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29화
-습격을 미루는 건 안 되냐.
“안 돼요. 아시잖아요.”
-……그래.
이민자들의 시체가 떠올라 진희가 쓰게 웃었다. 서한도 진희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아는 눈치였다.
한발 늦은 행동으로 인해 벌어진 비극을 겪은 직후였으니, 예정을 미루자고 부탁할 수도 없었다.
물론 진희가 서한보다 강하고, 또 자신이 빠졌다 한들 진희의 기사단이 누군가에게 패배하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걱정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다.
-조심해. 브리온에도 S급은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그래 봤자 고작 두 명이라면서요.”
브리온에 등록된 S급은 총 두 명이다. 그 두 명이 나선다 한들, 진희와 현성, 카온이 있는 기사단이 밀릴 리 없으리라. 진희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서한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알았어. 라이샤도 데려가. 보육원은 내가 막아둘 테니까.
“괜찮겠어요?”
-병원이 거기서 먼 것도 아니고, 박준한테 경비 서라고 말해 둘게. 굳이 라이샤까지 남아 있을 필요는 없어.
진희가 알겠다며 카온에게 손짓했다. 곁에서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카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라이샤를 데리러 밖으로 나갔다.
서한이 보육원에 남아준다면 라이샤를 파티에 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굳이 전투에 참가시키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데 괜찮대요? 당신 아버지.”
-몰라, 나도 가봐야지 알아. 지병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으니까.
“헌터 아니셨어요?”
-맞아, 그 양반도 S급이야. 아는 사람은 적지만.
금강의 회장, 이영한이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벌써 2년째다.
그가 현역으로 일하던 시기는 십여 년 전의 일이라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지만, 그 또한 시대를 호령한 헌터 중 하나였다.
그런 대단한 헌터에게 지병이 있다니,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나이가 많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우선 가서 확인해 봐야겠어.
진희는 잘 다녀오란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예상치 못한 단원의 불참이었지만, 예정을 돌이킬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진희 씨, 괜찮으시겠어요?”
마침 도착한 현성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진희에게 물었다. 진희는 그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리며 웃어 보였다.
“가요, 다들 어지간히 걱정하니까, 빨리 끝내고 와야겠어요.”
* * *
‘이상한데.’
이영한 회장이 입원한 병원의 내부는 조용했다. 가끔 보이는 병실의 환자들 말고는 아무런 경비도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경비원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는데, 정작 병원 안은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서한은 병원의 입원실로 향했다. 그의 아버지는 한 층을 통째로 빌렸다고 전달받았다.
“오셨습니까?”
“그래.”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안에서 이영한 회장의 비서가 서한을 맞이했다. 이 층에도 비서를 제외한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나?”
“예.”
“위험하잖아. 경비는…….”
“회장님의 명령이십니다.”
“……쓰러진 것 아니셨어?”
서한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지만, 비서는 대답 없이 그를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
금강에서 서한을 무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기에, 서한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그를 따라갔다.
오랜 시간 회장과 함께한 비서는 회장을 제외한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영 아가씨도 안에 계십니다.”
“그 녀석은 아가씨라고 불리는 걸 좋아하지 않을 텐데.”
세영의 역린이나 다름없는 단어를 꺼내는 비서에게 서한이 혀를 차며 말했다.
물론 세영도 서한처럼 비서에게 별다른 항의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안으로.”
“후우.”
서한은 긴장된 얼굴로 비서가 열어준 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영한 회장과의 대담은 언제나 그를 경직케 했다.
“왔느냐.”
문을 열자마자 들리는 중후한 음성에 서한이 어깨를 굳혔다. 어울리지 않는 환자복을 입은 중년의 사내가 창가의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보이지만 얼굴은 아직 40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정정한 외모를 가진 사내, 금강의 회장 이영한이 무감정한 눈으로 서한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엔 세영이 서한처럼 긴장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곳에 서라.”
“……위중한 상황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서라.”
대답해 줄 생각이 없으시군, 서한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방 안에선 세영과 이영한을 제외하곤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럴 리 없다고 내심 생각하며, 서한은 세영의 곁에 섰다.
‘숨어 있나.’
“말할 게 있어 불렀다.”
“몸은 괜찮으신지요?”
“후계를 정할 날이 머지않았다.”
세영의 말 역시 무시당했다. 세영과 서한 둘 다 익숙한 표정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정겨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의 관계는 그저 회장과 그 후계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너희가 브리온을 노리고 있다지?”
“…….”
세영과 서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영은 진희를 도와 브리온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으며, 서한은 오늘 일만 아니라면 진희와 함께 브리온을 습격할 예정이었다.
그들은 이영한에게 이에 대해 한 번도 보고한 적이 없었으나, 그가 알고 있단 사실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서한과 세영이 숨긴다 해서 숨길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재밌구나.”
하지만 이영한의 입에서 나온 실소에 둘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의 아버지가 웃는 모습을 정면에서 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어머니에게나 가끔 보여주던 웃음이 자신들을 향하자, 서한과 세영은 순간 말을 잊었다.
“계속하거라. 이 실적을 후계자 선정에 포함하겠다.”
“……브리온은 끊임없이 금강에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가만 놔두실 겁니까?”
세영이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정의와 책임에 대해 열변하는 세영의 눈을 본 이영한이 실소를 거두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어째서입니까? 브리온의 부도덕적인 행태를 고발하면, 우리 금강도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최근 금강의 소극적인 행보 때문에, 언론에선 금강이 쇠약해진 게 아니냐는 가설도 조심스럽게 나오는 와중이었다.
세영과 서한의 활동 말고는 금강에선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최상급의 던전들을 공략하는 것도 아니고,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해외에서 지분을 넓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현상 유지만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브리온이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예.”
이영한의 물음에 세영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주민을 대상으로 비인간적인 실험을 자행하고, 비인증 헌터를 늘려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는 브리온은 세영의 마음속에서 이미 악으로 판단되었다.
세영의 정의심을 익히 알고 있는 이영한은 이번엔 서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브리온의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금강의 앞길을 방해하는 기업이라고 생각하긴 합니다.”
“어리군. 둘 다, 너무 어려.”
이영한은 혀를 찼다.
“너희는 작금의 사태가 브리온의 욕심, 그리고 너희의 계획 덕분이라고 생각하나?”
“아닙니까?”
이영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한과 비슷할 정도로 키가 큰 그가 일어서자, 창문에서 내리쬐고 있던 햇빛이 모조리 가려졌다.
빛의 역광을 받아 표정이 보이지 않는 그가 세영과 서한에게 다가왔다.
“아니다. 모든 건, 내 손에서 이뤄진 일이다.”
그리고 웃었다. 앞선 실소와 달리, 자신의 자식들을 보고 짓는 비웃음이었다.
“어째서 브리온이 우리의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느냐?”
* * *
“우리의 거주지를 습격한 건 금강이었습니다.”
부단장 미카일은 피곤한 안색으로 말했다. 그의 앞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마노가 인상을 찌푸렸다.
“금강이 왜 저희를 노립니까?”
“이유야 얼마든지 있지요. 막내를 공격한 것도 저희고, 정체불명의 테러 조직만큼 기업 입장에서 거슬리는 것도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충격이긴 하군요. 금강이라면 이런 방식을 사용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우릴 습격한 이유가 달리 있던 겁니까?”
“네. 확실히 마노는 마야에 비해 이야기가 빨라 좋네요.”
미카일이 마른세수를 하며 쓰게 웃었다.
“금강은 모든 걸 잡아먹을 셈이에요.”
“처음엔 이 모든 게 브리온의 짓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은신처의 연구 자료를 도난당했을 때, 미카일은 브리온이 SC 프로젝트에 참고하기 위해 습격했다고 말했다. 영혼 기술에 대한 단서가 있는 던전들을 모두 공략한 것도 브리온이었다.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놀랍네요. 이 정도로 명석한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누가?”
“이영한. 이럴 줄 알았다면, 사전에 죽일 걸 그랬군요.”
미카일답지 않은 후회였다. 언제나 신사적이었던 그가 욕을 입에 담을 수준이라니, 마노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그게…….”
미카일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한참을 침묵에 잠겼다.
은신처 습격의 범인이 금강이란 걸 알게 된 건, 괴짜의 흔적을 역추적하면서 나온 조사 결과 덕분이었다.
현재 괴짜는 세영에게 빌붙어 살고 있었다. 괴짜의 행적은 특정할 수 없었지만, 그가 벌이고 있던 일에 대해선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기억의 회랑.’
그리고 반신의 저주 중 하나이며, 환생자의 정신을 파괴하는 저주의 수정구를 괴짜가 모으고 있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괴짜는 그 회랑을 아티팩트를 다루는 ‘영감’에게 팔았다.
미카일이 영감에게 다가갔던 이유 중 하나인 회랑의 행방.
그것을 사용한 사람.
그리고 사용하도록 계획한 사람.
그 사람의 행방과, 그걸 추적하면서 알게 된 진실.
머리가 복잡했다. 긴 시간 동안 침묵하고 있던 미카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브리온은 금강 편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금강이 브리온입니다.”
* * *
“재밌는 걸 들고 계시네요.”
“준비는 끝났어?”
“전 언제나 준비되었어요.”
진희 일행은 브리온의 연구소를 습격하기 위해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진희는 자신에게 다가온 클로이를 보며, 들고 있던 수정구를 감췄다.
“신기한 기운이 느껴지네요, 사용해 보셨나요?”
“아니.”
“흐음? 근데 왜 그걸 가방에 담으세요?”
진희가 클로이의 집착 어린 질문을 무시하며, 가방을 카온에게 던졌다.
테러범들이 수정구를 노린다는 걸 알게 된 이후, 진희는 항상 수정구를 직접 가지고 다녔다.
진희가 대답을 해주지 않자 클로이는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연신 다가왔다.
“바제트 경은 비밀이 많네요.”
“너에게만 많아. 그리고…….”
“아, 호칭 주의할게요.”
후후, 하고 장난스럽게 입을 가리는 클로이를 보며 진희가 튀어나올 것 같은 한숨을 삼켰다.
브리온 출신이기에 데려가는 건데, 차라리 떼놓고 갈까 하는 충동이 계속해서 들었다.
‘아니야, 차라리 데리고 있는 게 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