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34화
이영한은 ‘악역이 된 브리온을 후계자가 잡아먹는다’는 계획을 짰다.
말하자면 만들어진 악역이었다. 인체 실험을 하는 악당 기업 브리온을 금강이 물리치고, 그들을 잡아먹어 더욱 강한 금강으로 탈바꿈한다.
굳이 이런 복잡하고 낭비되는 계획을 짠 것은, 오로지 후계자들을 위해서였다.
“너희는 세간에 알려진 얼굴이 아니다. 신분을 속이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지. 온갖 악행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브리온의 주주가 되어, 금강과의 합병을 진행하는 방법도 있다. 아니면 브리온을 무너뜨린 다음 헌터 시장의 지분을 미리 장악해, 금강의 독점 체재로 만드는 수도 있지. 난 브리온이 무너지는 계기를 제공했을 뿐이다. 그렇게 약해진 사냥감을 먹어치우는 게 너희의 일이지.”
“왜…… 굳이 복잡한 방법을 사용하시는 거죠?”
“너희가 경쟁하길 바랐으니까.”
이영한이 실망스럽다는 얼굴로 서한과 세영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먹이가 앞에 놓이면 잡아먹기 위해 경쟁할 줄 알았다. 유럽 지부에 이세영을 보낸 것도 그 이유다. 브리온에 대한 집착을 키우기 위해서였지.”
금강의 유럽 지부가 한창 이름을 날렸을 때, 가장 큰 걸림돌은 브리온이었다.
유럽의 토착 기업인 브리온의 등쌀에 밀려 사업이 중단되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그 일도 모두 이영한의 지시였다. 이세영에게 더 큰 시련을 주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서한, 너도 마찬가지다. 온갖 신입을 영입하는 브리온이 한국 시장에서 세를 키우기 시작할 때, 금강의 이름으로 그걸 막길 바랐지.”
이영한의 마력이 방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살기가 가득한 그의 마력은 서한과 세영의 목을 얽매었다.
“하지만 너희의 행보는 매우 실망스럽더구나.”
세영은 정의와 책임을 내세우며 정부와 싸우거나 방위대 노릇을 하고 있었고, 서한은 보육원에 드나들며 테러범의 자취를 좇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서로 경쟁하고 물어뜯으며 브리온을 사냥하리라 생각했던 그의 예상과는 달랐다.
“운명은 그렇게 정해져 있었는데 말이지.”
실망스럽지만, 동시에 흥미로운 일이기도 했다. 운명이 뒤틀리기 시작한 세상에서 삼라만상의 예측이 언제나 옳았던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큰 오차가 나온 적은 드물었다.
이영한의 인생에서 이런 일은 딱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테러범들이 이시영을 노렸을 때고, 두 번째는 이번 브리온 사태였다.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은 바로.
“서진희, 그녀 때문이더군.”
“…….”
“후후, 눈빛이 제법이야.”
진희의 이름이 나오자 서한과 세영이 동시에 이영한을 노려보았다.
남매에게 살기 어린 눈초리를 받았지만 이영한은 유쾌한 듯 웃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다름 아닌 진희 때문이었다.
진희의 부탁으로 방위대 노릇을 한 세영과 마찬가지로 그녀와 함께 테러범을 수색하던 서한.
결국 브리온을 무너뜨린다는 결론에 도달한 건 똑같았지만, 이영한이 원하는 방식은 결코 아니었다.
서로를 견제하며 싸워야 하는 둘이, 미묘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게 된 것이다. 그 중심엔 진희가 있었다.
“재밌지만, 반길 일은 아니더구나.”
이영한도 진희가 대단한 인물임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힘, 단원을 모집하던 과감함, 제한된 정보로 최선의 선택을 강행하는 자질. 소싯적에 만났다면 경쟁자라고 생각했을 정도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삼라만상을 손에 넣은 지금, 그에게 진희는 한 명의 장애물일 뿐이었다.
자식들이 집착하고 있어 흥미가 돌긴 하지만, 더 이상 놔두기엔 거슬리는 존재였다.
“그래서 처리하기로 했다.”
“뭐라고?”
“자식의 장래를 위해 장애물을 치우는 건 부모가 할 일이니까 말이다.”
그때, 서한의 휴대전화가 세차게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 하자, 이영한이 서한에게 말했다.
“받지 마라.”
“…….”
“명석한 너라면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겠지.”
보육원이 위험하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서한이 눈을 크게 떴다.
진희 일행이 자리를 비웠으며, 보육원에 남아 있어야 할 서한이 이곳에서 다리가 묶였다.
그의 아버지는 진희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그녀를 공격하려 한다면 뭘 먼저 노릴까.
“설마 보육원을 공격하셨습니까!”
“난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랫것들은 다르겠지. 너도 그 여자도 미련하구나. 원한이 남을 수 있는 인연은 빨리 잘라냈어야지.”
금강이 직접 공격하지 않았다면 남은 후보는 브리온, 지엑스, 테러범…… 특정할 수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진희에겐 적이 많았다.
“저희를 이곳에 부른 것도, 이것 때문입니까!”
이영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긍정의 의미였다. 진희를 도울 수 있는 서한과 세영을 이곳에 묶어둠과 동시에 보육원을 방치하도록 만든 것이다.
‘박준은?’
서한은 자신의 빈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박준과 함께 부하들을 보육원에 보냈었다.
‘아냐, 갈 수 있을 리가 없어.’
서한 자신도 이곳에 묶여 있는 상황에서, 그의 부하라 한들 자유로울 리 없었다.
보육원은 지금 완전한 무방비 상태인 것이다.
우웅, 서한의 휴대전화가 계속해서 울렸다. 서한이 다시 주머니에 손을 올리려 하자, 이영한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후계자로 남고 싶다면, 이 일에서 손을 떼거라.”
“……보육원이 공격받는 걸 가만 보고 있으란 말씀이십니까?”
“네 할 일을 하란 뜻이다. 네가 해야 할 일은 브리온을 정리하고 금강을 키우는 것이다. 한낱 여자에게 열중할 때가 아니야.”
서한은 문득 현성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당신의 금강이 그녀의 적이 되더라도, 당신은 그녀의 편에 서줄 건가요?’
아직 대답할 준비가 되지 않은 서한에게, 현성이 다그치는 것만 같았다.
“운명을 따라라. 이서한. 너는 금강의 사람이다.”
운명. 사랑하는 여자. 아버지. 그리고 금강.
서한은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 * *
“누구냐, 너희는.”
“으응? 웬 늙은이가 있는데?”
공원의 그네를 손보고 있던 영감이 인상을 찌푸렸다. 험악하게 생긴 사내들이 보육원의 대문을 부수고 들어오고 있었다.
지금은 감정을 하고 있지만 영가도 한때 헌터였던 인물이었다. 그는 사내들이 모두 한가락하는 헌터라는 걸 눈치챘다.
“아, 영감이네. 저 양반은 가만 놔둬. 무해하니까.”
사내들의 중심에 있던 능글맞은 인상의 사내, 정재민이 말했다.
“인기척은 으음, 저 건물이랑 강당에서 느껴지네. 알아서 흩어지자.”
“이놈들! 내가 누구냐고 묻지 않았느냐!”
“아, 정말이지.”
정재민이 짜증을 내며 영감을 바라보았다. 영감은 어떻게든 사내들을 막기 위해 앞으로 나섰지만, 정재민의 발길질 한 번에 땅바닥을 구르게 되었다.
“어억!”
“노인네, 구르는 것도 느리네.”
정재민이 웃음을 터뜨리며 영감을 바라보았다. 힘을 주지 않은 발길질이라 해도 A급의 헌터가 하면 그것만으로도 흉기다.
영감이 가슴팍을 움켜쥐고 거세게 숨을 쉬었다. 정재민은 ‘그러게 나서지 말지 그랬어’ 하며 그의 머리 위를 넘어갔다.
“저 바깥으로 던져둬. 난 상관없는데, 우리 쪽에도 이 영감 좋아하는 애들이 좀 있거든. 살려는 두자고.”
“네!”
그의 부하들이 영감을 옮기려 했다. 팔과 다리를 들고 던져 버리려 하던 그때, 누군가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만둬!”
영감을 채간 건 다름 아닌 이선이었다. 방금 전까지 뒷마당을 쓸고 있던 그녀는 빗자루를 내팽개치고 달려왔다.
영감을 빼앗기게 된 부하들이 멀뚱히 정재민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냐는 눈빛에, 정재민이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들 가서 일 봐. 얘는 내가 알아서 할게.”
찾으러 가는 수고를 덜었다. 그는 이선에게 두 팔을 벌리며 환영을 표했다.
“오랜만이야, 그렇지? 이선아.”
“왜 오셨습니까?”
“널 보기 위해서 왔지. 왜 그런 당연한 걸 물어?”
정재민이 키득거리며 이선에게 다가왔다. 마치 자신의 품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한 제스처에 이선이 영감을 감싸며 그를 노려보았다.
정재민의 부하들이 보육원 안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지만, 정재민이 이선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이선으로선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돌아가십시오. 곧 이곳의 주인이 올 거예요.”
“누구? 그 여자? 아니면 방위대? 하하, 너도 뭘 모르는구나. 그 녀석들은 돌아오지 않아. 그 녀석들이 간 곳엔 함정이 준비되어 있거든.”
“그런 것에 당할 사람이 아닙니다.”
“글쎄? 브리온의 S급 헌터도 기다리고 있고, 전원 카트리지를 들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렇지만도 않을걸? 아, 카트리지는 그거야. 마력 강화하는 아이템. 잘 알지?”
이선이 이를 갈았다. 진희가 S급에 뒤지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카트리지라고 하는 정체불명의 물건까지 사용한다고 하니 걱정이 생기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뭐 살아오더라도 몇 명 죽지 않을까? 거기 간 사람들이 다 S급, A급 헌터는 아니잖아?”
게다가 정재민의 기묘한 화술도 한몫했다. 그는 쾌활한 척 다른 사람의 불안감을 부추기는 말투를 즐겨 사용했다.
이선 또한 저런 말투에 속아 넘어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신이 B급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즐겁게 설명하는 그를 보며 얼마나 아파했던가.
“하긴 그건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고. 난 이선이한테 볼일이 있으니까 말이야.”
“무슨 볼일이죠?”
“돌아가자. 우리 집으로.”
우리 집이란 단어에 순간 현기증이 인 이선이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로선 다시 떠올리기 싫은 장소였다.
“거짓말은 안 할게. 네가 뭘 어떻게 해도, 여기 아이들은 우리가 데려갈 거야. 여기서 지내면서 본 적 있지? 여기 아이들에게 특별한 힘이 있는 거. 브리온에선 그 힘을 원하거든.”
“…….”
“하지만 네가 날 순순히 따라온다면, 아이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약속할게. 거기 영감님도 그렇고, 여기 일하는 직원도 목숨을 보장해 주지.”
협박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투가 너무나 다정해, 마치 부탁을 하는 것처럼 들렸다.
속지 않는다. 이선은 다시 눈을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거짓말. 내가 당신을 따라가도 똑같이 행동할 거면서.”
“들켰네? 눈치가 좋구나.”
하하! 정재민이 유쾌하게 웃었다. 가증스럽다는 듯 그를 노려보던 이선은, 자신의 소매를 붙잡은 영감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 아이들이 아직 안에…….”
“괜찮아요, 곧 도와주러 올 거예요.”
누가 도와주러 오는지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서한이 돌아오길 바라야 했지만, 진희 일행이 떠나자마자 들이닥친 걸 보면 이들은 서한이 돌아오기 전에 일을 끝낼 심산이었다.
이선은 영감을 바닥에 눕히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뭐야? 안기게?”
이선의 살벌한 기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벌린 정재민이 또다시 농담 어린 말투로 말했다.
“우리 예전에 좋았잖아, 안 그래?”
“하나도…….”
“응?”
“하나도 좋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