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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143화 (143/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43화

“이상하다 했어. 기억을 모두 되찾으면 지금의 자신이 사라지고 만다며? 클로이, 너도 기억의 회랑을 보고 영혼이 교체된 거지? 전생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야.”

“교체된 게 아니에요. 전 제 자신을 되찾았을 뿐이에요.”

“그거나 이거나. 뭐, 그리고 그 회랑을 손에 쥐여 준 건 괴짜일 테고.”

“…….”

돌아가는 상황이 대충 짐작이 갔다.

“괴짜의 의도대로 회랑을 되찾은 네가 루아 라바다로 교체되었고, 제니트가 망명되면서 괴짜를 만난 적 있는 넌 녀석이 지구에도 있는 걸 보고 그 녀석과 함께하기로 결심했겠지.”

“잘 아시네요.”

“짐작이 가거든. 괴짜가 어떤 말로 널 꾀어냈을지.”

진희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나른한 인상에 어울리는 비겁한 웃음이었다.

“뻔하지. 그 아름답고 매력적이던 바제트를 다시 만날 수 있다. 서진희도 회랑을 사용하면 너처럼 교체될 것이다. 그리고 영웅처럼 이 세상을 정복할 거다…… 그런 느낌이겠지. 괴짜는 과거에도 바제트를 한 번 되살려낸 경험이 있으니까.”

“와, 자기 입으로 아름답다고 그랬어.”

“입 놀리지 말고 치료하라고 했는데 말이죠.”

진희가 현성을 쏘아보았다. 이미 한껏 긴장이 풀린 현성은 여우스러운 눈매로 여유롭게 웃었다.

“그리고 이후엔 괴짜가 하란 대로 움직였겠지. 서한 씨한테 접근해서 연구소의 정보를 뿌리고, 브리온을 대적하게 만들었어. 브리온은 애당초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으니 적으로 삼기에도 안성맞춤이었고. 마침 적룡 기사단원들이 건전지로 사용되는 기밀도 손에 얻었고.”

그것도 괴짜가 알려줬을 테지.

진희의 말에 클로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긍정의 침묵이란 걸 아는 진희가 팔짱을 풀고 허리춤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이봐, 서진희! 대체 내가 얼마나 불렀는데…….]

“솔직히 네가 바제트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선 조금도 짐작이 안 가긴 하는데. 뭐, 어쩌겠어. 인기인의 숙명이겠지. 스토커가 따라붙는 건.”

바르그의 다급한 외침을 무시하고, 다시 한번 웃으려는 현성을 째려보는 것으로 입을 다물게 만든 진희가 검 끝으로 클로이를 가리켰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바제트도, 나도 널 좋아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거든. 그리고 네 생각따라 영웅 노릇 해줄 생각도 없어. 난 내 멋대로 사는 게 좋아.”

“……거짓말. 거짓말이야. 그럴 수 없어요. 바제트 경은, 기사란 말이에요.”

“바제트가 기사? 기사였었지. 죽기 전까진. 죽으면 기사고 뭐고 없어. 언데드가 된 채로 꼴사납게 떠도는 바제트를 죽인 게 나거든. 적어도…….”

진희가 윙크하며 농담을 건넸다.

“그때 바제트는 기사가 아니라 산송장이었어.”

“……이익!”

자신의 우상을 욕보이는 진희에게 클로이가 달려들었다. 감정적인 공격이었지만, 현성과 싸웠을 때처럼 체계적이고 수준 높은 검술을 선보였다.

“왜 그렇게 화났어?”

“바제트 경을 욕보이지 마세요!”

“아하하, 재밌네. 환생한 내가 듣기엔 재밌는 농담이야.”

그러나 그 대단한 클로이의 검술도 진희의 앞에선 무용지물이다.쌍검이 선보이는 태풍과 같은 검술을 모두 막아낸 진희가 덧붙였다.

“근데 바제트가 돌아오면 뭘 어쩌려고 그랬어? 사랑 고백이라도 하려고?”

“바제트 경이라면 금강에게 복수할 겁니다! 이서한과 이영한에게 정의의 형벌을 내리고, 제국에게 복수했던 것처럼 금강과 브리온을 멸망시킬 테니까요!”

“아하하하!”

진희는 그야말로 박장대소를 했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클로이의 검술을 여유롭게 막아낸 그녀가 다시 한번 물었다.

“아하하! 그래서? 바제트가 왜 복수할 거라 생각한 거야?”

“영웅이니까요!”

휘몰아치던 쌍검의 뒤를 이어 현란한 체술이 진희를 압박했다.

“영웅전에 나오는 것처럼, 1부와 2부처럼! 케네스와 황제를 죽인 바제트 경이라면, 이서한과 이영한을…….”

“아하하하하!”

진희는 침을 튀겨대며 웃었다. 웃다가 구토라도 할 것 같은 진희를 보며 현성은 ‘와, 너무한다’고 중얼거렸다.

“영웅전? 뭐야, 삼국지야? 아니면 그리스 신화?”

“다, 당신…….”

“너 초등학생이니? 아님 중2병? 뭐야, 대체,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운명이고 성벽이고 별별 게 다 나오니까, 이제 소설도 현실 같니?”

눈물까지 흘려대며 웃는 진희를 보고 클로이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오랜 소망을 비웃는 진희를 잠자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공격하세요!”

클로이는 주변에서 이쪽 상황을 지켜보던 헌터들에게 명령했다. 클로이의 강압적인 명령에 헌터들은 살짝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진희를 향해 공격해왔다.

“아하하, 진짜, 너무 재밌다, 너. 오래간만에 엄청 웃었네.”

마법과 화살, 검, 창, 온갖 것이 공격해 왔지만, 진희의 몸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마법은 베어버리고 창은 발로 쳐내며, 검은 상대 손목을 잘라버려 막아냈다. 화살은 옷자락도 스치지 못했다.

‘어디까지 강해지려는 거야.’

그 모습을 보며 현성은 내심 혀를 찼다. 회랑에서 나온 진희는 한층 더 강해져 있었다. 이젠 검성이 아니라 검신이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수준이다.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을 공격의 쇄도를 느긋하게 피해낸 진희를 향해 이번엔 클로이가 달려들었다.

“진희 씨!”

멀리서 떨어져 싸움을 관찰하고 있던 현성은 저 공격이 자신이 당했던 환영이란 걸 알아차렸다. 또다시 환영을 이용해 진희의 뒤를 잡아 공격하려는 속셈이었다.

“뻔해.”

“아악!”

하지만 진희는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뒤로 돌아 발차기를 날렸다. 검을 든 자세 그대로 옆구리를 가격당한 클로이가 바닥을 굴렀다.

“내가 너희 기사단을 몇 번 상대해 봤는데, 그것도 모를까 봐? 게다가 이렇게 조명이 뚜렷한 곳에서 환영을 쓰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당하겠니?”

“…….”

괜히 듣고 있던 현성이 찔리는 공격이었다.

“어설퍼. 검술은 좀 늘었나 했더니, 결국 성장한 게 없구나. 전생에서도 지금에서나.”

“욱, 우욱…….”

진희가 클로이를 향해 다가가려 하자, 헌터가 사방에서 다시 공격해 왔다. 이번엔 피하고만 있지 않았다.

“헉!”

진희는 검을 쓰지도 않고 상대방의 창을 가로채 반격하거나, 마법을 피해 마법사에게 다가가 턱을 갈겨 기절시키는 등, 빠르고 침착하게 적을 무너뜨렸다.

카온과 라이샤가 애써 방어했던 수십 분이 우스울 정도로 빠르게 적들을 처치한 진희가 손을 털며 카온과 라이샤를 바라보았다.

“너희도 수련을 더 해야겠다.”

“……네.”

“고작 이 정도로 쩔쩔매다니, 스킨쉽 받을 자격이 없어. 카온은 앞으로 아침마다 내 머리 말리기 금지야.”

“진희 씨, 뒤에 아직 있는데요.”

농담도 적당히 하라는 의미로 현성이 말하자, 진희가 멋쩍게 눈가를 비비며 클로이에게 다가갔다.

“일어나지 않는 게 좋을걸? 아까 칠 때 마나홀을 흔들어 뒀거든. 정신 차리기 힘들 정도로 아플 텐데.”

“으윽…… 바, 바제트 경을 깨워야 해요. 그럼 당신 따위…….”

“너도 끈질기네. 바제트는 이미 죽었다니까, 왜 못 믿어?”

클로이가 눈물 어린 눈동자로 진희를 노려보았다.

“아니에요. 그분의 부하가 저런 꼴이 됐다는 걸 알면, 바제트 경도 분명 죽음에서 되살아 날 겁니다.”

“아닐걸? 걔 자살했거든.”

“……네?”

진희가 세상에 몰랐냐는 듯 과장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아하, 그렇구나. 모르고 있었구나. 하긴 괴짜가 그 이야긴 쏙 빼놓고 얘기했겠지.”

“그게 무슨…….”

“바제트는 자살했어. 더 살기가 싫었거든.”

“귀, 귀족들의 독주에 죽은 거 아닌가요?”

“바제트가 독주를 해독할 능력도 없을까 봐? 제정신이라면 용을 죽이는 독을 먹어도 멀쩡했을걸?”

클로이는 다른 왕국에서 바제트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 연회에 참여할 명분이 없었을 테니까.

소문으로 들으면 바제트의 죽음은 제법 멋진 소재였다. 온 세상을 호령했으나 귀족들에게 배신당해 죽은 기사라니.

하지만 깊게 생각해 보면, 그 뛰어난 기사가 고작 독 한 모금에 죽을 리 없었다.

“생각해 봐. 바제트 정도의 기사는 염산을 먹어도 끄떡없을 건데, 뭔 독으로 죽인 거야?”

“아…….”

그간의 맹신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진희는 즐겁다는 얼굴로 클로이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되살아나서, 제국에 복수를…….”

“언데드가 무슨 의지가 있다고? 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 거지? 정말로 언데드가 된 인간이 복수라는 대단한 걸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알잖아. 언데드는 꼭두각시야. 술사가 부리는 인형.”

“…….”

“그리고 그 인형사는 괴짜였고. 클로이 넌 바제트가 되살아나는 걸 보고 싶은 거야? 아니면 괴짜가 조종하는 꼭두각시 바제트가 보고 싶던 거야?”

“저, 저는…….”

“외모만 똑같으면 괜찮아? 아님 실력? 어느 쪽이든 원본 바제트는 아닐 텐데.”

잔인하다. 철저하게 바제트의 환상을 깨부수는 진희를 보며 현성은 혀를 내둘렀다.

저 입을 다물게 만들려면 진희와 싸워 이겨야 하는데, 실력 차이가 너무 크다 보니 그것마저도 요원하다.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러도 진희는 여유롭게 피하며 다가오고, 그녀의 귀에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때려 박았다.

“사실 나도 회랑에서 바제트를 만났어.”

클로이가 진희의 말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 빈틈을 파고든 진희는 클로이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검을 휘두를 수 없도록 손목을 꽉 쥐고, 여전히 비웃는 얼굴로 클로이에게 다가갔다. 숨결이 닿을 것 같은 위치에 다다른 그녀가 말했다.

“죽고 싶어 하더라고.”

“아, 아냐.”

“더는 살아가고 싶지 않댔어. 바제트가 되고 싶지 않다고. 바제트가 아니라, 서진희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하더라.”

“아니야!”

“그래서 그러라고 했지. 바제트는 이미 죽었으니까.”

“아니야!!”

“내가 죽였거든. 언데드인 바제트도, 남은 사념인 바제트도. 모두 이 안에 있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그게 당연한 일이다. 죽은 사람은 살아나선 안 된다.

그게 운명이다.

“아아악!”

클로이가 비명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억지로 손목을 빼내는 바람에 손목엔 손아귀 모양의 상처가 남았다.

손목을 아려오는 아픔을 무시하고서, 찬란한 빛을 휘두르는 클로이를 보며 진희가 나지막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우리 같이 바제트의 명복을 빌어줄까?”

“그만해!!”

클로이를 다 놀렸다고 생각한 진희가 드디어 검을 빼 들었다. 이제 할 말은 모두 끝났다. 그녀에게서 받아낼 정보도 충분히 받아냈다.

애당초 클로이는 흑막이 아니었다.

본인은 흑막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몰라도, 결국 그녀도 한 명의 장기말일 뿐이었다.

[악랄한 주인이군.]

“시끄러워.”

모든 대화를 지켜본 바르그의 나지막한 욕설을 무시하며, 진희는 검을 휘둘렀다.

클로이의 것보다 더 날카롭고 빠른 검술이 클로이의 검을 모두 쳐냈다.

현성을 몰아냈을 때와 달리, 클로이의 폭풍은 진희에게 조금의 위협도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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