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33화
진희가 문을 열기 위해 주변을 살펴보았다. 밀어도 꿈쩍하지 않는 걸 보니, 힘만으로 열리는 문은 아닌 듯했다. 진희 대신에 현성이 다가와 이런저런 조작을 하기 시작했다.
“그 회랑은 환생자들을 위한 물건이에요. 열게 되면 전생의 기억이 모조리 떠올라, 그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죠.”
환생자란 단어에 진희가 멈칫했다.
“환생자들은 보통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해요. 전생의 기억, 영혼이 돌아오면 지금의 자신이 사라지고 말거든요. 하나의 신체에 두 영혼이 양립할 수 없는 이유이지요.”
“그걸…… 왜 말하는 거야?”
“전 진희 씨를 볼 때마다 생각했어요. 왜 진희 씨는 바제트 경과 다를까? 분명 같은 영혼일 텐데, 왜 당신은 ‘진희’로 남아 있는 걸까?”
그 해답을 찾아냈어요, 라며 클로이는 문을 두드렸다.
무슨 암호인지 몇 번 문을 두드리자,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문 안쪽으로 들어가며 클로이가 진희에게 손짓했다.
“그건 당신이 아직 바제트로서 자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어.”
“이건…….”
열리는 문 사이로, 현성이 충격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해저 던전에서 보았던 수많은 수정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문제는 그 수정마다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는 점이다. 정체불명의 기계들로 감싸진 수정엔, 십수 명의 사람이 봉인되어 있었다.
“헨즈.”
진희는 천천히 그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가장 앞에 있던 수정을 보고 중얼거렸다.
헨즈였다.
“라나, 케빈, 맥스.”
뒤이어, 다른 수정에 갇힌 사람들의 얼굴을 차례대로 살펴보았다.
모두 아는 사람들이었다. 생사를 함께한 가족보다 더 소중한 부하들이 그곳에 있었다.
적룡 기사단의 부관, 부하 기사단원들.
고통 어린 표정을 하고서 말라비틀어진 나체의 몸으로 수정에 갇혀, 영혼 전지로서 숨만 고작 쉬고 있는 모습이었다.
“너희가, 왜, 왜, 여기에.”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과거의 동료들이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은 모습으로 수정에 갇혀 있다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순간 사고가 멈췄다.
그때, 이세영과 처음 만나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는 세영과 ‘과거의 동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당신이 이 세상 태생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세상에 관한 기억을 가진 자들이 당신 말고도 많다는 것.’
세영은 진희를 영입하기 위해 그녀의 전생에 대해 깊은 관심을 드러냈었다.
그런 세영에게 진희의 전생에 대해 이야기했던 게 누구였지?
‘그 사람들의 정보를 모아오면, 당신이 관심을 가질 거라고도 말했어요.’
누가?
“니케 로만.”
괴짜. 괴짜 니케 로만은 적룡 기사단원들이 이 세상에 있는 걸 알고 있었다.
“대단해요. 이 짧은 순간에 거기까지 추리해 내다니. 하지만.”
진희가 기억을 되돌아보고 있던 도중, 클로이가 다가왔다. 여형의 목을 찌르던 것처럼 빠르고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진희 씨도 빈틈이 있네요. 이래서 바제트 경과는 다르다니까. 그녀라면 이까짓 일로 동요도 하지 않았을 텐데.”
딸칵, 하고 클로이가 품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진희가 익히 알던 것이었다.
수정구.
테러범들이 가지려 했고, 진희도 사용해 본 적 있던 그것이다.
클로이는 그것을 ‘기억의 회랑’이라고 말했다.
“잠들 시간입니다.”
클로이는 웃는 얼굴로 그것을 진희에게 던졌다.
수정구가 깨지며, 정체불명의 어둠이 진희를 감쌌다.
“그리고 바제트 경이 일어날 시간이지요.”
클로이는 문을 박차고 자신에게 달려오고 있는 진희의 일행들을 보며 말했다.
27. 바제트와 서진희
“맙소사.”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서혁이 안타까움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이틀 밤낮을 꼬박 새우며 조사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어지럽게 놓인 파일들과 텍스트에서 눈을 뗀 서혁은 탁자에 팔을 기대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진희는 지금…… 자리에 없군.”
좋지 않았다. 모든 상황이 최악이었다. 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진희의 습격은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금강과 브리온, 클로이와 니케 로만, 이영한 회장과…….
“와우, 대단하네. 여기까지 알아냈구나.”
그때,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혁이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아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하하, 나 안 보여? 헤르메스의 총서엔 기능이 많네-”
으차, 하는 목소리와 함께 허공이 찢어졌다. 마치 게이트가 출현하는 것처럼 허공을 찢고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괴짜 니케 로만이었다.
“넌…….”
“안녕, 제비.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정보상이라지? 그래서 한 번쯤 보고 싶어 찾아왔어.”
녹슨 금발을 산발로 풀어 헤친 니케는 부스스한 얼굴로 서혁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뒤편 모니터를 보며 깔깔 웃었다.
“와, 나도 숨기려고 숨겼는데. 정말 다 알아냈구나.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났겠네.”
“무슨 속셈이야?”
“속셈?”
서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소문에 의하면 괴짜는 B급 수준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서혁 같은 일반인은 반항조차 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느냐, 날 어떻게 찾았나 같은 질문은 쓸모없으리란 걸 알고 있는 그는 다짜고짜 질문했다.
“그래. 왜 이렇게까지 금강을 돕는 거지? 너랑은 아무런 관계도 없을 텐데.”
“글쎄. 난 금강에 관심 있는 게 아니야. 당신 딸에게 관심 있는 거지.”
“우리 딸 인기도 많네.”
“몰랐어? 이 세상은 당신 딸이 주인공인걸.”
니케가 키득거리며 서혁의 턱에 손가락을 얹었다. 오랜 밤샘 끝에 턱엔 지저분한 수염이 자라 있었다. 그것을 기분 좋다는 듯 매만지던 니케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 무대에 당신의 자리는 없어. 당신이 있으면 진희가 너무 답을 빨리 찾게 되거든.”
“죽일 셈이냐?”
“고민 중이긴 한데, 으음.”
니케가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내 손가락을 튕겼다.
“우선 납치할게. 자, 따라와.”
거절하는 방법은 없었다. 서혁은 짜증 난다는 얼굴이었지만, 허공에서 벌어진 게이트는 그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니케와 서혁이 떠난 방, 주인이 없는 모니터에서 금강과 브리온에 대한 보고서만이 빛나고 있었다.
[금강 초대 회장 이영한.]
[브리온 초대 회장 ……이영한.]
* * *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서한이 인상을 찌푸리며 이영한에게 물었다. 그의 아버지는 서한과 세영을 지나쳐, 방구석에 있는 탁자로 향했다.
그곳엔 병원과 어울리지 않는 독한 술이 놓여 있었다. 병목을 손으로 잘라낸 그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말했던 그대로다. 브리온은 금강의 적이 아니야.”
“그럼 아군이란 뜻입니까?”
“그 말도 어폐가 있구나. 금강에게 아군은 없다. 금강은 오로지 유일하게 존재하니까.”
이영한이 곧잘 하는 말이었다. 금강은 세상에서 유일한 그룹이며, 그 어떤 이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는다는 오만한 말이었다.
“브리온은 내 것이다.”
“……예?”
말을 이해하지 못한 서한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브리온은 애당초 내가 만든 기업이다. 흠, 페이퍼 컴퍼니, 유령 회사, 둘 다 어울리는 말은 아니군. 굳이 따지자면 형제 기업이겠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 서한이 말을 잇지 못했다.
“브리온은 유럽 쪽의 헌터 시장을 뚫기 위해 만든 회사다. 한국의 헌터 인재들 때문에 자국 시장이 침범당한다 생각했던 몇 국가에서 규제를 걸었기 때문에, 금강도 유럽에 진출하기 쉽지 않았지. 그 때문에 만든 회사가 바로 브리온이다.”
“그게…… 말이 됩니까?”
“된다. 너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내겐 힘이 있거든.”
금강의 은닉 자산이 얼마인지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다. 당장 후계자인 서한과 세영마저도 그의 아버지인 이영한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졌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하나의 대기업을 몰래 만든다는 건 현실성이 떨어지는 일이었다.
“무슨 힘입니까?”
“괴짜를 고용했다.”
이번에 놀란 건 세영이었다. 괴짜란 단어에 얼굴이 굳어버린 세영을 보며 이영한이 말을 이었다.
“괴짜의 삼라만상의 총서는 대단한 물건이지. 온 사물의 과거가 적혀 있는 그 물건만 있으면 어떤 일이라도 가능하다. 하물며 국가를 속이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지.”
“괴짜는 사람의 말을 듣는 인물이 아닐 텐데요.”
“네 말을 안 듣는 것이겠지, 이세영. 괴짜의 고삐를 쥐지 못해 안달이 났느냐?”
“…….”
이영한은 혀를 찼다.
“괴짜가 그간 보였던 행보는 모두 내가 시킨 짓이다. 헌터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마피아에게 저주가 걸린 아티팩트를 팔거나, 헌터들의 밀집지를 세상에 밝혀 그들의 그룹을 뭉치지 못하게 한다거나. 작은 일들이었지만, ‘운명’은 하나의 변수로 비틀리게 마련이지.”
삼라만상엔 과거가 적혀 있다. 그리고 미래를 엿볼 수 있다.
그 말인즉, 삼라만상은 운명에 대해 기록된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운명. 서한이 그 단어를 중얼거리며 신음했다.
“운명과 성벽, 모두 알고 계셨군요.”
“물론이지. 너희가 아는 것을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느냐.”
이영한은 다시 한번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운명을 알 수 있다면, 그깟 회사 하나 설립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 그런 짓을 한 겁니까? 운명을 조종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짓을 하지 않아도…….”
“나만이 운명을 조종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세영의 말을 끊고 이영한이 서한에게 말했다.
“너라면 알고 있겠지. 네가 그토록 찾고 있는 녀석들이니까.”
“……테러리스트군요.”
“테러라, 그들에게 어울리는 호칭은 아니구나.”
운명을 뒤바꿔 성벽을 파괴하려는 자들, 진희가 쫓고 있는 미카일을 뜻했다.
“그들도 나름대로 운명을 바꾸고 있지. 난 그들과 부딪히지 않는 최선의 방법을 택했다. 그게 바로 브리온을 만드는 것이지.”
이영한에게도 테러범들은 골칫덩이였다. 행적을 찾을 수 없는데 가진 무력 또한 만만치 않다. 게다가 운명을 비틀 수 있는 능력의 위력은 이영한도 잘 아는 바였다.
그는 아예 테러범과 엮이지 않는 구도를 원했다. 그게 유럽의 브리온 건설이었다.
“그럼 어째서 브리온에게 이런 악행을 시킨 거죠? 브리온의 힘이 곧 금강의 힘이잖아요.”
“아직까지 모르겠느냐? 브리온은 금강의 아군이 아니다. 먹이지.”
‘먹이?’
세영은 고개를 기울였고, 서한만이 말뜻을 알아듣고 경멸 어린 눈으로 이영한을 바라보았다.
“후계자를 선정할 때 실적으로 삼겠다는 말씀이 그 뜻이었군요.”
“그래. 브리온은 너희가 사냥할 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