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41화
30. 바제트, 서진희
‘등급을 속였어.’
현성은 재빠르게 주술을 외우며 적들의 공격을 막아섰다.
진희가 정체불명의 수정구에 빨려 들어간 직후, 일행은 클로이를 막기 위해 덤벼들었다. 하지만 거대한 문 뒤에 숨어 있던 헌터들이 튀어나와 일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는 A급 이상이었다. 개중에는 S급이 몇 명 포함되었으며, 그들은 체계적으로 일행을 압박해 왔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클로이였다.
현성은 그녀의 수준이 B급이라 생각했지만, 정작 전투에 들어가자 생각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클로이 또한 진희처럼 마력을 감추고 있었다.
“후후, 당신은 역시 재밌는 사람이네요.”
클로이는 쌍수검을 사용하며 현성을 몰아붙였다. PD와 유나를 지키기 위해 카온과 라이샤는 다른 적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카온을 돕기 위해 주술을 사용하려던 현성을 밀어낸 클로이가 말을 이었다.
“바제트 경의 곁에 설 자격이 있어요.”
“당신 따위가 정할 일이 아닙니다.”
반격하려는 현성의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회피한 클로이가 여유롭게 뒤로 물러섰다.
현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클로이의 실력은 낮게 잡아도 카온과 라이샤 수준이었다. 브리온의 S급 헌터를 암살했던 게 우연이 아님을 보여주는 그녀의 실력은 현성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둘의 실력은 호각이었으나, 현성에겐 명백한 조건이 존재했다.
‘카온을 도와야 하는데.’
카온과 라이샤가 힘겹게 싸우는 게 보였다. 그들을 둘러싼 헌터들의 실력도 만만하게 볼 수준이 아니었다.
평균이 A급, 적어도 세 명 이상의 S급 헌터가 카온과 라이샤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PD와 유나를 지켜야 하기에 방어를 유지해야 했다.
방어만 고수하는 그들을 농락하듯이, 헌터들은 갖은 공격수단을 동원해 압박하고 있다.
현성이 저 자리에 있었다면 주술로 그들을 서포트하며 승기를 잡았을 테지만, 그것을 알고 있는 클로이였기에 현성이 일행을 돕지 못하게 막아서고 있었다.
“저분들도 멋져요. 제 의지로 목줄 찬 용과 갈 곳을 잃어버린 이주민, 오만한 마법사라니, 어쩜 이렇게 완벽한 파티일까요.”
“제 동료를 욕하지 마십시오.”
현성이 그림자 주술을 이용해 클로이의 발을 붙잡았다. 클로이가 바닥을 박차 도망가려 했지만, 이미 가까이 다가온 현성이 그녀를 향해 주먹을 갈겼다.
“앗차차.”
아슬아슬하게 주먹을 피한 클로이가 검을 휘두르며 현성을 위협했다. 특유의 흔들거리는 클로이의 검을 회피한 그가 이번엔 거세게 발차기를 날렸다.
가까운 거리의 공격까지 피할 겨를은 없었는지, 클로이가 배를 가격당해 뒤로 굴러갔다.
“역시 강하시네요.”
하지만 제때 낙법을 취한 탓인지, 별다른 타격이 없어 보이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클로이가 미소를 지었다.
“바제트 경의 복수에 동참할 실력으로 충분하세요.”
“……복수?”
“네, 복수. 아하, 아직 감이 안 잡히시나요?”
키득거린 클로이가 검 끝으로 카온을 둘러싼 헌터들을 가리켰다.
“저기 있는 분들, 모두 금강의 헌터들이에요. 아시고 계셨나요?”
“…….”
대충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다. 신상이 밝혀진 S급 헌터의 외모와 무기 정도는 모두 숙지하고 있었기에, 현성은 저들이 금강의 헌터란 걸 금세 눈치챘다.
“당신이라면 예상이 가시죠? 지금 브리온이 어떤 상황인지.”
“……역시, 금강과 브리온은 동료였군요.”
“동료라기보단, 한 몸이죠. 금강의 이영한 회장이 몰래 만들어 키운 게 브리온이거든요.”
현성이 신음을 흘렸다. 이제야 서혁의 충고가 이해가 갔다. 그는 브리온과 금강의 관계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서한 씨는…….’
이서한을 너무 믿지 말라던 서혁의 조언도 떠올랐다.설마 이 모든 상황을 서한이 알고 있었을까? 모든 게 함정이었고, 금강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것이라면?
현성은 고개를 털며 애써 의심을 지워냈다.
금강이 흑막일지 몰라도, 서한이 배신하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바제트 경의 동료를 저 기계에 가둔 것도 브리온이랍니다. 다시 말하자면 금강이죠. 정말 끔찍한 악당 아닌가요?”
“……진희 씨가 금강에 복수할 거라 생각하는군요.”
“당연하죠. 바제트 경은 자신의 부하를 끔찍이 아끼던 분이셨어요. 가만있을 리가 없잖아요? 기억의 회랑에서 나온 바제트 경은 완전해졌을 거예요. 서진희라는 헌터가 아니라, 바제트라는 기사로 다시 태어나겠죠. 그렇게 되면 ‘악당’ 브리온과 금강은 그녀의 적이 될 거예요.”
현성이 이해가 가지 않는단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당신이 원하는 게 뭡니까? 금강의 몰락입니까? 아니면 진희 씨의 죽음?”
“생각이 짧으시네요. 둘 다 아니에요. 제가 바라는 건, 바제트라는 영웅의 재림이에요.”
클로이는 황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완벽한 시나리오잖아요?”
“시나리오?”
“네. 이건 영웅전이에요. 1부와 2부로 나눠어져, 완벽한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영웅의 일대기.”
클로이는 두 팔을 벌렸다. 그녀는 마치 성경을 읽는 목사처럼 경건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바제트! 제국에게 배신당해 독주를 마셔 죽음에 이른 기사. 모든 세상을 호령하던 신성한 기사는, 지옥에서 다시 돌아와 제국을 멸망시킨다! 1부!”
클로이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벅찬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서진희! 죽은 바제트의 환생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던 중, 과거 부하였던 이들의 끔찍한 죽음을 보고 만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당 브리온이 사실 금강이란 걸 깨달은 그녀는, 최악의 적을 죽이고 세상의 평화를 이룩한다! 2부!”
“최악의 적?”
“이서한과 이영한입니다. 1부와 똑같은 구도지요? 황태자 케네스와 황제를 죽인 바제트가, 이젠 후계자 이서한과 회장 이영한을 죽이는 거니까요.”
완전 미쳤군, 현성이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클로이의 눈은 기대감과 황홀에 잠겨 반짝이고 있었다.
“그깟 수준 낮은 계획에 진희 씨가 어울릴 것 같습니까?”
“서진희는 따라 하지 않겠죠. 하지만 바제트 경은 달라요. 기사도와 정의감으로 환생한 그녀는 금강을 두고 보지 않을 테니까요.”
현성의 반박에 클로이가 뭘 모른다는 듯 웃었다.
“비인간적인 실험을 하면서 카트리지라는 잔혹한 아이템을 만들고, 자신의 부하를 인간 건전지로 만든 브리온. 온갖 더럽고 추잡한 짓을 하며 헌터 기업으로 세상을 장악한 금강. 바제트 경은 이런 꼴을 두고 볼 위인이 아니에요.”
맹목적인 믿음이었다. 바제트라면 가만있지 않을 거란 근거 없는 주장에, 현성은 그제야 클로이가 어떤 식으로 진희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진희 씨는 바제트가 아닙니다.”
“멍청한 소리.”
역린을 건드리는 현성에게 클로이가 정색하며 말을 잘랐다.
“어차피 회랑을 나온 그녀는 바제트 경이 되어 있을 거예요. 당신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그러니까 적당히 하고 물러나세요. 바제트 경과 함께 돌아가서, 복수를 준비하시면 됩니다. 걱정 말아요. 저도 성심성의껏 도와드릴 테니까요.”
“진희 씨가 당신을 가만 놔둘 것 같나요?”
“제 죽음을 바란다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어요. 바제트 경의 영웅전을 위해서라면.”
아, 하지만 하고 클로이가 덧붙였다.
“PD씨는 두고 가세요. PD씨의 기록은 좀 위험해서요. 그녀는 여기서 죽어야 돼요. 시나리오에 필요 없어요.”
“누가 그딴 권유를 들어나 준답니까? 우린 PD를 두고 가지도, ‘바제트’를 데려가지도 않을 겁니다. 이 연구소를 파괴하고, 당신에게 책임을 물은 뒤, 진희 씨를 필두로 무사히 돌아갈 거예요.”
“나 참, 그러니까 전제부터 잘못되셨다니까요? 바제트 경이 돌아오면, 당신이 뭐라 말하든 복수극이 시작될 거예요. 악당은 사라지고, 영웅이 다시 태어나겠죠.”
“그럴 리 없습니다.”
“……아하, 그렇군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클로이가 손뼉을 쳤다.
“당신은 바제트 경의 정의에 동감하지 않는군요.”
“……뭐라고?”
“그래,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요. 서진희란 인간의 막무가내 계획엔 동참하면서, 금강의 후계자 따위와 결탁해서 그녀의 곁에 서다니 말이에요.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이서한이 악당이라고 그녀를 설득했을 텐데.”
클로이는 속사포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광기 어린 그녀의 중얼거림에 현성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당신이라면 헨즈의 역할을 건네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 착각이었나 봐요. 아쉽네, 배역이 모자라면 완성도가 떨어질 텐데.”
“제정신이 아니군요.”
“뭐가 잘못된 걸까요? 분명 그분 말대로 부족함 없이 진행된 일인데. 기사단원들이 모자랄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현성은 클로이 모르게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기나긴 대화를 하는 도중 준비해 둔 주술이 펼쳐지기 직전이었다.
‘조금만 더…….’
싸움을 멈추고 대화를 길게 이끌어간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카온을 돕기 위해 비밀스럽게 주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긴 어쩔 수 없나. 환생체를 데려온 것도 아니니까…… 아쉽네요, 현성 씨.”
“어?”
주술이 발동되기 직전이었다. 몇 초의 시간만 있으면 카온을 돕고 이 자리를 이탈할 수 있는 주술이 펼쳐질 터였다.
하지만 현성은 자신의 배를 뚫고 나온 검에 주술을 멈추게 되었다.
클로이는 분명 눈앞에 있는데, 목소리는 어느새 그의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라바다 신성 기사단은 모두 빛의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답니다. 환영과 시각의 굴절은 기본 소양이지요.”
여형을 죽이고 진희를 수정구에 가뒀던 그녀의 트릭의 정체였다. 빛을 왜곡시켜 환영을 만들어낸 그녀는 현성의 방심을 유도해 그의 뒤로 돌아가 검을 찔러넣었다.
“큭…….”
현성은 급히 팔을 휘둘렀다. 저주를 담은 부적이 클로이를 향해 날아갔지만, 그녀는 이미 검을 회수하고 유유히 빠져나간 뒤였다.
“당신이 주술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걸 제가 모르고 있겠어요? 사람 이야기하는데 딴짓이나 하다니, 기사로서 교양이 부족하군요.”
클로이가 툴툴거리며 검을 털었다. 현성의 피가 신전의 바닥에 흩뿌려졌다.
“역시 당신으론 안 되겠어요. 다른 배우를 찾든가, 아니면 없애버리든가 해야지. 바제트 경의 명예에 흠집이 나면 안 되니까요.”
이 미친 소리에 어울려주는 것도 더 이상 어려웠다. 치료 주술로 급히 출혈을 막은 현성이 말했다.
“모든 게 당신 계획대로 흘러갈 것 같습니까?”
“그렇게 될 걸요? 그도 그럴게, 니케 님이 말씀하신걸요. 삼라만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클로이가 조금의 의심도 없는 광신도의 미소를 지으며 검을 들었다. 주술을 외울 시간을 더 줄 생각이 없다는 듯, 그녀는 단숨에 현성의 눈앞까지 당도했다.
“……윽!”
“모든 게 다 계획대로예요.”
클로이의 쌍검을 가까스로 막았지만, 그로 인해 배의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피가 흐르는 현성을 바라보며 클로이가 노도와 같이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