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27화
선의로 구해준 진희에게 왜 더 많은 이들을 구해주지 못했냐고 성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희는 그렇게 헌신적이고, 선의에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연구소를 습격하려 한 건 어디까지나 자신과 기사단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래도 좋은 기분은 아니네요.”
구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은 남아 있었다.
“너…….”
서한은 한참을 우물거렸지만, 결국 말을 정리하지 못했다. 힘이 돼주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섣부른 위로는 안 하느니만 못했고, 진희의 감정이 어떤지조차 그는 알 수 없었다.
진희는 분명 이름도 모를 사람들이 죽었다 해서 침울해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구하고자 한 이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죽은 걸 봤을 때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하나 확실한 건, 서한이 생각하는 그녀는 보이는 것보다 상냥한 사람이란 점이었다.
서한은 가만히 진희가 보고 있던 창밖을 바라보았다.
달은 분명 떠 있었으나, 하늘은 아직 불투명했다.
26. 배신
연락이 왔다.
[역 3번 출구, 2층 카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발신자 불명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자 메시지였지만, 진희는 왠지 모르게 발신자가 누군지 직감했다. 특별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그런 우연이 슬슬 발생할 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 앉으시죠.”
그곳에서 기다린 사람은 진희에게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놀랐을 테지만, 진희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오랜만이라고 해야 할까, 미카일.”
“편한 대로, 바제트 단장.”
“범죄자에게 단장이라고 불릴 생각은 이제 없어.”
“실례했군요.”
부단장이라고 불리는 테러범이자, 과거 바제트의 기사단인 적룡 기사단의 부단장 미카일이 웃었다.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요즘 놀라는 일이 많아서, 자제하고 있어.”
“나름 깜짝 등장이었는데 말입니다.”
“황태자가 내 부하인데, 날 배신한 부단장이 나타난다 해서 놀라겠어?”
“그도 그렇군요.”
미카일은 바제트가 경질당했을 때 가장 먼저 남동생의 편을 들던 기사였다.
전쟁이 끝난 직후 적룡 기사단은 바제트의 유일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바제트가 수도 방위 기사단으로 좌천당하자 단장의 자리가 공석으로 남고 말았다.
그때 빈집 주인 행세를 하던 게 미카일이었다. 바제트가 독주를 마시고 쓰러진 날 밤, 적룡 기사들을 의도적으로 경비에서 제외시킨 것도 미카일의 소행이었다.
“모르게 하려고 했는데, 다 들켰나 봅니다.”
“응. 지쳐서 놔뒀어. 그땐 힘들었거든.”
이미 바제트는 중앙 귀족과 황태자 때문에 피폐해지던 무렵이었다.
진희는 그때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지 어깨를 으쓱이곤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왜 불렀어? 혹시 여기가 묘지가 되길 바라?”
“설마요. 전 목적을 이루기 전까진 죽을 수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 모습이 환영이란 걸.”
“재주도 좋네. 마력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환영이라니, 미국에서 보고 두 번째야.”
미국에서 레인도 이런 방식으로 진희에게 도발을 하곤 했다.
“능력이 뛰어난 친구가 있거든요.”
미카일이 작게 웃었다.
“자리를 마련한 건, 당신께 드릴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해봐.”
진희가 다리를 꼬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피곤한 안색이 역력한 그녀를 보며 미카일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첫 번째, 당신은 SC 프로젝트와 연관되어선 안 됩니다. 두 번째, 이서한을 멀리하세요.”
“이유를 설명해.”
미카일은 날이 선 반응이 나올 걸 예상한 듯, 침착하게 설명했다.
“당신과 SC 프로젝트 사이의 인연이 과하게 많습니다. 더 이상 엮이면 당신의 운명이라 한들 크게 흔들릴 수 있어요. 우리는 당신의 적이지만, 당신이 이런 방식으로 망가지는 걸 반기진 않습니다.”
“이런 방식?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당신이 다시 악마가 되는 일을 말하는 겁니다. 브리온, 금강과의 알력싸움에 계속 휘둘리면 당신은 과거와 같은 절차를 밟게 될 겁니다.”
다시 악마가 된다. 수정구 던전에서 보았던 바제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진희가 인상을 찌푸리자, 미카일은 한숨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믿지 않아도 좋습니다만, 우린 세상을 파괴하는 마왕 같은 무리가 아닙니다. 그저 성벽을 부숴 운명을 개척하려는 것뿐이에요. 인명 피해를 바라는 게 아니니까요.”
“SC 프로젝트랑 내가 무슨 상관인데?”
“말할 수 없습니다. 말하면 당신은 곧장 움직일 테니까.”
“이렇게 친절하게 하지 마세요, 하면 내가 잠자코 들을 인물로 보여?”
“아닐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하는 법이니까요.”
적으로 간주했던 이가 입바른 소리를 한다 해서 혹할 생각은 없었다. 진희는 혀를 차며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내가 정해.”
“저는 경고했습니다.”
“수정구에서 우리 애 기절시키고 도망칠 땐 언제고, 이제 와 상냥하게 구니까 역겹네.”
지금 당장에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것 같은 진희에게 미카일이 쓰게 웃었다. 그도 이 방식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진정성 없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서한을 경계하세요. 멀리하는 게 최선이겠군요.”
“더 이상 들을 생각 없어.”
선전포고를 위해 온 줄 알았더니, 하나같이 헛소리만 늘어놓고 있다. 적의 이간질을 들어줄 생각이 없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서한은 당신의 발목을 잡을 겁니다. 우리에게도 문제지만, 당신에겐 더 큰 역경이 될 거예요.”
“몇 번이나 말하는데, 내 일은 내가 정해.”
“그렇게 자존감 높은 분이, 귀족들 등쌀에 밀려 자살하셨습니까?”
미카일의 도발에 진희가 방긋 미소 지었다. 만져지지 않는 미카일의 어깨를 두드린 그녀가 말했다.
“이번엔 그럴 생각 없으니 걱정하지 마. 그때가 되면 다 죽여 버리면 그만이야.”
“당신…….”
거짓이 느껴지지 않는 진심이었다. 미카일은 눈을 크게 뜨고 진희를 바라보았다.
진희와 바제트가 다른 인격이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바제트였던 이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얼굴을 내려다보며 진희는 남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아직까지 바제트인 줄 알았다면 오산이야.”
살인의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바제트는 이제 없다. 진희는 그 말을 끝으로 카페를 떠나갔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미카일이 꺼져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저 사람은 영웅이 아니라…….”
* * *
[연구원들이 있는 곳을 알아냈습니다. 내일 바로 습격합니다.]
너무 빠른 결정이었다. 이주민들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황에서, 진희는 다음 목표를 정했다.
연구원들이 옮긴 연구소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이주민들의 실험을 강행했던 곳의 기자재를 기록해 둔 유나가 최근 국내의 연구 기자재를 대량으로 구매한 연구소를 모조리 찾아온 덕분이었다.
정밀한 조작이 중요한 마력 연구 기자재는 국가의 관리를 받는 물품 중 하나였기에, 추적은 어렵지 않았다.
유나가 추린 몇 개의 연구소 중, 브리온과 연관되어 있으며 연구 실적이 등록되지 않은 곳을 찾아보니, 마지막으로 한 곳의 연구소가 특정되었다.
“거기 맞을 거야. 나도 소식 듣고 사람을 보내봤는데, 증언이 제법 있었어. 게이트 앞에 경비로 보이는 사람이 많다든가, 웬 정장을 입은 사람이 드나든다든가.”
현성의 앞에서 수건으로 눈을 찜질하고 있던 서혁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시기를 봐도 딱 맞아. 대신 그곳에서 보인 헌터가 브리온 애들이 다가 아니란 게 문제지만.”
“다른 기업들도 연관되어 있나요?”
“응. 딱 너랑 내가 조사한, 그 뒷골목 조직들을 후원하는 기업들의 흔적이 다수 보여.”
문제는 돌고 돌아 하나로 귀결된다. 현성이 깍지를 끼고 서혁이 준 보고서를 노려보았다.
“지엑스, 에린, 유헌사, 선남 기업. 골고루 있더군. 지금까지 흔적을 숨겼으면서 이젠 대놓고 활동 중이야.”
덕분에 뒷골목 조직들도 성황을 누리고 있었다. 마약과 불법 마석, 아티팩트들이 대량으로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었고, 서울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그 손을 뻗치고 있다.
“정부가 무력하니까, 막을 명분도 없어.”
“…….”
“네 잘못 아니니까 얼굴 펴.”
방위대는 사실상 활동을 정지했다. 진희의 지시도 있었지만, S급 헌터이자 방위대의 실세인 현성이 움직이지 못하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방위대의 상위 조직인 헌터 관리 본부가 그 역할을 대신해 줘야 했지만, 이쪽도 온갖 비리 때문에 터져 나가는 중이었다.
이미 정부 청사 앞엔 시위대들이 차츰 모이고 있었고, PD를 필두로 온갖 인플루언서가 올린 관리 본부 비리 폭로에 언론도 쑥대밭이었다.
조직들이 활동하기에 이만큼 좋은 환경도 없었다.
“진희 말대로 된다면 정리할 수 있는 일이니까.”
“기업들이 순순히 당해줄까요?”
“금강을 믿어봐야지. 일단 후계자 두 명 다 진희 편이라며?”
세영과 서한은 진희의 계획에 찬성해, 브리온을 공격하는 일에 총력을 다하고 있었다.
세영은 헌터 시장의 안정화를 위해 비인증 헌터를 잡아들이고 있었고, 서한은 브리온을 뒤집을 단서를 정리하면서 정부 조직에 손을 쓰고 있었다.
“게다가 길드도 우리 편이라고 하고.”
서한과 진희가 포섭한 조직 중엔 헌터 길드도 있었다. 헌터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하부 조직이지만, 방위대와 관리 본부가 무력한 지금 상황에선 실무를 담당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기도 했다.
진희의 계획에 빈틈은 없다. 비록 이번 원정에서 이주민들의 피해를 막진 못했지만, 애당초 이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진희가 다소 급하게 일을 진행하고 있긴 했지만, 상황 자체는 나쁠 게 없었다.
그럼에도 현성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걱정을 떨쳐내지 못했다.
“제가 너무 걱정이 과한 걸까요.”
“아니, 이해해.”
서혁이 이해한다며 쓰게 웃었다. 그도 그 고민 때문에 밤새 일하고 온 참이었다.
“적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으니까.”
서혁의 말은 정확했다. 서혁과 현성이 계속 불안해하는 이유는 적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브리온이 어떤 기업인지, 목적이 무엇인지, 이 일을 계획한 흑막은 누구인지 모르고 있기에, 마치 섀도복싱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브리온의 한국 지사장은 그냥 영입된 경영학 박사일 뿐이고, 이 혼란스런 상황에서 브리온의 헌터들은 평범하게 일하고 있어. 우리는 브리온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브리온에선 누구도 싸울 기색이 보이지 않아.”
브리온도 목적이 있다면 슬슬 행동으로 보여줘야 했다. 연구소를 지킨다든가, 비인증 헌터들을 모아 일을 벌인다든가. SC 프로젝트라는 기적과 같은 기술을 얻은 주제에, 그들은 비인증 헌터를 만들어낸 것 말곤 어떤 곳에도 그 기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설마 연구소가 함정일까요?”
“그게 함정이라고 해서, 너희가 질 거 같진 않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