눈과 귀는 수를 헤아릴 수 없다.
“후계자는 접니다.”
다이아몬드의 왕좌에 앉아 모든 걸 청소할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다.
세영의 명령에 비서는 순응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32. 휴일
해야 할 일이 늘었지만, 일상이 특별히 바뀐 건 아니었다. PD와 유나, 현성은 매우 바빠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지만, 다른 단원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현성과 PD가 찾은 괴짜의 단서들을 조합하고 있던 진희는 마침 찾아온 서한에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요.”
“밥은 먹었냐?”
“이제 먹어야죠.”
“같이 가지.”
“으음.”
하지만 일상에서 달라진 게 있으니, 다름 아닌 서한의 생활이었다.
그는 금강에서 나오면서 아예 보육원에 눌러살게 되었다. 더 이상 금강에 출근할 필요도 없었고, 가끔 과거의 부하 직원들을 만나기 위해 외출하는 것 말곤 수련과 던전 공략에만 열중하는 일상을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진희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좀 편하긴 하다.’
그리고 서한은 자연스럽게 진희를 찾아왔다. 서한은 마치 비서가 된 것처럼 진희의 일을 도와주었다. 문서 작업부터 정보를 조합하는 일, 나중에 가선 단원들의 인사 평가나 월급 지급에도 손을 뻗쳤다.
말한 적 없지만, 서한은 이런 면에서 굉장히 유능했다.
그는 의외로 문서 작업에 재능이 있었고, 진희와 다르게 매우 꼼꼼했다. 다소 직감적으로 일하는 진희와 달리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매뉴얼을 만들어 일을 단순화시키곤 했다.
현성이 하나의 일에 진득하니 집중하는 타입이라면, 서한은 많은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걸 즐겨 했다.
어느 쪽이든 장점이 있었지만, 일단 확실한 건.
“이거 서류 틀렸어. 날짜 보면 순서가 바뀌었잖아.”
“아차.”
“너 이거 세 번째다.”
“까다롭게 구시네.”
진희는 서류 업무에 재능이 없단 사실이었다.
분명 예전에 취업한 적이 있다 보니 서류 업무는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그 수가 늘어나니 실수도 만만치 않게 생겼다.
진희는 비서를 끼고 일한 게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그 비서가 자신의 실수 하나하나를 다 수정해 주니 이렇게나 편할 줄 몰랐다.
“서한 씨는 그냥 회사에서 일해도 잘했겠어요.”
“당연하지. 난 유능하니까.”
“자기 입으로 말하네…….”
“너도 곧잘 네가 매력적이라고 말하잖아.”
“그건 사실이니까 상관없잖아요.”
“야, 그럼 내가…… 후우, 아니다. 됐다.”
이 소재로 빠지면 결국 지는 건 자신이란 걸 잘 알기에, 서한이 화를 참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마스터.”
그때 마침 복도에서 카온이 나타났다. 그도 아침 식사 시간이라고 진희를 부르려던 참이었다. 최근 서류 업무가 밀려 있던 진희는 새벽에 일어나 업무를 보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에, 시간에 맞춰 카온이 찾아와 식당으로 데려가곤 했다.
“……빨리 기상하셨군요.”
“신현성이 나간다고 난리 피워서 같이 깼거든.”
“평소에도 빨리 일어나시면 될 텐데 말입니다.”
“난 저녁 늦게까지 일하느라 바빠.”
서한과 카온 사이엔 미묘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이 사이에 현성이 있었겠지만, 그는 일이 바빠 새벽부터 바깥으로 나갔다.
“곧바로 식당으로 가시지, 왜 이곳에 오셨습니까?”
“단장님께서 일이 서툴러서 도와주러 온 거다.”
“꼭 지금 이 시간에 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 이선이 오면 알아서 할 겁니다.”
최근 B급의 문턱까지 오른 이선은 쉬는 시간마다 곧잘 찾아와 진희를 돕곤 했다.
“내가 돕는 게 더 확실하니까.”
“글쎄요, 흑심이 없었다면 좋았겠습니다만.”
서한과 카온의 대화는 점점 더 열기가 돌았다. 이대로 놔두면 밥 먹기도 전에 대련 한 판 하자고 나갈 것 같아, 진희가 한숨을 쉬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기요, 좁은 복도에서 근육 둘이서 서 있지 말아줄래요? 지나가기 힘드니까.”
그리고 그 사이를 의도적으로 부딪히며 지나갔다. 장난스럽게 둘의 허리를 토닥이는 진희의 손에 서한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야.”
“요즘 노느라 살쪘으니까 살 좀 빼는 게 어때요?”
“그거 근육이랬지.”
“말론 누가 못해.”
“너 정말…….”
서한과 카온이 말을 잃자 진희가 히히 웃으며 복도 건너편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이를 간 서한이 카온과 눈이 마주쳤다.
“…….”
“크흠.”
결국 둘은 말없이 진희를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왠지 모르게 허리춤이 의식된 카온과 서한은 서로 모르게 배를 매만졌다.
‘아니야.’
‘역시 아니잖아.’
아직 탄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