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와 헌터의 겸직-138화 (138/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38화

“여전히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자…… 그럼, 누님. 이제 뭘 하고 싶으신지?”

미카일의 말을 헛소리라 치부한 제니트가 바제트에게 다가왔다. 그가 바제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려 하자, 헨즈의 검이 둘 사이를 파고들었다.

“건드리지 마십시오.”

“방랑 기사가 주제넘구나.”

“뭐라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단장님께 손대는 것만큼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하! 누님을 다시 살려준다는 이야기에 무릎까지 꿇었던 녀석이, 입은 살았구나!”

제니트의 비웃음에 헨즈는 이를 악물 뿐 부정하지 못했다.

“만족은 했더냐? 언데드가 된 누님의 힘으로 제국을 무너뜨리니, 이제 기사로서의 긍지가 지켜진 것 같아? 웃기는군, 지금껏 너희는 모두 내 손안이었어.”

헨즈가 벌게진 눈으로 제니트를 노려보았다. 당장에라도 제니트를 죽일 듯 살기를 내뿜었지만, 그의 검은 움직이지 않았다.

“난 이 길로 노만 신국으로 망명을 떠난다. 마음 같아선 누님을 이용해 좀 더 놀아보고 싶지만…….”

제니트가 아쉽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운용할 수 있는 마력에 한계가 있군. 이봐, 니케. 마석은 더 없나?”

“히히, 불가능해. 이 정도의 업을 쌓은 언데드를 더 움직이려면, 마석이 아니라 신이라도 사용해야 하거든.”

그때, 제니트의 곁에서 검은 로브를 쓰고 있던 이가 걸어왔다.

바제트, 진희는 그를 보자마자 알아챘다.

녹슨 금발과 짙은 녹색 눈동자, 그리고 성별을 알 수 없는 탁한 목소리.

괴짜, 니케 로만이었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무리했다고 봐야 해. 나도 이제 가진 게 없거든.”

“흠, 그럼 결국 창고행인가. 아쉽군.”

“걱정 마. 너희는 결국 다음 생이 되어도 다시 만날 운명이니까.”

니케는 깔깔 웃으며, 로브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검은색 빛이 담긴 불길한 수정구였다. 진희는 그것을 보고, 바제트가 왜 수정구에 갇혀 떠돌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모든 건 니케가 꾸민 일이었다.

“난 이걸로 충분하지만, 너흰 어떻지, 미카일? 단장의 몰락을 바란 것뿐이냐?”

니케가 검은색의 수정구를 바제트에게 가져다 대려고 할 때, 제니트가 미카일에게 물었다. 미카일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신을 위한 일이었으니, 충분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영웅의 몰락으로 귀결되니까요.”

“언제나 알 수 없는 말만 지껄이는군.”

“언젠가 당신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야, 당신은…….”

그 말의 뒤를 들을 순 없었다. 제니트가 수정구를 바제트에게 가져다 대자, 검은빛이 바제트를 감싸 버렸기 때문이다.

깜깜해지는 시야 사이에서, 진희는 슬픈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헨즈와 기사단, 그리고 니케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고통뿐인 인생을 살아오던 바제트의 인생이 진정으로 완결된 순간이었다.

29. 복수

“아파…….”

콜록, 피가 섞인 기침을 한 소라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앞엔 박민성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 B급이야?’

아득하게 느껴지는 민성의 마력을 느낀 그녀가 절망스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민성이 가슴에 정체불명의 물건을 박은 후, 그는 비명을 내뱉으며 각성했다.

아까는 그나마 겨뤄볼 수 있는 정도였지만, 지금의 민성은 소라로선 감당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제 못 떠들겠냐?”

B급.

관문급을 넘어 단숨에 B급까지 올라선 그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뭔 수련을 했던, 아무 소용없어. 그딴 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결국 헌터는 재능이야.”

“윽!”

민성이 소라의 배를 걷어찼다. 반사적으로 가드를 올린 소라였지만, 저 멀리 굴러가는 걸 막을 순 없었다.

“네 친구들도 다 죽기 직전인데, 어쩔래? 더 싸워 볼 거야?”

오만한 민성의 말에 소라는 피를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다잡으며 일어나는 그녀를 보고 민성이 질렸다는 듯 웃었다.

“미안하다고 싹싹 빌면 이 정도로 봐줄 텐데, 말이야.”

“내가, 뭘 잘못했는데?”

“모두. 다. 전부.”

내가 이렇게 몰락한 것, 카트리지라는 고약한 아이템을 쓰게 된 계기, 정재민이란 쓰레기와 엮이게 된 이유.

“다 너희 탓이야.”

민성의 지리멸렬한 말에 공감하는 사람은 없었다. 증오로 불타는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민혁과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종혁, 아직껏 눈을 뜨지 못한 청하를 뒤로하고, 소라는 입을 열었다.

“우리가 뭘 했는데?”

“주제에 맞게 살았어야지.”

민성은 진심이었다. 그는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소라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억울해? 부모 없이 커서 불쌍하다고 좀 다독여 줬더니, 보탬은 못 돼줄망정 배신한 너희가 뭐가 억울해? 고마운 줄 알았으면 도와주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니야.”

“……당신은 부끄럽지도 않아? 아이들을 조폭에게 팔아넘기고, 혼자 도망간 주제에!”

“웃기고 있네, 너희 같은 괴물 새끼들이 사회에 나가지 못하게 막은 내가 뭐가 부끄러워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 징그러운 날개로 사람들을 돕는 약이라도 만드는 길이, 더 행복한 일 아냐?”

민하가 가진 요정의 날개를 이용해 마약을 만들려던 까마귀파의 악질적인 실험이 떠올랐다.

소라는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처음부터 우릴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구나.”

“그럼? 너희같이 덜떨어지고, 괴물 같은 능력을 가진 애들을 내가 왜 좋아해야 해?”

‘괜찮아, 소라야. 아무에게도 말 안 할게.’

과거의 기억이 겹쳐졌다.

사람 좋은 미소로 소라를 위로해 주던 그의 얼굴은, 어느새 고아를 혐오하는 조폭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끔찍했다. 소라는 민성의 악의에 질렸다.

어떤 논리도 통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자신의 죄책감을 잊은 지 오래였고, 자기합리화를 끝내 이기적인 복수심만으로 움직이는 짐승이었다.

이대로 저런 짐승에게 지는 걸까?

소라는 죽어도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을 빌미로 저 짐승에게 자기합리화의 근거를 더 제공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

소라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종혁과 민혁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청하가 꿈틀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이 여기서 포기하고 사과하면, 아이들은 살 수 있지 않을까? 브리온, 지엑스에게 납치당한다고 하더라도, 진희가 돌아오면 모두를 구해줄 거란 믿음이 존재했다.

한 번만 숙이면, 복수를 포기한다면 모두가 살 수 있다.

“알았어.”

이윽고 소라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민성을 향해 말했다.

“엿 먹어라, 개자식아.”

그리고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 * *

민혁은 상처 입은 어깨를 꾹 눌러 억지로 지혈하며, 소라와 민성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민성이 카트리지를 사용한 후, 싸움은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소라의 방어는 더 이상 효과를 볼 수 없었고, 민성의 공격은 한 번 한 번이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이미 소라는 만신창이였다. 입술이 터져 턱이 피로 얼룩졌고, 방어를 하던 팔은 멍이 들어 세우는 것마저도 버거워 보인다.

아마 옷 속은 더 처참한 몰골이겠지.

민혁은 이를 악물고 마법을 준비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미 과한 출혈로 눈앞이 흐릿했고, 몸을 일으켜 세울 기운조차 없었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피가 부족한 건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그런 몸임에도, 민혁은 계속해서 주문을 외웠다.

[파이로.]

만약 민성이 가진 마력에 걸맞은 전사라면 뒤에서 민혁이 마법을 준비하고 있는 걸 눈치챘겠지만, 미숙한 그는 소라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텨, 소라야.]

소라가 민성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머릿속에 울리는 종혁의 텔레파시를 감지한 소라는, 역전의 기회를 잡기 위해 민성과 부딪혔다.

상처를 입더라도 절대 민성이 뒤를 돌아보게 하지 않도록 쓰러지지 않고 몸을 들이밀었다.

그 모습은 처절했지만, 민혁과 종혁은 둘 다 인기척을 내지 않기 위해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종혁은 민혁에게 계속해서 마력을 보내주고 있었고, 민혁은 빈틈을 노리기 위해 마법을 겨냥했다.

기회는 한순간이다. C급 열 명이 달려들어도 어림도 없는 게 B급의 힘이다. 한 번 실수한다면, 방심하지 않는 민성에게 모두가 당할 게 뻔한 일이었다.

[포기하지 마.]

소라가 퉤, 하고 피를 내뱉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미 싸움의 양상은 민성의 화풀이나 다름없었다. 민혁과 종혁이 지금 당장에라도 달려오고 싶어 하는 게 보였다.

소라는 텔레파시를 통해 아이들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이길 수 있어. 포기하지 말고, 좀 더 기다려.]

민혁의 마법의 위력은 서한도 인정하는 수준이었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타격시킨다면, 아무리 B급이라 한들 큰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하, 끈질기네.”

민성이 후우, 하고 숨을 내뱉었다. 수분의 전투에도 소라는 무너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꿋꿋하게 버티며 다시 서는 소라를 보며, 민성은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졌어. 적당히 하지그래?”

“닥쳐. 네 앞에 고개 숙일 바엔 죽고 말겠어.”

“그럼 죽든가.”

“윽!”

민성의 주먹을 가까스로 피한 소라가 뒤로 도약했다. 다행인 점은 민성이 강한 힘을 가진 것에 비해, 무술을 하나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의 공격은 위협적이지만, 그렇다고 못 피할 정도로 까다로운 것은 아니었다.

몇 번이고 이런 식으로 회피하니, 짜증이 오른 민성이 뒤로 물러난 소라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다시 방어하려는 소라의 양팔을 잡아챘다.

“이러면 못 움직이겠지?”

갑작스러운 공격에 반응하지 못한 소라가 팔을 풀려 애썼지만, 힘의 차이로 인해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하면 될걸.”

민성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소라의 손목을 한 손으로 잡아채고 주먹을 들었다. 아예 도망갈 구석을 주지 않겠다는 그의 의도였지만, 그 와중에 소라는 웃었다.

“너무 가까운 것 아냐? 개자식아.”

“뭐?”

[아아-!]

지지부진한 전투로 잊고 있던 소라의 능력이 다시 발동되었다. 목소리를 단숨에 증폭시켜 그의 귀에 충격을 주려는 의도였다.

깜짝 놀란 민성이 저도 모르게 귀를 손으로 막았다.

“이게……!”

하지만 손으로 귀를 막았다 한들, 다리를 못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능력을 사용하느라 잠깐 경직된 소라를 향해 민성이 발을 들었다.

방어를 푼 지금, 저 공격에 당하면 쓰러질 게 분명하다. 하지만 소라는 능력의 사용을 멈추지 않았다.

완벽하게 등 뒤가 빈 지금이 기다리던 기회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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