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32화
‘강하긴 하네.’
여형의 검을 피하며 진희는 생각했다. 앞선 A급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이었다.
여형은 서한과 현성에 비교될 정도로 노련하고 강했다.
‘게다가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 익숙해.’
던전에서 몬스터만 잡아봤던 헌터들의 몸놀림이 아니었다. 철저히 인간의 급소를 노리는 여형의 공격을, 진희는 제법이라는 표정을 하며 피해냈다.
오히려 여형이 당황하는 얼굴이었다. 수합을 겨뤄본 것뿐이지만, 진희에게서 실력 차이를 느낀 것이다.
게다가 곁에 있는 라이샤의 공격 또한 쉽게 볼 수 없었다. 직선적이고 호전적인 공격이라 막거나 피하는 게 어렵진 않았지만, 그 파괴력이 만만치 않았다. 방패를 들고 있는 손이 떨리는 걸 보며 여형이 혀를 찼다.
“어디서 이런 괴물이 나타났지.”
“땅에서 솟았어.”
“웃기고 있군.”
여형이 뒤로 크게 도약했다. 근접전을 선호하는 진희와 라이샤에게서 도망치려는 속셈이었지만, 가만둘 진희가 아니었다.
“바르그.”
진희의 검에서 번개가 튀어나왔다. 바르그의 번개는 여형의 번개를 타고 넘어 그의 몸에 직접 공격을 가했다.
“큭!”
마력을 집중해 막았지만, 진희의 마력이 깃든 번개는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여형의 몸이 경직된 사이, 라이샤가 달려들었다.
검붉은 검이 목을 노리자, 그는 허리를 숙여 피해냈다.
“범현!”
“왜, 여형! 나 바빠!”
여형이 창을 든 사내, 범현을 불렀다. 하지만 현성과 싸우고 있는 범현도 혼란한 상황인 건 똑같았다.
온갖 주술을 사용하며 체력을 갉아먹는 현성에게 밀리기 시작한 범현을 보며 여형이 이를 갈았다.
자칫 잘못하면 애먼 곳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별수 없군.”
그는 땅바닥에 방패의 끝을 박았다. 그와 동시에 방패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뿜어져 나와, 주변을 감쌌다.
“아티팩트?”
진희가 검으로 빛을 강타했지만, 금조차 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잠깐 동안 방어 마법을 발동하는 아티팩트인 듯했다.
하지만 사방이 막힌 방패를 소환했다는 건, 본인도 이 방패 안에서 나오지 못한다는 뜻과 같다. 진희는 곧장 검 끝을 범현에게 돌렸다.
‘눈치가 좋군.’
여형이 품에 손을 넣으며 진희를 바라보았다.
진희의 판단은 옳았다. 이 방패는 일회용인 데다, 한번 사용하면 해제하기 전까진 나올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건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여형! 그거 사용하게?”
범현이 진희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외쳤다. 공격하는 사람이 늘자 범현은 금방이라도 검에 꿰뚫릴 것 같았다.
신기에 가까운 몸놀림이었지만, 결국 진희의 검까지 피할 순 없었다.
“큭!”
범현의 어깨에 진희의 검이 박혔다. 움직일 수 없도록 단숨에 파고든 검은, 번개까지 사용해 팔을 지져 불구의 상태로 만들었다.
라이샤가 그의 목을 잘라 마무리하려던 그때.
쾅-!
엄청난 충격이 그들을 밀어냈다.
“이 마력은 대체…….”
그들을 밀어낸 건 마력의 폭풍이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마력에 밀려난 일행이 여형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심장에 정체불명의 수정 조각을 박은 상태였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한참을 굳어 있던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거 사용해도 돼?”
“너도 당장 사용해. 이대로는 개죽음당한다.”
B급 헌터에게 사용하면 단숨에 A급 수준의 마력을 갖게 하는 카트리지를 여형이 사용하자, 그 여파는 엄청났다.
보고 있던 현성의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엄청난 마력을 갖게 된 여형이 땅바닥에서 방패를 다시 뽑아 들었다.
[Nain.]
그리고 짧은 주문을 외웠다. 그의 손끝에서 나온 초록색의 빛이 범현에게 닿자, 범현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어가기 시작했다.
“마법사…….”
“겸직이다. 마법사라고 검을 휘두르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
현성이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리자, 여형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마력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는지, 여형이 말을 할 때마다 농도 짙은 마력이 주변을 에워쌌다.
“와, 진짜 장난 아니네.”
이윽고 상처가 치료된 범현도 자리에서 일어나 카트리지를 가슴에 박았다.
다시금 여형에 버금가는 마력 폭풍이 일었고, 그 또한 마력이 강화됨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지금껏 수련하던 게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야.”
“저런 말도 안 되는 물건이…….”
그 모습을 보던 유나가 질린 듯이 중얼거렸다.
고작 카트리지를 몸에 꽂는 것만으로 마력이 한 단계 상승할 정도로 강화된다니, 신의 기적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럼 2라운드다. 아깐 잘도 내 어깨에 검을 박았겠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범현이 자신감에 찬 얼굴로 창을 들었다. 모두가 긴장해서 그 모습을 보던 와중에 진희만이 평소처럼 이죽거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말하는 게 무슨 삼류 악당 수준이네. 당신 말솜씨 없단 얘기 잘 듣지?”
“난 외모로 승부하는 편이라.”
“오징어가 말을 하네.”
으득, 범현은 이를 갈았다. 진희의 꼿꼿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는 들고 있던 창을 진희에게 내던졌다.
미사일처럼 날아오는 창끝엔 어마어마한 마력이 담겨 있었다. 당장 피해야 한다 생각한 현성이 진희의 옷깃을 잡아끌려 했지만, 그녀는 창을 마주하며 검을 들었다.
“어?”
그리고 창을 튕겨냈다. 창끝이 이마에 닿기 직전, 창대에 검을 휘둘러 창을 옆으로 밀어냈다. 갈 곳을 잃은 창이 땅에 틀어박혔고, 땅바닥에 거대한 균열을 만들어냈다.
“힘만 늘었지 기술은 별 볼 일 없네. 주제에 맞지 않게 힘만 세.”
차라리 A급 승급 시험을 볼 때 만났던 마법사의 마법이 더 아팠다. 너무나도 강대해진 마력을 다 재단하지 못해, 범현의 마력은 날카로움을 잃고 말았다.
파괴력은 증가했지만, 그걸 휘두르는 사람이 평범하면 명검도 식칼과 다를 바 없다.
진희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너무나 당당한 걸음에 범현과 여형이 오히려 움찔 몸을 떨었다.
“덤벼. 오징어 같은 얼굴로 승부할 생각 하지 말고.”
다시 한번 그들이 격돌했다.
범현과 여형은 이번에야말로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마력 수준은 이미 S급을 뛰어넘었다. 브리온뿐 아니라 전국 어딜 찾아봐도 이 정도의 무식한 마력을 가진 헌터는 없었다.
창을 휘두르면 산을 가르고, 불꽃의 마법을 외우면 용암보다 뜨거운 불길이 튀어나오는 지경이다. 그들의 자신감엔 근거가 있었다.
“말도 안 돼…….”
그러나 그들의 공격은 단 한 번도 진희에게 닿지 않았다. 전투의 구도는 2:1로 바뀌었다. 범현과 여형이 진희를 압박하고, 라이샤와 현성이 진희를 거들어 반격한다.
말이 거드는 것이지 라이샤는 아직 파고들 틈을 찾지 못해 구경만 하고 있었고, 현성만이 주술을 동원해 진희를 돕고 있었다.
결국 제대로 싸우고 있는 건 진희 하나란 이야기인데, 범현과 여형은 진희의 방어를 뚫지 못해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분명 마력의 양은 자신들이 우월하다. 진희가 한 번에 뽑아낼 수 있는 마력엔 한계가 있었다.
한 번의 공격이라도 성공하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 텐데, 그들의 공격은 진희에게 닿지 못했다.
모든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흘리며 반격까지 하는 진희의 모습을 보며, 현성은 생각했다.
‘더 강해졌어.’
대체 어디까지 강해질 건지 상상도 가질 않았다. 이미 검술 실력만으로도 서한과 현성이 감당하기 어려운데, 지금 보니 연습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해진 모습이었다.
자신을 천재라고 자칭하던 유나 앞에서 나도 그렇다고 웃던 진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이익!”
먼저 다급해진 건 범현이었다. 이 강력한 힘을 손에 넣고도 수세에 몰리고 있단 사실에 안달이 난 탓이다.
그는 여형과 함께하는 공세를 포기하고, 한 발자국 앞으로 들어섰다.
“범현!”
여형이 비명을 지르며 그를 말렸지만, 이미 분노에 눈이 돌아간 범현은 진희에게 창을 찌르고 있었다.
단순한 찌르기가 아니었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십수 개의 창날을 같이한 공격이었다.
진희에게 막을 수 있는 방어력은 없다. 피하기엔 공격이 수없이 많다. 그럼에도 진희는 자신의 범위에 들어온 범현을 보며 미소 지었다.
“어리네.”
칼끝 승부는 신중해야 한다. 한순간의 흔들림이 곧 목숨을 날리는 계기가 되니까.
진희는 창과 마주하며 검을 들었다. 검을 수평으로 잡고, 창처럼 찔러 넣는다.
당연히 창이 유리한 싸움이다. 창의 길이를 검으론 감당할 수 없으니까, 진희의 검이 적을 찌르기 전에 범현의 창이 그녀를 꿰뚫을 게 뻔했다.
하지만 범현은 깜빡 잊고 있었다.
진희의 검 끝에선, 바르그의 번개가 나간다는 사실을.
“아악!”
아무리 창이 빠르다 한들 번개와 비교할 바는 아니다. 진희의 검 끝에서 발해진 번개가 범현의 눈을 지져 버렸고, 그 충격으로 창끝이 빗나갔다.
자신의 뺨을 스쳐 지나가는 창, 사라져 가는 마력의 창들 사이로 진희의 검이 정확하게 범현의 이마를 꿰뚫었다.
“멍청한 녀석.”
여형은 곧장 뒤로 도약했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범현의 시체를 보며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브리온의 쌍포라 불렸던 둘이었다.
티격태격하더라도 정이 없던 건 아니었기에, 동생과도 같은 범현이 저리 쉽게 죽어버리자 긴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여형이 증오스런 눈빛으로 진희를 바라보았다. 둘이서 맹공세를 취했음에도 상처 하나 입힐 수 없는 작자였다.
혼자서 뭔 짓을 한들, 범현과 똑같은 절차를 밟을 게 뻔했다.
그는 차라리 자신만이라도 살아남는 방법을 택했다.
“이봐, 지금이라도 내가 이 시설을…….”
“안 되죠, 배신하면.”
“어?”
그때, 여형은 목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고개가 내려가지 않았다. 차갑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그의 목을 깊숙하게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클, 너, 지금…….”
“후후, 뒤가 휑- 하네요. 전투 중에 긴장을 풀면 안 되죠. 여형 선배님도 범현 선배님과 다를 게 없군요.”
진희와의 전투에 열중하느라 클로이의 존재를 깜빡하고 말았다. 어느새 뒤로 다가와 그의 목에 단검을 박아버린 클로이가 피가 묻은 얼굴로 방긋 웃었다.
비통한 얼굴로 피를 내뿜으며 땅바닥에 주저앉은 여형을 바라보던 진희가 클로이에게 말했다.
“너 말이야. 일부러 의심하라고 그러는 거야?”
“설마요, 다 바제트 경을 위해서인 걸요.”
“대놓고 입을 막았는데?”
“증거 있나요?”
이것 참. 진희가 습관처럼 눈을 비볐다.
“됐어, 이곳만 나가면 너에게 볼일은 없으니까.”
“후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직 클로이에겐 이용할 만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진희의 말에 클로이는 가만히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범현과 여형의 사체를 치우고 나서, 일행은 그들이 지키고 있던 문 앞에 섰다. 거대한 문은 화려한 조각과 문양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바제트 경.”
“…….”
“혹시 기억의 회랑이란 아티팩트에 대해서 아시나요?”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