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35화
이선이 곧장 정재민에게 달려들었다. 정재민의 품으로 파고들어 곧장 그에게 주먹을 휘둘렀지만, 그는 조금의 당황한 기색도 없이 이선의 손목을 잡아챘다.
“윽!”
“실망인걸. 고작 선택한다는 게 날 공격한다는 거야? 네가 날 이길 리 없잖아. 아, 아니면 시간이라도 끌 생각인가?”
이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정재민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수준 차이가 하늘과 땅이다. C급인 그녀의 힘으로 A급인 정재민을 당해낼 순 없었다.
이건 그저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려는 심산이었다.
“흐음, 그런데 어쩌나. 내 부하들이 이미 애들을 잡아채고 있을 텐데.”
이미 보육원 안쪽에선 아이들의 비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들은 이선이 계속해서 주먹을 휘두르려 했지만, 정재민은 그녀의 양 손목을 잡아채고 놔주지 않았다.
이선의 손목에 정재민의 손자국이 강하게 남았고, 이윽고 핏방울까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선은 반항을 멈추지 않았다.
“끈질기네. 내가 아는 이선이는 이렇게 바보가 아니었는데 말이야.”
“변태 같은 새끼.”
“뭐?”
“하나같이 쓰레기 같은 말만 내뱉고, 그렇게 센 척하면서 말하면 누가 넘어갈까 봐? 어차피 서한 씨랑 단장님 없는 틈을 노린 주제에!”
이선의 독설에 정재민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그가 알던 이선은 침울하고 수동적인 여성이었다.
B급이 되고 싶단 집착에 시달렸던 그녀는 지엑스에 있던 도중 정재민에게 욕 한 번 한 적 없었다.
그가 연인이라는 허울 좋은 관계를 이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구나.
“많이, 변했구나? 우리 이선이.”
“난 변하지 않았어. 당신이 날 멋대로 판단한 것뿐이지.”
정재민이 이선의 얼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한 뼘 남짓한 거리에서 이선의 얼굴을 바라보던 정재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우리 이선이는 그런 나쁜 말 안 하는데 말이야. 반말까지 찍찍 내뱉고.”
퍼억!
“윽!”
정재민이 무릎을 세워 이선의 배를 강하게 후려쳤다. 뒤로 떨어져 나간 이선이 크게 기침하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교육을 다시 해야겠구나.”
“웃기지…… 마.”
“내 애인은 그래선 안 되는데 말이야.”
사이코패스 새끼. 이선이 고통을 꾹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웃음이 가신 정재민이 무감정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구도가 너무나도 싫었다.
정재민은 이선을 하나부터 열까지 재단하려고 했다. 입는 옷, 말투, 걷는 방식, 심지어 감정까지 조종하려 들었다.
그의 비정상적인 집착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것에 강박증을 가진 인간이었다.
그런 그에게 얼마나 얽매이며 살았던가. B급이 되게 해주겠다는 거짓에 속아 넘어간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며, 이선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가 지끈거렸지만 꾹 참고 자세를 잡았다.
진희가 알려주었던 체술의 자세였다. 비록 그녀의 무기는 이 자리에 없지만, 맨손인 건 정재민도 마찬가지다.
“정말 겁이 없네. 나랑 싸울 셈이야?”
“나불대지 말고 덤벼. 고자 새끼.”
“……좋아.”
버릇을 고쳐주지, 그 말과 함께 정재민이 달려들었다. 앞선 이선의 공격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른 몸놀림이었다.
‘아래.’
하지만 이선은 당황하지 않고 공격을 피했다.
체술을 가르쳐 줄 때, 진희는 말했었다.
‘마력이 많다고 몸놀림이 특별하다거나, 센스가 좋은 건 아니야. 속도와 힘의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몸을 움직이는 건 또 다른 재능이니까.’
정재민은 이선과 같은 전사 계열의 헌터였다. 또한 탱커 직군에 몸담았던 인물이다. 특별한 검술이나 체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물론 힘과 속도는 이선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진희와 대련했을 때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어쭈.”
자신의 공격을 피한 이선을 보며 정재민이 피식 웃었다. 이선이 공격을 피했다는 것에 기뻐한 것도 잠시, 정재민은 다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윽!”
한 번의 공격을 피하더라도 곧장 다른 공격이 치고 들어온다. 처음엔 요령 좋게 피하던 이선이었으나, 계속해서 이어진 공격에 결국 방어가 뚫리고 말았다.
“커헉!”
“계속 피할 수 있을 줄 알았어? 어?”
역시나 안 된다. 이길 수 없다. 실력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잠깐의 특훈으로 얻은 체술로는 어림도 없었다.
두 번, 세 번, 연속으로 맞기 시작한 이선이 가드를 올린 채 뒤로 물러섰다.
“애인한테는 얼굴을 보여줘야지, 안 그래?”
“아아악!”
강제로 팔을 열어젖힌 정재민이 이선의 목을 쥐었다.
“역시 넌 그 얼굴이 어울려.”
열등감과 비참함, 분노와 증오가 범벅된 이선의 얼굴을 보며 정재민이 희열 어린 미소를 지었다.
“……!”
지금 당장에라도 그녀의 입술에 키스할 것처럼 다가가던 그는, 갑자기 이선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뒤로 물러섰다.
“지엑스는 하나같이 변태 새끼들만 있나 보군요. 정말이지.”
방금까지 정재민이 있던 자리에 세찬 바람의 칼날이 지나갔다. 가만히 서 있었다면 그대로 목이 잘렸을 위치였다. 정재민은 바람이 불어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혜수.”
“언제 봤다고 반말인가요, 양아치 헌터님.”
그곳엔 헌터 길드의 길드장이자 정령사, 조혜수가 서 있었다.
정장을 입고 가지런히 머리를 정리한 중년의 여성, 혜수는 뚜벅뚜벅 걸어와 이선의 앞을 막았다.
“힘들었죠?”
“누, 누구세요?”
“당신네 단장의 동맹이랍니다.”
혜수가 손가락을 튕기자, 이번엔 따뜻한 바람이 불어 이선을 감싸 안았다.
이선을 그대로 들고 영감이 누워 있는 곳까지 배달시킨 혜수가 정재민을 바라보았다.
“무능한 길드장님께서 움직이다니, 별일이네?”
“제 남편이 기분이 이상하다고 보채서 말이에요. 한번 마실 나올 겸 나와 봤답니다. 덕분에 당신 같은 쓰레기를 버릴 수 있게 돼서, 참 다행이네요. 길거리는 깨끗해야죠.”
사실 진희의 언질이 있었다. 유나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던 진희는 혜수에게 보육원의 존재에 대해 말한 적 있었다.
구체적인 도움을 바란 건 아니지만, 진희는 만약에 자신이 없어졌을 때 보육원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혜수에게 수습을 바랐다.
“하하, 하지만 너무 늦게 왔는걸. 이미 일은 끝났는데 말이야.”
비뚤어진 웃음을 지으며 정재민이 턱 끝으로 보육원을 가리켰다. 지금쯤 보육원에 들어간 그의 부하들이 아이들을 실어 나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닌 것 같은데요?”
“뭐?”
“으아아악!”
그때, 보육원 문에서 지엑스의 헌터들이 바람에 떠밀려 나왔다. 거센 바람은 그들을 휴짓조각처럼 뭉쳐 보육원 앞마당으로 밀어버렸다.
“정령……!”
-흐음, A급들이 많네.
인간 형태의 정령이 보육원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혜수의 정령이자 남편, 김방인이었다.
“리더 실격이네요. 노는 것에 너무 열중한 것 아닌가요?”
후후, 혜수가 우아하게 턱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정재민으로선 이해가 가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의 부하들은 기본 B급 이상의 실력자들이었다. 그리고 혜수의 등급 또한 그처럼 A급.
그녀가 다루는 정령이 아무리 강한다 한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리는 없었다.
숨겨둔 힘이 있었던 건가, 정재민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김방인을 노려보았다.
“목숨은 빼앗지 않겠어요. 전 당신처럼 깡패가 아니니까. 돌아가세요.”
주도권은 넘어왔다. 혜수가 느긋한 얼굴로 던진 말에, 정재민은 사납게 눈초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리고 품속에서 카트리지를 꺼냈다. 정재민뿐만이 아니라, 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부하들도 각자 카트리지를 꺼내 보였다.
“그게 뭐죠?”
“기적의 약.”
정재민이 카트리지를 자신의 심장에 박았다.
* * *
“오랜만이네.”
한편 강당에선 또 다른 대치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소라는 암담한 얼굴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청하와 민혁, 종혁이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박민성.”
소라가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앞엔 박민성이 검에 묻은 피를 털며 웃고 있었다.
삼인방과 청하는 오늘도 강당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바깥에서 소란이 들리자 강당을 나가 상황을 확인하려 했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민성과 마주치게 되었다.
놀란 아이들과 달리 대비를 하고 있던 박민성은 아이들을 곧장 공격해 왔다.
앞에 있던 청하가 기습당해 가장 먼저 쓰러졌고, 종혁과 민혁도 검에 찔려 바닥을 나뒹굴었다.
‘출혈이 심해.’
소라가 땅바닥에 흐르는 아이들의 피를 보며 생각했다. 헌터가 되어 체력이 강해졌다 한들, 일정 이상의 피가 빠져나가면 죽는 건 일반인과 똑같았다.
어깨나 다리에 상처를 입은 아이들은 시급히 치료를 받아야 했다.
“꼭 만나고 싶었다. 장소라.”
“…….”
“내 인생을 망친 널.”
예전에 알던 민성은 이제 없었다. 호남상의 쾌활한 웃음은 온데간데없고, 복수심과 증오만이 가득한 무표정의 민성을 보며 소라가 말했다.
“누가 누구 인생을 망쳤다는 거야? 뻔뻔하긴.”
“너희가 그 여자만 끌어들이지 않았어도, 내가 이 꼴이 되지는 않았어.”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자기 멋대로 생각하는 그를 보며 소라가 버럭 소리 질렀다.
“네가 먼저 우릴 배신했잖아!”
“이깟 고아원에서 탈출할 기회를 준 것뿐이야.”
기회? 소라가 민성의 자기합리화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조폭들에게 착취당하고 지하 감옥에 갇히는 걸 탈출이라 부르나 보지?”
“그래. 자기 능력도 활용 못 하고 고아원에서 썩는 것보다, 누군가에게 유용한 도구가 되는 게 낫지 않겠어? 난 그저 부모 없는 불쌍한 아이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준 거야.”
“당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물론이지.”
진절머리 난다는 듯 어깨를 움츠린 소라를 보며 민성이 처음으로 웃었다.
“우리와 지냈을 때도, 우리가 불쌍한 애들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럼 아냐? 용돈 없다고 징징거리고, 매일 보육원에서 나갈 일만 꿈꾸던 너희잖아. 그 꿈을 이루게 해준 건데, 뭐가 불만이야?”
“……개자식.”
애당초 민성은 아이들을 이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조폭들에게 아이들을 팔아넘긴 그는 이미 자기합리화로 무장해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인간쓰레기, 소라가 주먹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너희에게 복수하고 나면, 그 여자도 내게 한 짓을 후회하겠지.”
“지랄하지 마. 언니가 당신 같은 쓰레기 때문에 후회할 필요 없어. 당신은 여기서 나한테 죽을 거니까.”
“……하하, 재밌는 농담이야.”
민성 또한 검을 들었다. 그의 눈엔 소라의 마력 수준이 뻔히 보였다. C급에 근접해 있지만, 자신보단 낮은 수준이다.
게다가 소라가 헌터가 된 건 길어봤자 1년, 자신과는 경험치가 다르다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