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36화
“죽이진 말라고 했으니, 팔다리 정돈 잘라도 되겠지.”
살기 어린 눈으로 소라를 바라보던 민성이 앞으로 돌진했다.
소라의 팔을 노리며 검을 내려찍었다. 하지만 소라는 재빠르게 검을 피해, 민성의 복부를 가격했다.
“……!”
명치를 타고 오르는 충격에 민성이 잠시 경직되었고, 소라는 곧장 다리를 걸었다. 그리고 휘청거리는 그의 턱을 후려갈겼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과정이었다. 대련을 하면서 몇십 번이고 연습했던 반격이다.
“이게……!”
하지만 민성은 아이들처럼 바로 쓰러지진 않았다. 턱을 가격당한 충격으로 머리가 흔들렸지만, 그는 곧장 가드를 올리고 뒤로 물러났다.
소라의 순간적인 반격에 대응하지 못한 것에 그는 충격을 먹은 얼굴이었다.
소라는 민성이 재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다시 그에게 공격하기 위해 빠르게 접근했다.
“크윽!”
민성과 소라의 전투 주도권은 소라가 갖고 있었다. 분명 마력 수준은 민성이 높았지만, 근 1년 동안 인간과의 격투에 몰두했던 소라는 민성의 움직임을 모두 읽어냈다.
진희와 서한에게 눈이 좋다는 평가를 받던 소라였다. 민성의 직선적이고 단순한 공격을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
그리고 이능력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민성이 정신을 차리고 반격을 하려 하면 바로 능력을 사용해 그의 귀에 충격을 가했다. 귀를 파고드는 정체불명의 고음에 민성의 몸이 경직되었고, 그 틈을 노린 소라가 공격을 가했다.
노도와 같은 공세에 점차 밀리기 시작한 민성이 결국 먼저 물러섰다.
“헉, 허억.”
소라의 방어를 뚫을 방법이 없었다. 빈틈을 노리는 소라의 공격을 피하지도 못했다.
자신이 질 수도 있다는 예감에 민성이 믿기지 않는 얼굴로 소라에게서 멀어졌다. 한참의 공세를 취한 나머지 숨이 가빠온 소라가 심호흡을 하며 민성을 노려보았다.
“대체 어떻게…….”
“당신 되게 약하네.”
“…….”
민성은 이를 갈 뿐 소라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소라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자신보다 강하리라 생각했던 인생의 원수가, 정작 맞서고 보니 별 존재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길 수 있다.
매일 밤 나타났던 악몽의 원인을, 이렇게 손쉽게 이길 수 있다니.
소라의 얼굴에 기쁨과 통쾌함이 떠오르는 걸 보며 민성이 분노에 몸을 떨었다.
“웃기지 마, 난 지지 않아.”
그리고 품속에 손을 넣었다.
‘다시 사용하면 죽을지도 몰라.’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카트리지를 사용했을 때가 떠올랐다.
마력 회로가 뜯어고쳐지는 고통, 후유증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아니야.’
하지만 사용해야 한다. 민성은 증오에 찬 눈길로 소라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인생을 망친 범인이 눈앞에 있는데, 목숨 따위 몇 번이고 바칠 수 있었다.
카트리지를 두 번 사용하게 되었을 때의 후유증을 정재민이 설명한 바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이미 복수는 인생의 목적이 된 탓이다.
“죽여 버리겠어.”
그 말을 끝으로, 민성은 가슴팍에 카트리지를 박아넣었다.
* * *
‘검을 들 생각이더냐?’
‘네, 전 기사가 되어야 해요.’
기억의 회상이 시작되었다. 회랑이란 이름이 지어진 이유를 알겠다.
어렸을 적부터 죽기 직전까지의 기억들이 선형으로 이어져, 마치 박물관의 회랑을 관람하는 기분이었다.
시작은 기사가 되려 수련을 시작한 어린 시절이었다.
‘이분은 반드시 기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녀, 바제트는 기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적룡 기사단의 단장이 보였다. 그는 바제트의 재능을 알아보고 곧장 가주에게 달려가 말했다.
세상에 둘도 없을 재능의 천재가 나타났다고. 그녀가 여성이라 해도 상관없다며, 사교계에 힘쓸 시간에 수련을 하는 게 제국을 위한 일이라 주장했다.
처음엔 반대하던 가주도 결국 바제트의 요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도 바제트의 재능은 비상했다.
단 석 달 배운 검술로 수습 기사들을 때려눕혔으니, 그녀의 재능은 검증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기사로 임명받던 시기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제국 기사의 호칭을 받게 된 그녀는 세간에 주목을 받는 유망주였다.
‘안녕, 바제트 양.’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때가 바로 황태자 케네스와의 첫 만남이었다. 기사 임명식을 하기 위해 황궁에 들어온 바제트를 반긴 건 마찬가지로 기사 정복을 입고 있던 케네스였다.
성인 수준으로 키가 컸던 케네스는 작은 신장의 바제트를 보며 신기하다는 눈빛이었고, 바제트는 귀족다운 정중한 인사를 하고 그를 지나치려 했다.
‘이젠 바제트 양이 아니라 바제트 경인가?’
‘……예.’
‘그런데 괜찮겠어? 그 키면 단상에 올랐을 때 검을 받기 힘들 텐데.’
황제 앞의 단상에 올라 무릎을 꿇은 채 검을 받는 게 기사 임명식의 순서였다.
바제트의 키라면 다른 기사들의 덩치에 밀려, 손을 뻗어도 검을 받기 힘들 게 뻔했다.
케네스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바제트가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신경 끄십쇼. 서서 받든 앞구르기 해서 받든 내가 알아서 하니까.’
한참 자신감이 넘치던 시절의 바제트는 그렇게 황태자를 일갈했다.
호기심 어린 질문에 독설이 날아올 줄 몰랐던 케네스는 멍하니 바제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땐 아직 당돌했네.”
그 회상을 보고 있던 진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몸은 움직이지 않는데, 눈과 귀만이 열려 있어 주변을 살피는 게 가능했다. 마력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전생의 자신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기억의 누락은 없는데 말이지.”
다음 기억을 바라보며 진희가 중얼거렸다. 클로이는 모든 기억을 되찾으면 전생의 자신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말했다.
하지만 진희는 분명 바제트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죽기 직전까지, 기억의 누락은 조금도 없었다. 지금 보고 있는 풍경도 모두 진희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전쟁에 나가야 한다고?’
‘네.’
‘설마, 황태자의 기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냐.’
가주가 허탈한 얼굴로 바제트에게 말했다. 늙기 시작한 그는 주름이 가득한 눈으로 바제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어엿한 기사가 된 바제트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근으로 인해 농경지가 필요합니다. 국고도 비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우리가 알 바가 아니다. 우린 제국의 안전을 위하는 거지, 안방 살림까지 참견할 권리는 없어.’
‘백성들의 평화를 위해선 어쩔 수 없습니다.’
‘진정 기사가 다 되었구나.’
가주는 피곤한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이래서 바제트는 기사가 아니라 귀족이 되길 원했다.
가문의 이득이나 개인의 안위를 제쳐두는 바제트의 행보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물론 기사로선 더할 나위 없이 모범적인 자세였다. 그녀의 자신만만한 성격에도 어울렸다.
‘전쟁을 시작하면, 네 생각처럼 끝내긴 어려울 것이다. 영토를 얻는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야.’
‘전 태자 전하를 믿습니다.’
‘정말이냐? 그 태자를 믿는다고?’
‘예.’
‘자만이 네 눈을 가렸구나.’
가주는 허허 웃으며 바제트에게 나가라 손짓했다. 바제트는 경례를 올린 후 바깥으로 나갔다. 이젠 인사 예절마저도 부모와 자식이 아닌, 가주와 기사로서 주고받게 되었다.
‘황태자, 케네스…….’
가주가 원망스럽다는 듯이 케네스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케네스가 무능력한 황태자는 아니었다. 황태자란 칭호에 걸맞은 능력을 갖추었다. 문무겸비란 말이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개인의 능력으로 정리할 수 없는 게 복잡한 황궁의 정치였다. 그의 뒷덜미를 노리는 중앙 귀족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아직까지 큰 활약이 없어 놔두고 있을 뿐, 전쟁을 시작하는 경우엔 온갖 하이에나들이 그를 노릴 것이다.
승리를 해도 문제였고, 패배를 하면 끝장이었다.
‘……무사히만 돌아오거라.’
가주가 한숨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을 문 바깥에 서서 듣고 있던 바제트가 그제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윽.”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진희는 머릿속을 파고드는 두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좌절과 공포, 절망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머릿속을 휘감기 시작했다.
“설마 환생자의 기억이란 게…….”
이런 걸 뜻하는 것이었나, 진희가 고통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기억의 회랑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도구가 아니었다. 그 시절의 감정까지 모두 불러일으키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감정과 기억을 각인시켜, 전생자로서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도구였던 것이다.
“하필이면 전쟁이네.”
바제트가 변하게 된 계기가 전쟁이었다.
원치 않은 민간인 학살, 동료의 배신, 동료를 버리고 간 후회, 살려달라 빌던 적군의 소년병, 바제트의 기사도를 부숴 버릴 처참한 광경이 이어졌다.
전쟁은 계속해서 승리하고 있었다. 바제트가 패전하는 전투는 드물었고, 그녀가 이끄는 군대는 대부분 승리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승리를 한다고 해서 피해가 없던 건 아니다.
‘단장님,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갈 수 없다. 모든 공방이 허사가 돼.’
‘하지만 모두가 지쳤습니다.’
‘주둔할 병력만 있다면…….’
적군의 진영까지 너무 깊숙하게 파고든 상태였다. 여기서 물러나면 지금껏 차지했던 영토를 모두 빼앗기게 될 것이고, 그렇다고 남아 있자니 병사들이 피로감에 지쳐 쓰러질 듯 보였다.
돌아가면 결국 지금까지의 희생이 허사가 되는 것이다.
주둔지를 마련할 수 있는 병력이 지원을 온다면 잠시 동안 퇴각해도 될 텐데, 어찌 된 영문인지 본대에선 지원 부대가 오질 않고 있었다.
계속되는 수비전에 지치던 무렵, 전령이 황태자가 찾아왔음을 알렸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바제트는 밝은 안색으로 그를 맞이했다. 그가 병력을 이끌고 왔기 때문이다.
이제야 회군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인사하는 그녀를 보고, 케네스는 무뚝뚝하게 노고를 치하했다.
‘고생이 많다, 바제트 경. 그대를 위해 보급을 준비해 왔다.’
‘예. 그럼 군을 잠시 회군시켜…….’
‘계속해서 전선에서 활약하길 기대하지.’
‘……예?’
하지만 바제트의 기대와 달리, 케네스는 바제트에게 더 싸울 것을 명령했다.
‘본대는 현재 다른 전선에 병력을 파견 보내야 하여 지원이 어렵다. 이해해 주길 바란다.’
‘…….’
‘제국을 위해서, 좀 더 힘써주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케네스를 호위하기 위해 온 병력만 해도 바제트의 병사에 버금가는 전력이었다.
그들을 이곳에 남겨두고 바제트가 케네스를 호위하며 돌아가면 될 텐데, 케네스는 자신의 호위를 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금 보니, 다 귀족 자제들이구나.”
진희가 짜증 어린 눈빛으로 케네스의 호위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당시엔 충격을 받아 살펴보지 못했던 점이다.
황태자의 호위들은 모두 중앙 귀족의 자제, 혹은 연이 닿아 있는 소위 말하는 ‘피가 진한’ 기사들이었다.
결국 끼리끼리 전쟁 구경하러 온 것이었다.
또다시 실망감과 절망이 진희에게 닥쳤다. 케네스에 대한 묘한 분노, 제국에 충성하고 있던 그녀의 기사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전쟁이 끝났다.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처참한 전쟁, 이후 골든 웨이브, 백자 전쟁이라 불렸던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바제트는 제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바제트를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