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28화
S급만 세 명인 기사단이다. 카온과 라이샤는 그들보다 조금 떨어지지만 A급 이상의 전력이라고 해야 하고, 다른 단원들도 실력이 모자라지 않다.
어지간한 헌터 중견 기업도 박살이 날 전력이었다. 그런 기사단이 공격해 오는데, 어떤 함정을 준비한들 통할 것 같진 않았다.
“답답하네. 고구마 천 개쯤 먹은 기분이야. 신 김치에 블루베리 싸 먹고 싶어.”
서혁의 여전한 괴식에 현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서혁 나름대로 현성의 불안을 덜어주기 위한 농담임을 알고 있었다.
“뭐, 하여간 지금 너한테 준 보고서로 진희에게 받은 의뢰는 끝났어. 정부, 기업, 뒷골목 모조리 보고했으니까, 남은 금액 입금하라고 전해줘.”
“고생하셨습니다.”
“이제부터 더 고생해야 돼.”
현성이 고개를 기울였다.
“할 일이 더 있습니까?”
“응. 수상한 점이 좀 있어서 말이야. 이건 내 개인적인 호기심이야.”
진희의 의뢰로 조사를 하면서 밝혀진 헌터 시장의 모순을 지금부터 밝혀낼 생각이었다. 서혁의 나른한 눈동자가 천장을 향했다.
“그게 뭡니까?”
“으음, 말해주긴 좀 그래. 아직까진 의혹 수준이고, 괜히 말해서 편견 가지게 하면 안 되니까. 아, 그래도 하나는 더 말해줄 수 있어.”
서혁이 이마에 올렸던 수건을 치우며 말했다.
“이서한과 이세영을 주시해.”
“……네?”
서한과 세영 덕분에 일이 잘 풀릴 거라 말한 아까와는 다른 의견에 현성이 당황했다.
“걔들이 나쁜 사람이란 게 아니라, 주변이 의심스러워. 어쩌면 이번 사태의 목적은 헌터 시장이나 너희가 아니라, 이서한이나 이세영일 수도 있어.”
알려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아직 서혁도 자세한 사정을 아는 건 아니었다. 서혁은 풀리지 않는 퍼즐을 손에 쥔 아이처럼 짜증 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누가 판을 짜증 나게 짜고 있는 것 같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일부러 복잡하고, 답답하게 말이야.”
얼른 튀어나와서 진희가 후려 패줬으면 좋겠다. 서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악몽은 바라지 않을 때 찾아오는 법이다.
“단장님.”
욕조에서 잠이 들었던 바제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오랜 시간 동안 욕조에 있던 탓에 물이 이미 차게 식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부른 사내를 바라보았다.
“헨즈.”
“갑작스럽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적룡 기사단의 단원이자, 전쟁에 바제트의 곁을 돕던 부관 중 하나인 헨즈가 욕조 곁에서 경례하고 있었다. 손을 흔들어 경례를 받아준 바제트에게 헨즈가 들고 있던 수건을 내밀었다.
바제트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욕조에서 나왔다. 헨즈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바제트가 나체였음에도 불구하고 헨즈는 조금도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전쟁을 함께한 그들에게 이 정도의 일은 일상이었다.
더럽고, 추잡한 전쟁터에서 살아온 그들에겐 성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상관과 부관, 기사 간의 신뢰만이 가득한 눈으로, 헨즈는 바제트에게 젖은 수건을 건네받았다.
“언제까지 이곳에 계실 생각입니까?”
“…….”
“단장님께서 욕조에서 잠드는 동안, 온갖 파렴치한이 왔다 간 걸 모르십니까.”
모를 리 없다. 수십 걸음 바깥에 숨어 있는 적의 숨소리를 들을 정도로 기감이 밝은 그녀가, 이 저택을 들쑤시고 다니는 인간들에 대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들은 바제트가 욕조에 틀어박힌 틈을 타 저택을 드나들며, 그녀에게 흠이 될 수 있는 단서와 물건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귀족들 탓이다. 그녀가 이토록 망가진 건 그 빌어먹을 중앙 귀족들의 잔인한 수법 탓이었다.
헨즈는 증오 어린 눈으로 이를 갈았다. 일 합 만에 죽일 수 있는 살찐 돼지들이 자신들의 우상을 망치고 있는 걸 도저히 지켜볼 수 없었다.
“돌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어디로?”
“단장님이 다시 이끌어주신다면, 저흰 조국을 떠날 수 있습니다.”
적룡 기사단. 제국의 제일가는 기사단이며, 전쟁에서도 무수한 무훈을 세운 영웅들의 집단이다. 제국의 검인 드라노이드의 직속 기사단이지만, 그 성격은 최전방과 격전지를 오가는 군대와 흡사하다.
제국의 검이란 말처럼, 드라노이드는 제국을 위해 희생하는 충신의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안위를 따지지 않고 제국을 위해 힘을 빌려주는 드라노이드, 그리고 그 가문의 가주가 될 예정인 바제트.
전쟁이 끝났을 때, 헨즈를 비롯한 단원들은 바제트가 출셋길을 걸으리라 생각했다. 그녀의 무훈은 수를 따지는 게 무의미할 정도이고, 그녀의 무력은 이미 대륙 끝까지 정평이 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를 반긴 건 정쟁(政爭)이었다.
자신들의 밥그릇이 위험하다 판단한 중앙 귀족들은 점점 바제트를 몰아세워 갔고, 이내 충신이었던 그녀를 한낱 대문을 지키는 개로 전락시켰다.
반격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바제트는 그러지 않았다.
“너희가 알아서 해.”
바제트는 허름해진 잠옷을 걸치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뒷모습에 헨즈가 눈을 감으며 탄식을 삼켰다.
그녀의 충격이 클 것이란 건 짐작하고 있었다. 바제트를 보필하던 부관은 최전방에 배정되었다가 전사했고, 전우였던 동료의 부모가 찾아와 바제트를 전쟁 범죄자라며 눈물 섞인 매도를 종일 일삼았다.
바제트가 뺏어온 땅의 반을 황태자가 ‘아량을 베풀어’ 주변국에게 다시 나누어주었다.
그것을 보고 백성들은 바제트의 욕심으로 전쟁이 커졌다며 모욕했고, 황태자가 평화를 위한 선택을 했다며 칭찬했다.
정작 전쟁을 발발시킨 건 황태자였고, 바제트는 그런 황태자의 명령에 따라 승전을 거듭했을 뿐이었다.
영토의 반을 나눠준 이유는, 전쟁이 끝난 후 갑자기 늘어난 영토의 뒷수습을 할 수 없던 황태자가 평화를 명분으로 주변국에게 뇌물의 의미로 보낸 것이다.
그러나 바제트는 굳이 해명하려 들지 않았다. 동료가 죽은 슬픔, 백성들에게 매도당하며 설 자리를 잃어버린 바제트는 온갖 모략에 변명도, 해명도 하지 않았다.
지쳤던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데 지쳐 조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이제 사람들과 엮이는 일에 지쳐 망가지고 있었다.
“저희가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헨즈가 분한 듯이 말했다.
적룡 기사단은 많은 수의 용인이 함께하는 기사단이다. 용인들은 모두 가문과 제국에 충성을 맺은 기사였다. 그들은 가주의 명령으로만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바제트가 수도에서 지내며 가주 승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자 현재 가주는 공석인 상황이었다.
바제트가 직접 가주 자리에 올라 용인들을 지휘하지 않으면, 적룡 기사단은 섣불리 검을 꺼낼 수 없는 입장이었다.
바제트를 위한다고 검을 빼 들면, 같은 단원인 용인들이 제국에 대한 배신이라며 맞설 게 뻔했다.
용인은 그런 존재였다. 그들의 정의엔 타협이란 단어가 없었다.
“하다못해 가주 승계라도 해주십시오. 제발, 저희가 도울 수 있게…….”
“헨즈.”
바제트가 헨즈를 돌아보았다. 수척한 안색이었다. 기사단 중에선 제법 젊은 편에 속하는 헨즈는 입바른 소리를 가장 잘하는 단원이기도 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자주 놀렸던 게 떠올랐다.
바제트는 한숨 어린 미소를 지었다.
“돌아가.”
“하지만…….”
“내가 움직이면, 더 많은 사람이 죽을 뿐이야.”
전쟁에서 피로 강을 만든 그녀였다. 그 끔찍한 일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다정한 축객령에 헨즈는 그저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라나, 케빈, 맥스도 돌아가라고 해. 기다리고 있는 걸 알아.”
헨즈의 예상대로 그녀의 귀는 아직 먹지 않았다. 1층에서 저택에 침입한 무뢰한들을 쫓아낸 다른 기사단원의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마지막으로 헨즈에게 말했다.
“잘 자렴.”
허름한 잠옷을 입고, 영웅이 잠들 장소라고 생각되지 않는 작은 방의 문을 닫았다.
헨즈는 피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고, 그녀의 뒷모습에 경례했다.
* * *
“답답해.”
과거의 악몽은 꿀 때마다 짜증이 치민다. 진희는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어우, 입이 텁텁하네.”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만큼 답답한 일은 없었다. 지금의 진희라면 인명 피해고 뭐고 알 게 뭐냐며 제국을 엎었겠지만, 당시의 바제트는 마음을 닫고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쟁 전의 바제트는 진희와 흡사한 성격을 가졌다. 자신의 힘에 긍지가 있었으며, 누구보다 확고한 정의를 가지고 행동했다.
그녀가 망가지기 시작한 건 결국 전쟁에서였다.
“……나가자.”
전쟁 때의 기억이 떠오르려 하자 진희가 고개를 털었다. 괜히 그때의 기억을 상기하며 하루의 시작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출전 일이었다.
브리온이 숨겨놓은 또 다른 연구소, 연구원들이 숨어 있다고 알려진 그곳을 습격하는 날이었다.
“준비는 다 됐어?”
“그게…….”
씻고 나온 진희가 카온을 불렀다. 멤버는 저번과 똑같이 구성했다.
진희, 서한, 현성, 카온을 필두로 한 전투 조와 PD, 유나의 보조 및 기록 조.
덤으로 붙은 클로이도 있었지만, 그녀를 제외하고도 진희는 이 여섯 명이 지금 기사단에서 짤 수 있는 최대의 전력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팀플레이를 익히지 못한 라이샤는 보육원에 남아 아이들을 지키는 게 최선이었다.
출전은 오늘 오후, 당연히 단원 모두가 준비를 끝냈을 줄 알았으나, 돌아오는 카온의 대답은 미적지근했다.
“불참이 있습니다.”
“누구?”
“이서한입니다.”
“서한 씨가?”
진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진정하라고 위로해 준 서한이 불참이라니, 이유를 묻기 위해 입을 열려 할 때, 갑작스럽게 PD가 달려왔다.
그녀는 진희를 향해 급한 손길로 폰을 들이밀었다.
“왜 그래?”
“금강, 금강에서 긴급 속보가 떴어요! 회장이 지금 중환자실에 있다고 해요!”
[특보, 금강 회장 이영한, 지병으로 인해 중환자실로 이송!]
화면에선 드론을 이용해 큰 병원의 입구를 촬영하고 있었다.
삼엄한 경비로 가득한 병원을 가리키고, 금강의 회장이 이곳에 입원해 있다는 걸 아나운서가 빠르게 설명했다.
[최근 2년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영한 금강 회장이 심장 지병으로 금성 병원에 이송되었다는 소식이 입수되었습니다. 금강 측에선 모든 질의에 대해 답변을 거부하고 있으며, 현재 병원에 있던 환자들의 증언만이…….]
진희가 멍하니 화면을 보고 있던 그때, 문득 주머니 속의 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전화가 온 것이다.
“서한 씨?”
-미안하다. 못 갈 거 같다.
서한의 목소리엔 당혹과 급한 심정이 드러났다.
-지금 병원에 가는 중이야. 아무래도…….
“괜찮아요. 다녀오세요.”
진희가 서한의 말을 잘랐다.
미안하다고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예정을 잡은 건 진희였고,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이 서한의 탓은 결코 아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