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37화
‘오랜만입니다. 누님.’
‘그래.’
수척해진 바제트는 자신을 노려보는 남동생을 마주했다. 성인이 되고서도 뚜렷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해 가주 후계자의 자리를 박탈당한 그는 더 이상 예전처럼 다정한 가족이 아니었다.
‘곁에는 누구지?’
‘제 전속 마법사입니다. 아시다시피 제 건강이 좋지 않아서요. 누님과는 다르게.’
‘……그래.’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던 그는 의사나 마법사를 끼고 살아왔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마법사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굳이 캐물을 생각이 없던 바제트는 그 자리를 떠났다.
‘아버지의 묘에 가시겠습니까? 한 번도 못 가보셨지요?’
‘……나중에.’
가주는 바제트가 전쟁을 하고 있던 도중에 오랜 지병으로 죽었다. 동생이 후계자인 그녀를 대신해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다고 전달받았지만, 당시에 바제트는 전장에서 생사를 오가고 있었다.
결국 아버지의 마지막도 함께해 주지 못한 후계자가 되고 말았다.
동생이 말하고 싶었던 건 그것이었겠지.
“…….”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자 가슴이 아파왔다. 습관처럼 눈을 비비고 싶은 진희였으나, 움직일 수 없어 결국 한숨만이 나올 뿐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폐인처럼 살아가던 바제트의 죽음이 코앞이다.
‘누더기의 기사가 입장하십니다!’
‘아하하하!’
바제트의 가주 취임식이 거행되는 날이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있는 바제트의 모습이 보였다.
다림질하지 않아 구겨진 기사 정복을 입고 가만히 술잔을 들고 있는 바제트가 케네스를 바라보았다.
전쟁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때와 다르게 살도 쪘고, 좀 더 카리스마 있는 얼굴을 하고, 멋들어진 복장을 입은 그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동기 기사로서 같이 수련하고, 서로 제국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했던 적이 있었다.
케네스는 바제트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고, 바제트도 그것을 마냥 거부하진 않았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바제트는 케네스가 자신이 생각하던 군주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약했구나.”
어느새 바제트와 동화된 진희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강한 사람이 아니었어.”
케네스는 강인하지 않았다. 주변의 눈치를 보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소년이었다.
무뚝뚝한 표정과 화려한 의상 뒤에 숨겨진 불안한 어린 시절 케네스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아픔을 겪고 있는 바제트만이 그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모두, 감사를 표한다.’
케네스는 가만히 바제트를 바라보았다. 무감정하고 건조한 눈동자는 다른 이들을 살펴보다가도 결국 바제트에게 돌아갔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바제트는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그는 바제트의 손아귀에 있는 술잔을 계속해서 주시했다.
‘과음은 하지 말도록.’
마시지 말란 뜻이다.
‘과음하면 내일이 힘드니 말일세.’
그 술잔을 내려놓으란 말이었다.
‘내가 전쟁터에 있었을 땐, 이런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지. 목숨이 위태로워지니까.’
술 안에 든 것이 독이란 이야기였다.
바제트는, 진희는 내심 쓰게 웃었다. 케네스의 배려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술을 마시지 말란 신호를 보냈다.
“지쳤는걸.”
하지만 그런 신호를 알아들었음에도, 바제트는 술잔을 위로 들었다.
모든 게 힘들었다. 바제트는 이 상황을 바꿀 의지를 잃어버렸다. 그저 이 기나긴 인생이 끝나길 바랐다.
그녀는 독주를 천천히 입에 담았고, 온몸에 마력을 의도적으로 풀어 헤쳤다. 독이 몸에 스며들기 쉽게 만든 것이다.
속이 끓어오르는 듯한 고통이 그녀에게 엄습했다. 가슴팍부터 시작된 고통은 손끝, 발끝까지 파고들어 그녀를 쓰러지게 만들었다.
적군의 내로라하는 기사들도 그녀의 무릎을 꿇게 만들지 못했으나, 제국이 준비한 독에 검성은 지고 말았다.
감겨지는 눈. 새까맣게 변하는 광경 속에서, 진희는 죽음을 맞이했다.
죽었다고 생각했다.
“……뭐야?”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분명 바제트의 인생은 끝을 맺었다. 배신을 당해 독주를 마시고, 그녀의 영혼은 고통 속에서 다시 환생해야 했다.
그런데 새로운 기억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녀가 눈을 뜬 곳은 황야였다.
“여긴…….”
그 황야에서, 바제트는 기사들을 보았다. 정체불명의 고물로 만든 쓰레기 같은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들이 보였다.
바제트는 이들이 제국의 수도를 습격했다는 ‘대악마의 부하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대악마로 불리던 되살아난 바제트가 기사들에게 경례를 받고 있었다.
“너희는…….”
“일어나셨습니까, 단장님.”
“……헨즈.”
그녀를 맞이한 건 적룡 기사단이었다. 헨즈와 그의 동료들이 무릎을 꿇고 진희를 올려다보았다.
입이 열려도 목소리가 나오진 않았다. 바제트의 몸을 움직이는 건 그녀 자신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그녀를 조종하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바제트의 움직임을 보고 단장이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했는지, 고철을 입은 기사단원들이 그녀를 애탄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복수의 때가 왔습니다.”
“아니야, 헨즈. 난 복수할 생각이 없어.”
진희의 목소리는 헨즈에게 들리지 않았다. 회랑에서의 회상임을 잊어버린 그녀의 공허한 목소리를 듣지 못한 헨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을 배신한 제국을 치겠습니다.”
“헨즈. 그만둬.”
“걱정 마십시오, 단장님. 누구도 우릴 막을 수 없습니다. 썩어빠진 중앙의 귀족들은 용의 발톱에 갈가리 찢길 것입니다. 적룡의 발톱을 막을 방패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헨즈의 뒤를 이어 모든 기사가 무기를 들었다. 고철로 만들어진 갑옷 안에서 보이는 흉흉한 안광이 진희를 바라보았다.
“다시 살아 돌아온 당신의 의지라 믿겠습니다.”
어느새 진희의 눈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기사단의 결말을 알 것 같았다. 바제트를 향한 충성심으로 시작된 이 반란은, 결국 처참한 방식으로 매듭지어질 것이다.
“사랑합니다, 우리의 단장이시여. 당신을 위해 이 모든 것을 견디겠습니다.”
“날개를 펴라.”
“날개를 펴라!”
헨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적룡 기사단은 출전의 대사를 읊었다. 적룡 기사단이 공격할 때 읊는 기사의 기도문이었다.
“폭풍을 두려워 말고 나아가라! 등 뒤의 화살 비를 막아줄 동료를 믿고, 눈앞의 창끝을 노려볼 기사도를 갖추어라! 날개를 들어, 불을 내뿜어 승전고를 알려라!”
“제국을 위하지 아니하며!”
마지막 문구는 분명 ‘제국을 위해서’였으리라.
하지만 제국에 반란을 위하여, 기도문을 고친 헨즈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전진!”
기사단이 돌진했다. 죽음을 위해, 그리고 복수를 위해 사지로 달려 나가기 시작한다.
그들의 중심에서 같이 달리기 시작한 진희의 뺨에는 눈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헨즈, 명령이다, 멈춰.”
울먹이는 진희의 목소리가 헨즈에게 닿았던 것일까.
헨즈는 돌진하던 와중에 고개를 돌려 진희를 바라보았다. 투구를 썼기에 표정조차 확인할 수 없음에도, 그는 밝고 쾌활한 얼굴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환상임이 분명한데도, 헨즈는 진희의 목소리에 대답했다.
“명령 불복종을 용서하십시오, 단장님.”
그렇게 제국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누구도 바라지 않던, 그리고 진희가 그토록 마다하던 피의 전쟁이 또다시 시작되고 말았다.
* * *
대악마의 군대가 제국의 수도를 함락하는 광경을 보며, 진희는 과거 수정구의 던전에서 언데드 상태의 바제트가 왜 울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바제트는 이런 사태를 원하지 않았다. 중앙 귀족들에게 원망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녀는 일찍이 목숨을 끊어 이 끔찍한 제국과 이별하려 했다.
제국의 멸망을 바란 건 아니었다.
“검성이시여, 우릴 용서하십시오.”
자신을 따랐던 노장들이 스스로 목을 내어주는 꼴도 보고 싶지 않았다.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죽어간 과거의 부하들을 내려다보며, 투구 안에선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다.
시체임에도 감정에 반응하는 것은 아직 바제트의 영혼이 시체에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제발 그만둬.’
진희는 바제트의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 바제트와 동화된 진희는 시체에 남은 바제트의 잔여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더는 죽이고 싶지 않아.’
바제트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이 끔찍한 학살극을 멈추기를 바라며,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수도가 함락되었다.
결국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제국은 무너졌다. 그것도 자신이 휘두르던 검의 힘에 이기지 못하여, 꼴사나운 최후였다.
비명을 지르던 황제의 목에 검을 휘두르고, 황태자 앞에 섰다.
케네스는 죽음을 받아들였다. 모든 호위 기사들을 물러나게 한 후, 연병장에 서서 바제트를 기다렸다.
“미안하다.”
그 말이 끝이었다. 그는 가타부타 변명하지 않았고, 그간 바제트에게 보여준 적 없었던 서글픈 웃음을 짓고 죽음을 맞이했다.
천 년 제국의 황족도 결국 붉은 피를 흩뿌리며 죽는 것은 천민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황궁마저도 제압하고 나자, 왕좌 앞에서 바제트와 적룡 기사단은 다시 마주했다.
“복수가 끝났습니다, 단장님.”
헨즈가 앞으로 나왔다. 그의 얼굴도 편해 보이진 않았다. 피가 얼룩진 뺨은 핼쑥했고, 분노에 빛나던 눈동자는 어느새 빛을 잃었다. 그도 기나긴 학살극에 지친 것이다.
“부디, 이 복수로나마 편안한 죽음이 되시길 빕니다.”
그 말을 끝으로 모든 기사가 경례를 올렸다. 바제트는 아무런 움직임 없이 그 경례를 받았다.
하지만 진희는 바제트가 경례를 받기 위해 멈춰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바제트는 그저 다음 ‘명령’이 없기에 멈춘 것뿐이다.
그녀의 몸은 이미 자유를 상실한 언데드였기에, 그녀를 부리는 술사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생하셨군요, 다들.”
피가 얼룩지고 적막이 깔려 있던 왕좌의 방에 한 사내가 들어왔다.
헨즈는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제니트 도련님.”
“도련님이라니, 가주님이라고 불러야지. 배은망덕한 것.”
낄낄 웃는 사내의 이름은 제니트, 바제트의 남동생이자 그녀를 독살한 주범 중 하나였다.
그는 비웃음을 지우지 않으며 기사들 사이를 걸어왔다. 그의 뒤편엔 검은 로브를 쓰고 있던 마법사, 그리고 적룡 기사단의 부단장 미카일이 함께였다.
미카일은 헨즈의 증오 어린 눈빛을 나긋한 미소로 받아치곤, 바제트의 곁에 섰다.
“당신의 곁에 서는 것도 오랜만이군요.”
작게 중얼거린 미카일이 제니트에게 말했다.
“그럼 단장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
“날 단장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난 기사가 아니야.”
“후후, 기사와는 상관없습니다.”
미카일의 단장이란 호칭에 제니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진희는 그것을 보고 미카일이 적룡 기사단의 단장 호칭을 사용한 게 아니라, 테러범 조직의 단장을 뜻하는 것임을 눈치챘다.
“당신이 단장의 환생임은 변치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