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40화
“아니요. 당신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이윽고 방어막이 사라졌다. 방인은 힘을 다해 역소환되었고, 방어막을 이루고 있던 정령들 또한 자취를 감췄다.
지엑스의 헌터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누구도 당신을 탓하지 않아요.”
혜수는 이선의 손을 놓고 앞으로 나섰다.
“너무 감동적인 말이야. 신파극은 끝났어?”
“말하지 말아 달라 하지 않았나요? 입 냄새까지 역겨우니까, 열 걸음 물러나세요.”
“하하, 작작해.”
재민이 유쾌하게 웃으며 팔을 흔들었다. 그의 무기에서 날아온 마력이 혜수의 뺨을 스쳤다.
조금만 옆으로 움직였다면 혜수의 목이 떨어졌을 위치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고, 이선의 앞을 지켰다.
“나 참, 정부 인물을 죽이면 뒤끝이 더러운데 말이야.”
말과 다르게 재민은 가볍게 메이스를 휘둘러, 혜수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적당히 나서지 그랬어, 목숨 귀한 줄 알아야지.”
“엿이나 먹어. 변태 새끼야.”
“그게 유언이야?”
재민이 메이스를 거둬들였다. 그리고 내려찍기 위해 높이 들어 올렸다.
혜수는 메이스에 시선을 두지 않고 재민을 노려보았다.
“뒤통수 조심해.”
“저주치곤 약하네.”
그녀의 마지막 저주라고 생각한 재민이 웃음기 어린 대답을 했지만, 혜수는 오히려 마주 웃으며 말을 이었다.
“충고해 주는 겁니다. 머저리.”
“뭐?”
콰앙-!
어마어마한 폭발음이 터졌다. 폭발이 벌어진 건 혜수의 눈앞, 재민이 서 있던 그 자리였다.
“아아악!”
정체불명의 무언가에 옆구리를 얻어맞고만 재민이 허공을 날아 바닥을 나뒹굴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혜수가 덧붙였다.
“사람 말을 잘 듣지 그랬어요.”
“괜찮습니까?”
폭발로 일어난 먼지 사이에서 걸어 나온 사내가 혜수에게 물었다. 그가 도착할 시간을 정확히 재고 있던 혜수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아니꼽지만 최고의 타이밍이네요, 이서한 씨.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명함 교환은 다음에 하지요.”
재민이 서 있던 자리에서 서한이 웃으며 혜수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자신을 망연히 지켜보는 이선과, 그 뒤에 실신한 영감을 바라보았다.
“…….”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보육원 쪽을 돌아보았다. 부서진 담벼락, 창문 안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흐느끼는 목소리. 그리고 강당에서 느껴지는 아이들의 전투.
“뭐, 뭐 하는 새끼야!”
동료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는 재민을 보며 서한이 대답했다.
“여기 직원이다.”
“뭐, 뭐?”
전력 차는 여전했다. 서한이 참가했다 한들 적은 무려 8명이었고, 개개인이 S급에 달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한은 검을 들었다.
“아가리 다물고 덤벼, 스토커 자식아.”
“하, 하하! 어디서 주제도 모르는 새끼가, 또 나대고…… 아악!”
재민이 비웃음을 날리려 했지만, 느닷없이 달려온 서한에 의해 명치를 걷어차여 다시 땅을 굴렀다. 재민을 부축하고 있던 헌터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한을 바라보았다.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번개와도 같은 속도로 달려온 그가 검을 휘둘러, 곁에 있던 헌터의 목을 베었다.
강대한 마력을 지닌 헌터치곤 허망한 죽음이었다.
“허, 허억!”
“넌 곱게 죽을 생각하지 마라.”
서한이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같은 S급이라도 수준 차이가 있다는 걸 알려주마, 애새끼들아.”
‘금강에서 떠날 셈이냐?’
‘네.’
이영한의 물음에 서한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결국 전화를 받지 못했지만,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곧장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
그를 불러 세운 이영한이었지만, 서한은 돌아볼 생각이 없었다.
‘키워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하지만 꼭두각시 취급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우습구나, 네가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모릅니다.’
‘네 모든 성장은 다 나의 안배였다. 금강에서 벗어난다 한들, 네가 뭐라도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생각 안 합니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구나.’
‘예.’
서한은 병실이 나서기 직전, 말을 이었다.
‘애들과 한 약속도 못 지키면, 그 녀석이 실망할 테니까요.’
‘고작 사랑에 넘어간 것이냐?’
‘네, 고작 사랑에 넘어갔습니다.’
서한은 웃음소리를 남기고 병원을 떠났다.
그리고 차도 타지 않고서, 보육원을 향해 전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인파를 피해 건물들 사이를 달려 나가며 보육원의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발…….’
다급한 마음에 서한이 빠르게 발을 굴렀다. 도시의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안위가 걱정이었다. 기사단의 적이 보육원을 노리고 있음을 알면서 자리를 비운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있다!’
전력을 다한 뜀박질 끝에, 그는 보육원에 도달했다.
이선과 혜수를 협박하고 있는 재민을 멀리 날려 보내고, 카트리지로 각성한 헌터의 목을 벤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강당은…… 다행이다, 안전해.’
소라 일행이 승리한 것인지,느껴지는 기운은 아이들의 것만이 강당에 남았다.
정체 모를 기운이 소라의 마력과 섞이는 걸 감지했을 땐 깜짝 놀랐지만, 이윽고 그것이 소라의 것과 잘 섞여들자 걱정을 덜어냈다.
일종의 각성, 혹은 아티팩트를 사용한 것이리라 짐작했다.
“헉, 허억, 누, 누구야. 개자식아!”
재민이 배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장이 뒤틀린 탓에 입에서 피를 흘리는 그를 보고 서한은 말없이 다시 검을 들었다.
‘S급이군. 짐작이 사실이었나.’
영혼을 이용해 마력을 강화한다는 유나의 가설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잔혹한 아티팩트는, 그의 아버지인 이영한이 만든 물건이었다.
서한은 혀를 차며 주위를 경계했다.
서한의 무력을 두 눈으로 지켜본 헌터들은 긴장 어린 몸놀림으로 그의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죽여, 죽여버리겠어…….”
재민이 마력으로 헤집어진 내장을 억지로 끼워 맞추고 다가왔다. 재민을 따라서 헌터들도 진형을 갖췄다.
기습으로 한 명 처리했다지만, 남은 S급은 7명이나 된다. 국내 어떤 기업에도 없을 호화스러운 파티였다.
그럼에도 서한은 자신이 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1년 전의 자신이었다면 승산이 없으리라 판단했겠지만, 지금의 자신은 달랐다.
“죽여!”
알아오는 마법을 피하고, 찔러오는 무기들을 받아친 서한이 단숨에 도약했다. 목표는 마법사였다.
다른 이들에 비해 근접전에 터무니없이 약한 마법사들은 다급히 방어막을 치려 했으나, 모두 서한의 검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아아악!”
마법사 둘의 목을 베어버린 서한이 곧장 땅을 박찼다. 그가 있던 자리에 온갖 무기가 쇄도했다.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검을 휘둘러,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려던 헌터 한 명의 눈을 베어냈다.
“내, 내 눈!”
검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눈을 가리려는 헌터의 턱을 날려버린 그가 이번엔 허리를 숙여 검을 횡 방향으로 휘둘렀다. 반 바퀴 돌자, 곁에 있던 다른 헌터들의 다리가 잘려 나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허리를 펴, 자세가 무너진 이들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마, 말도 안 돼.”
그 일련의 과정은 십 수초도 지나지 않는 사이에 끝났다. 내상이 있어 다른 이들보다 늦게 공격하려던 재민은, 순식간에 죽어버린 동료의 시체를 보며 경악에 빠졌다.
분명 서한과 이들의 마력 수준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단순한 힘 싸움을 했다면 서한 개인의 힘보다 8명의 헌터의 힘이 당연히 강했을 테지.
하지만 그 차이를 메꿀 정도의 실력 차이가 그들에겐 존재했다.
‘몬스터만 상대하던 버릇이라고 했던가.’
서한이 이곳에서 수련하면서 배운 건, 헌터의 전투법이 아니라 기사의 무술이었다. 몬스터를 사냥하는 헌터의 기술과 달리, 철저히 인간을 죽이기 위해 개발된 무술은 마력의 차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날카롭고 재빠른 검이 있다고 한들, 휘두르는 자가 삼류라면 빛을 보지 못하는 법이다.
“아아악!”
재민을 제외한 모든 헌터를 사냥하고서야, 서한의 검이 멈추었다.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그가 재민을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저질이군. 지엑스의 수준이 낮은 이유도 알 법해.”
서한의 비아냥에 재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눈이 주위를 살펴보고 있음을 눈치챈 서한이 낮게 웃었다.
“도망칠 궁리를 하나?”
“…….”
“근성은 썩었지만 판단은 빠르군.”
서한이 천천히 재민에게 다가갔다.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보육원을 노렸던 괘씸함과 아이들을 괴롭힌 죗값을 받아내고 싶었다.
“김이선.”
그리고 서한은 이런 타입의 인간을 괴롭히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네, 네?”
압도적으로 끝난 전투에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이선이 서한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서한은 그녀에게 손짓했다. 잘 보고 있으란 뜻이었다.
“아악!”
서한은 검을 집어넣고, 곧장 재민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다시 한번 명치에 틀어박히는 서한의 주먹에 재민이 무릎을 꿇었다.
피할 새도 없었다. 가드를 올리려 했지만 그 사이를 교묘하게 파고든 서한의 주먹은 재민의 실력으론 방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지금부터 허락하지 않은 발언을 금지한다.”
서한이 혜수에게 보육원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아이들의 시선을 막아달란 뜻이었다. 이선과 마찬가지로 서한의 힘을 본 혜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지만, 서한의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보육원으로 들어갔다.
울고 있는 아이들을 보육원 안쪽으로 모으는 혜수를 지켜본 서한이 재민의 목을 손에 쥐었다.
“질문은 오로지 나만 한다. 똑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마력회로를 하나씩 부수겠어.”
“내, 내가 그따위 협박에…….”
“닥쳐.”
“아아악!”
진희처럼 섬세하게 파괴할 순 없지만, 단순하게 망가뜨리는 정도는 서한도 할 수 있었다. 그는 재민의 왼팔의 회로를 잘라버리고서 이선에게 물었다.
“자, 어떻게 복수해 줄까?”
“이……!”
재민이 눈을 돌려 이선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근방까지 다가온 그녀가 재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선을 향해 다시 욕을 하려던 재민이었으나, 서한이 목을 강하게 움켜쥐자 숨조차 쉬기 힘들어하며 콜록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이선이 심호흡을 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든 마력회로를 다 잘라주세요. 다시는 마력을 쓸 수 없도록.”
기나긴 악몽을 정리하기 위한 부탁치곤 메마른 어조였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가 느껴졌기에, 서한은 가타부타 말없이 검을 들었다.
“자, 잠깐만, 제발, 제발 부탁이야. 더는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사과할 테니까, 그만……!”
“듣고 싶지 않아요.”
“우, 우욱!”
“당신 목소리는 역겨우니까.”
이선이 혜수가 했던 말을 똑같이 중얼거렸다. 재민은 충혈된 두 눈으로 이선에게 용서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필사적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서한의 무자비한 검은 그녀의 말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
조용하면서도 잔인한 복수가 끝을 맺었다. 잔인하고 참혹한 광경이었지만, 이선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과거 상처 입었던 자신을 위한 위로였으며, 앞으로 떨쳐낼 악몽을 위한 각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