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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142화 (142/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42화

“지엑스 정재민에게 보육원에 대한 정보를 넘긴 것도, 당신들이 이곳을 찾아내게 하려 연구소의 흔적을 남긴 것도, 오브를 만든 공장의 단서를 뿌린 것도, 서진희에게 자기 말고도 환생자가 이 세상에 있다는 말을 남긴 것도. 모두. 전부. 계획된 일이에요.”

괴짜, 니케 로만. 현성은 미국에서 봤던 괴짜의 얼굴을 떠올렸다.

“테러범과의 섀도우 복싱은 재밌었나요? 금강의 정보도 이세영을 통해 니케님이 흘린 정보들이었어요. 그걸 토대로 계획을 짰죠? 어때요, 즐거웠나요? 모든 게 당신들 뜻대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나요?”

클로이가 바제트를 맹목적으로 믿고 우상화하고 있다면, 괴짜에 대해선 끝없는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마치 세뇌라도 당한 것처럼 괴짜를 맹신하는 그녀를 보며, 현성이 이를 악물었다.

‘틈이 보이질 않아.’

제멋대로 말을 하는 미치광이었지만, 검술에 있어선 조금의 틈도 엿보이지 않았다. 클로이의 검술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상처가 있는 데다 일행이라는 짐이 있는 현성이 당해내기엔 버거운 상대였다.

“이제 마지막 계획만 남았어요. 바제트 경만 돌아온다면 니케 님의 계획도, 제 소망도 모두 이뤄져요.”

열망이 가득한 클로이의 눈 안에선 과거의 기억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아아,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니.”

피바람을 몰며 승리를 쟁취하는 장군. 내로라하는 기사들의 도전을 물리치고 유일의 경지에 들어선 검성.

기사도와 정의를 읊으며 악의 제국을 몰아내고, 결국 그 자신도 숭고한 죽음을 맞이한 영웅.

“당신이 싸우는 그 모습을…….”

과거의 첫사랑을 떠올리는 사춘기의 아이가 된 것처럼 볼을 붉히는 그녀는 세차게 검을 휘둘렀다. 미친 소리를 내뱉으면서도 그녀의 검로는 차근차근 현성의 목을 옥죄고 있었다.

‘못 막겠어.’

점점 늘어나는 검의 공격에 현성이 천천히 뒤로 밀려났다. 카온과 라이샤가 현성을 도울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도 생사를 다투는 전투에 점점 지치고 있었다.

하나를 막으면 두 번의 공격이, 두 번을 막으면 네 번의 공격이 쏟아졌다. 두 개의 검을 사용해 퇴로를 차단하는 클로이는 이윽고 현성의 방어를 무력화시켰다.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이미 클로이의 눈에 현성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현성의 목에 검을 들이밀며 중얼거렸다.

“난 죽어도 좋아.”

더 이상 막을 수 없다. 지속된 출혈에 힘이 빠지고, 주술을 실패한 탓에 마력도 고갈되었다. 방어까지 뚫린 이 상황에서, 클로이의 검을 막을 순 없었다.

현성이 체념 어린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때.

“그럼 죽든가.”

영웅전답게 완벽한 순간. 정확한 빈틈. 동료를 위기에서 구해주기 위해.

“저리 비켜, 스토커.”

그녀가 돌아왔다.

30. 서진희

바제트의 기억이 끊기고, 진희는 암흑 속에 갇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녀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울음소리를 향해 천천히 나아가자, 한 소녀가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흐윽, 흑…….]

수습기사의 복장을 한 소녀는 바닥에 검을 내팽개치고 손으로 눈을 가린 채 흐느끼고 있었다.

“바제트.”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진희는 소녀가 바제트임을 알아보았다.

아직 생기를 잃지 않은 회색빛 머리카락 사이로 바제트의 흐릿한 눈이 보였다.

[검을 들지 말 걸 그랬어.]

이것은 바제트의 사념이었다. 진희로 환생하기 전 버려진 기억이자, 언데드 바제트를 움직이게 만든 원동력이다.

니케와 제니트는 이 사념을 이용했다. 영혼의 본체는 환생하여 진희와 융합되었지만, 이 찌꺼기 영혼은 시체에 남아 끝까지 이용당했다.

[사람을 죽이고 싶은 건 아니었어. 난 그저 강해지고 싶었어.]

사념이자 기억, 기억이자 후회.

진희가 버린 후회의 기억이 어둠 속에서 울고 있었다.

[누구도 날 무시하지 못하게.]

그 시대에 여성 기사란 대우받는 신분이 아니었다. 기사단의 이미지를 위해 외교의 수단으로 쓰이거나, 기사 가문의 자랑을 위한 대리 신분으로 차별받던 신분이었다.

하지만 바제트는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실력으로 인정받고, 누구보다 강한 기사가 될 수 있을 거란 근거가 그녀의 검에 존재했다.

그래서 그 대단한 검을 휘둘렀다. 명예와 정의를 위해. 기사도와 제국을 위해.

[왜 이렇게 된 걸까?]

소녀였던 바제트는 성인이 되었다. 막 전쟁터에 나가던 시기, 처음으로 수십 명의 병사를 학살했던 바제트는 그날 끔찍한 악몽에 시달렸다.

그녀가 원하던 건 명예로운 전쟁이었다. 기사와 기사의 전투. 사상자를 줄이기 위한 최선의 전략. 충분한 보급과 아군의 믿음.

현실은 달랐다.

적군 기사단은 아군의 기사단과 마주치는 걸 꺼려해 기사가 없는 병사들의 주둔지를 습격했고, 기사와 간부의 생존을 위해 수많은 병사를 제물 삼아 도망치곤 했다.

아군의 보급은 언제나 불규칙적이었으며, 전방을 사수하더라도 본부에서의 어떤 포상이나 훈장도 주지 않았다.

적군의 게릴라 전략에 지친 바제트가 그들과 똑같이 적군 병사들을 도륙했을 때.

[이 전쟁은 누굴 위한 전쟁이야?]

바제트는 처음으로 제국에 불신을 품었다.

또다시 시간이 흐른다. 전쟁에 참여했던 바제트가 전쟁의 승리의 주역으로 바뀐다.

효과적이고 잔인한 전략으로 적들에게 두려움을 사고, 백성들에게 칭송받던 시기의 바제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울고 있음에도 표정은 변함이 없다.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샘은 아직도 작동하고 있었다.

[지쳤어.]

삶을 포기한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아닌 핏방울이 흘렀다.

진희는 천천히 바제트의 곁으로 다가갔다. 바제트는 진희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엔 얼핏 원망이 서려 있는 듯했다.

왜 아직 살아 있는 거야. 난 죽고 싶었어. 환생 따윈 하고 싶지 않았어. 편히 쉬고 싶어.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아.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

원망받고 싶지 않아.

영웅 따위 하고 싶지 않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속마음이었다. 진희는 쓰게 웃었다. 바제트가 남에게 고민을 털어놓지 않은 이유야 뻔했다.

[실망시킬 수 없어.]

그녀는 기사단장이기 때문이다. 그녀를 믿고 따르는 수많은 부하, 가신들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버텨내야 했다. 그녀와 비교당하며 살아온 동생을 위한 속죄이기도 했고, 세계 최고의 기사단의 단장이란 책임감 때문이기도 했다.

우스운 일이다. 그렇게 강한 척하던 그녀는, 정작 죽음의 순간이 오자 안심했다.

자신은 귀족들의 암계에 빠져 죽는 것이다. 날 따르던 기사들은 자유로워질 것이고, 남동생이 가주를 이어받아 가문은 안정될 것이다.

그런 근거도 없는 자기합리화를 하며 자살했다.

그녀를 애타게 바라보던 황태자의 눈동자를 무시하고서.

바제트는 자신과 달리 멀쩡한 진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도 지치지 않아?]

“아니.”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는 즐거웠지만, 약자를 죽이는 건 지치는 일이었다.

[부담스럽지 않아?]

“전혀.”

자신만을 바라보는 기사단원들의 기대에 때때로 무너질 것 같았다.

[죄책감은 없어?]

“하나도 없어.”

사람을 죽인다는 죄에 벗어날 길이 없었다.

[원망을 받아도 좋아?]

“상관없어.”

아무리 정의로운 일을 하더라도, 자신을 원망하는 피해자는 생기게 마련이었다.

“그런 거에 신경 쓸 만큼 난 착하지 않아.”

진희의 말에 바제트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난 내가 좋거든. 그깟 부담이든, 원망이든, 내가 행복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아.”

이기적인 말이었다. 기사도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고, 소인배다운 변명이었다.

하지만 그 자기중심적인 변명이 바제트에겐 필요했다.

“한 번만이라도, 그렇게 생각해 보지 그랬어.”

딱 한 번 자신을 변호할 수 있었다면, 이런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을 텐데.

기사단원에게 말했다면 그녀를 돕기 위해 제국을 들어 엎었을 것이고, 황태자에게 말했다면 망명이라도 시켜줬을지 모른다.

바제트를 돕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주변에 언제나 존재했다.

바제트는 그 모든 기회를 외면하고 혼자 짐을 지고 죽었다.

“더는 자책하지 마.”

[나는…….]

“내게 맡겨.”

진희는 무릎을 꿇고 바제트를 마주 보았다. 그녀보다 커다란 바제트를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지만, 울음이 멎어가는 바제트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이윽고 기사가 되기 전 소녀의 모습으로 변한 바제트가 말했다.

[이제 그만해도 될까?]

“응.”

[네가 되어도 돼?]

“그래, 바제트는 죽었으니까.”

바제트로서 책임지지 않아도 좋다. 바제트는 죽었고, 이곳에 있는 건 서진희뿐이니까.

진희는 두 팔을 벌려 바제트를 껴안았다. 바제트는 땅바닥에 버려진 검을 쥐고, 진희의 품속에 안겼다.

“이제 일어나자.”

꿈속에 깨어날 때가 되었다.

바제트 레임 드라노이드를 버리고, 서진희가 눈을 뜰 시간이었다.

* * *

“바, 바제트 경?”

“누가 바제트야, 이 스토커야. 내가 이름 부르라고 말했을 텐데.”

그리고 눈을 뜬 진희는 클로이를 거세게 걷어차며 말했다.

“그리고 그쪽 헌터들. 병아리 괴롭히지 말고 나한테 덤벼. 치사하게 애들이나 공격하지 말고.”

가운뎃손가락을 의기양양하게 들어 올리며, 진희가 웃었다.

“너무 꾸며낸 타이밍에 등장하는 거 아닙니까?”

“입 놀릴 틈 있으면 상처나 막으시죠? 시체 옮기는 건 질색이거든요.”

“죽으면 업어줍니까?”

“아뇨, 발목 잡고 질질 끌어갈 거예요.”

“스킨쉽 한 번 받기 힘들군요.”

“살아서 뽀뽀해 달라고 빌지, 왜 그렇게 힘든 방법을 선택하세요?”

“해줄 겁니까?”

“하는 거 봐서.”

하하하! 현성은 배에 흐르는 피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음을 터뜨렸다.

진희가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처음에 그녀가 수정구에서 탈출하고 나타났을 땐, 정말 클로이의 말마따나 바제트가 돌아온 게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진희는 여전히 진희였다.

“마, 말도 안 돼. 왜죠? 왜 바제트 경이 아닌 거죠?”

클로이가 충격 어린 눈으로 진희를 바라보았다. 진희의 등장에 적들의 시선이 모두 진희에게 집중되었다. 카온과 라이샤도 반가운 얼굴로 진희를 맞이했다.

“마스터.”

“잠깐 기다려 봐. 눈물 어린 회상 씬은 나가서 찍을 거니까.”

당장에라도 달려올 것 같은 카온을 손으로 치운 진희가 클로이의 의문에 대답했다.

“왜 바제트가 아니냐니. 당연하지, 걘 죽었어. 하늘나라 갔어.”

“회랑에서 만나지 않았나요? 그곳의 사념은 환생자의 영혼을 뒤바꾸는 역할이란 말이에요!”

“아, 그래? 그래서 너도 그렇게 변한 거구나?”

“윽…….”

진희는 요것 봐라, 하며 팔짱을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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