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45화
병원에 있었다고 해도 전해 들은 게 없던 것은 아니었다. 금강과 브리온에 대해 얼핏 들었던 소라가 조심스럽게 물었고, 진희는 걱정 말라는 듯 웃어 보였다.
“금강에서 잘렸대.”
“엑.”
“이제 백수라서, 내가 고용했어.”
“…….”
그게 그렇게 되나? 소라가 고개를 기울이며 진희의 말뜻을 해석하고 있을 때, 곁에 있던 종혁이 새된 목소리로 물었다.
“시, 시영이는요? 시영이는 괜찮아요?”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세영과 시영에 대해선 묻지 못했다. 서한은 금강을 나왔다지만, 이상주의자였던 세영도 금강에 붙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후계자이긴 하지만 막내이기에 행동이 자유로웠던 시영의 행방은 듣지 못했다.
“안 그래도 보육원에 오지 않은 지 꽤 됐거든요.”
“으음, 잠깐만.”
진희는 서한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시영이는 괜찮냐는 물음에, 서한은 곧장 답장을 주었다.
[괜찮긴 한데, 바로 오긴 힘들 거야. 걔도 눈치 보는 중이니까.]
“괜찮다고 하네. 시간이 지나면 다시 놀러올 거래.”
“휴우, 다행이네요.”
종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시영은 가족이란 화제에 민감한 아이였다. 서한이 나가고, 친하지도 않은 세영과 둘이 남은 시영이 걱정되던 종혁의 모습에 진희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민혁아. 유나도 너 찾던걸.”
“…….”
“약속 안 지켰다고 날뛰더라. 뭐 약속한 거 있어?”
민혁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참담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같이…… 놀러 가자고 했습니다.”
“응? 데이트야?”
소라가 묻자 민혁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부정했다.
“헌혈하자고 했어. 같이 좋은 일 하자고.”
“어…….”
그 메드 사이언티스트가 뜬금없이 헌혈 이야기를 할 리 없었다. 소라와 종혁은 헛기침을 하고 민혁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유나에게 부탁한 것이 여럿 있어, 민혁을 내세워 얻어낸 게 많았던 진희도 휘파람을 불며 딴청부렸다.
“아, 그리고 한 달 정도 남았잖아. 퇴소하는 날.”
“맞아요.”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보육원에서 퇴소한다. 진희의 말에 새삼 퇴소 날짜가 떠오른 아이들이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퇴소 기념으로 파티라도 할까? 연시이기도 하고, 기념할 게 많은 날이니까.”
새롭게 들어온 기사단원들의 환영식과 아이들의 퇴소식, 그리고 등급이 올라간 단원들의 축하도 겸할 연회를 떠올렸다.
그간 바쁜 일정 때문에 단원과 아이들이 모여 놀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진희의 말에 아이들은 반겼고, 구체적인 날짜가 정해지면 알려주겠다고 말한 뒤 아이들을 돌려보냈다.
“애들이 순수하군요.”
“그렇지?”
그때, 보육원의 대문 곁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희는 놀란 기색 없이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했다. 부단장, 미카일이 그곳에 서 있었다.
“또 그 마법으로 나타났네.”
“당신의 앞에 본체로 나왔다간 죽을 게 뻔하니까요.”
“잘 아네.”
진희의 웃음기 어린 대답에 미카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회랑을 사용했다면, 당신의 사후 기억도 살펴보았겠군요.”
“맞아. 네가 괴짜와 제니트의 곁에서 바제트를 되살려 제국을 멸망시킨 거까지 봤어.”
“절 원망하십니까?”
“별생각 없는데?”
물론 원한이 없다는 건 아니었다. 미카일은 자신을 배신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 중 하나였으니, 곁에 나타난다면 사정없이 목을 벨 정도의 감정은 있었다.
“원망은 기대했을 때 나타나는 감정이지, 내가 너에게 가질 건 아니야.”
“전 당신에게 기대조차 받지 못했나 보군요.”
“새삼스럽지.”
부단장의 정치질엔 이골이 난 바제트였다. 진희의 말에 미카일이 헛웃음을 지었다.
“좋습니다, 차라리 이야기하기 편해서 다행이군요.”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려고 또 찾아온 거야?”
“말이 험하십니다. 당신을 위한 충고였는데 말이죠.”
미카일의 입장에선 연구소를 습격하지 말라던가, 이서한을 주의하란 이야기 모두 진희를 위한 충고였다. 바제트가 돌아왔을 때의 후폭풍이 얼마나 될지 예상조차 힘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건넨 충고였으면서, 미카일은 마치 진희의 편인 것처럼 말을 꾸며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네 충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었으니까.”
“흠.”
서한은 돌아왔고, 바제트로 변하는 일도 없었다. 결국 미카일의 충고는 오지랖이 된 격이었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당신을 위한 제안입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지요. 당신과 저를 위한 제안입니다.”
“제안?”
“네. 괴짜, 니케 로만을 치고 싶습니다.”
진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알기론 괴짜와 미카일은 공범이었다. 서로 뜻을 같이하는 동료인 줄로만 알았는데, 미카일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건 경멸에 가까웠다.
“제가 괴짜와 손을 잡은 건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서입니다. 괴짜 또한 마찬가지겠지요. 전 당신의 동생 제니트의 소망을 이뤄주려 했고, 괴짜는 당신의 부활을 바랐습니다. 그 두 소망이 겹쳤기 때문에 같이 활동한 것뿐입니다.”
“그걸 어떻게 믿어?”
“믿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현재 제가 괴짜의 행방을 찾아야 하고, 당신도 괴짜를 공격해야 한다는 목표는 같습니다.”
“……계속 말해봐. 넌 왜 괴짜를 쫓고 있는데?”
“괴짜가 제 동료 마야를를 납치해갔습니다.”
그리고, 하고 미카일이 말을 끊었다.
“당신의 아버지인 서혁 또한 납치했습니다.”
“……뭐?”
이건 듣도 보도 못한 소리였다. 진희의 얼굴을 본 미카일이 역시나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연락해 보세요. 받지 못할 테니까.”
진희는 곧장 휴대폰을 들어 서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엔 통신음이 세 번 울리기 전에 반드시 전화를 받던 그가, 부재중이란 메시지가 나올 때까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야는 헤르메스의 총서를 가진 아이입니다. 게이트를 만들고, 던전을 드나드는 능력을 가졌지요. 괴짜는 마야를 납치하여, 당신의 아버지인 서혁에게 게이트를 열었습니다.”
“……은신처를 찾아낼 순 없었을 텐데?”
서혁의 은신처는 정부는 물론이고 금강마저도 찾아낼 수 없던 비밀스런 장소였다. 서혁은 평소에 집이 아니라 그의 은신처에서 일을 하곤 했다.
“괴짜를 무시하지 마세요. 삼라만상에 허점이 있다 한들, 한 사람의 자취를 쫓는 것 정돈 쉬운 일입니다.”
“대체 그 삼라만상이란 게 뭔데? 뭔 능력이 그렇게 잡다해?”
“열람하는 것만으로 정신이 마모되지만, 세상의 모든 사실이 기록된 일기라고 보면 됩니다. 금강이 지금껏 성장한 것도 삼라만상의 지분이 없잖아 있으니까요. 물론 제약은 많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하고 미카일이 말을 이었다.
“삼라만상은 과거를 살피는 건 가능하지만, 미래의 경우 방향을 제시해 줄 뿐 구체적인 예측은 불가능합니다. 만능은 아니지요.”
“세상 과거를 다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데?”
“그마저도 사용할 때마다 영혼이 뒤틀리는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괴짜도 영혼의 손상을 각오하고 읽는 겁니다.”
“흐음.”
“하여튼, 괴짜가 당신 아버지를 납치한 건 사실입니다. 저도 마야를 되찾고 싶습니다. 동맹을 맺지 않겠습니까?”
진희가 물끄러미 미카일을 바라보았다. 전생에서도 자신을 배신했던 그를 무슨 근거로 믿을까? 오히려 의심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왜 직접 움직이지 않고, 진희의 도움을 바라는 걸까?
진희는 미카일의 권유에 대해 대답하기 전에,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려 했다.
물론 그녀의 아버지가 정말로 납치되었다면 구해야 했다. 하지만 미카일의 도움이 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미카일은 왜 진희와 움직이고 싶어 하는 걸까? 진희는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도중,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네 동료 중에 강한 애가 없었지?”
레인은 고작해야 A급 마법사였고, 마야는 게이트를 만드는 것 말곤 특별한 재주가 없었다. 빼어난 환영 마법을 쓰는 마법사가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가 전투에 나선 적은 없었다.
테러범들의 전적을 살펴보면 특이한 마법을 사용한 적은 있었지만, 대규모 전투를 벌인 적은 드물었다.
게다가 미카일도 무력이 강한 이는 아니었다.
당시에도 부단장에 걸맞은 실력을 지닌 기사였지만, 바제트와 비할 바는 아니었다.
“너 자신 없구나?”
진희가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미카일은 반박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었다. 미카일의 집단은 진희의 기사단처럼 무력이 강한 무리가 아니었다.
“네, 하지만 당신에겐 없는 힘이 있죠.”
그럼에도 미카일은 당당했다. 그들에겐 다른 세계에서 가져온 마법과 영혼을 다루는 기술이 있었다.
“당신의 강함은 인정합니다만, 힘만으로 괴짜를 찾을 순 없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가능하죠.”
“아하. 네가 괴짜를 찾아내면, 내가 공격해서 납치된 사람들을 구한다는 작전이야?”
진희가 하하, 웃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지랄하네. 날 호구로 보냐?”
“…….”
결국 궂은일은 진희에게 맡기고, 자신은 뒤에서 구경만 하겠다는 이야기였다. 미카일의 수법을 생각하면 결국 노른자위는 본인이 다 가져가고, 진희는 헛고생만 하게 될 게 뻔했다.
“내가 널 한두 번 겪어보는 줄 알아?”
진희가 미카일의 환영 앞에 다가갔다. 실제 몸이 있었다면 호흡이 닿을 위치까지 다가간 그녀가 말했다.
“같잖은 수작 부리지 마. 너와 동맹을 맺을 생각은 조금도 없어.”
“당신의 아버지를 버릴 셈입니까?”
“그딴 협박이 먹힐 것 같아?”
진희가 손을 뻗어 미카일의 목을 휘감았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적은 다 죽여 버리면 그만이야.”
“당신은…….”
“클로이가 그랬던 것처럼.”
클로이란 단어에 미카일이 잠깐 숨을 멈췄다. 루아 라바다, 그와 진희처럼 환생자이며, S급 수준의 힘을 가지던 신성 기사.
“그녀도 죽였습니까?”
“응.”
“……당신을 존경하고 있었을 텐데요.”
“존경이나 사랑이 면죄부가 되진 않아. 허락 없는 감정은 부담일 뿐이거든.”
“잔인해졌군요, 당신은.”
“진작 이렇게 살았어야 했는데 말이야.”
미카일이 조금 질린 듯 중얼거리자 진희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과거와는 달랐다. 자신을 존경하는 기사단원을 위하던 바제트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너도 마찬가지야, 미카일. 다음 차례가 네가 되고 싶지 않다면 주둥이 간수 잘 하도록 해.”
“괴짜를 혼자 찾을 셈입니까?”
“난 혼자가 아니야. 너보다 유능한 단원들이 넘쳐나거든.”
금강과의 연결이 끊겼다 한들, 기사단엔 남은 수가 있었다. 결국 미카일은 물러났다. 환영임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물러선 그가 한숨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동맹은 없던 일로 하죠. 더 이상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으니까요.”
“…….”
“알아서 잘 해보십시오. 당신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그때, 진희가 미카일의 말을 끊었다.
“위치가 양천구, 그리고 목동 주변이네.”
“……네?”
“생각보다 먼 곳은 아니구나. 하긴, 이런 복잡한 환영마법을 멀리서 사용할 수 있을 리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