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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126화 (126/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26화

굳은 얼굴로 시신을 옮기는 일행을 뒤로하고 클로이가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야.”

그리고 그 모습을 진희가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을 짓는 클로이를 보며, 진희가 그녀의 목에 손을 얹었다.

진희의 손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클로이는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손이 목을 서서히 조여와도 클로이는 여전한 표정이었다.

“너 알고 있었어?”

“뭘요?”

“여기 상황.”

“설마요. 고문과 인체 실험이 있었다는 건 알았어도,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

“맹세할게요.”

움찔, 진희의 손가락이 떨렸다. 전생에 신을 모시는 기사단에 속했던 클로이였다. 신성 기사단에서 맹세라는 단어가 가지는 뜻을 진희가 모를 리 없었다.

믿어야 하는가. 하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군요.”

클로이의 웃음은 진해졌다.

“바제트 경이 제 말을 듣고, 바로 이곳으로 왔다면…… 저분들이 아직 살아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 말은 마치, 이 사태가 진희 때문이라고 타박하는 듯했다.

일행은 우선 생존자들을 데리고 재단 앞을 벗어났다. 시신들이 가득한 곳에서 치료를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복도로 나와 위급한 환자들부터 차례대로 치료를 시작했다. 다행히 전투를 대비해 붕대와 포션을 많이 준비해 왔기에 생존자들을 치료하는 데 무리는 없었다.

그때 치료를 받던 도중 눈을 뜬 생존자가 있었다.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여인이었는데, 피로 얼룩진 녹색의 머리를 걷어주자 마찬가지로 녹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다, 당신은…….”

그녀는 진희를 바라보았다. 충격과 절망으로 얼룩진 녹색 눈동자가 진희를 마주하고 갑자기 비명을 터뜨렸다.

“죄송합니다, 죄, 죄송, 제발, 미안해요, 우린, 우리는…….”

“자, 잠깐만요.”

곁에서 상처를 봐주고 있던 유나가 다급히 여성을 말렸다. 하지만 여성은 어째서인지 진희를 향해 계속해서 사과의 말을 중얼거렸다.

진희를 자신들을 고문한 사람이라고 착각한 것인지, 계속 용서를 비는 여성을 보고 진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카온.”

“네.”

“기절시켜 드려.”

진희의 말에 카온이 여성의 목을 살짝 내려쳤다. 마력을 담은 공격에 여성이 다시금 기절했다.

“다행히 여기 분들은 출혈이 적어요. 타박상이 좀 있긴 한데, 생명에 지장이 있는 수준은 아니에요.”

한 차례의 소동이 지나가고, 생존자들을 정리한 유나가 피가 묻은 손을 닦으며 말했다. 그녀는 방금 전 광경의 충격이 아직 남아 있는 듯,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피를 닦던 그녀의 손을 맞잡아준 진희가 현성에게 물었다.

“죽은 사람들의 사인은요?”

“다양합니다. 과다 출혈, 쇼크, 마력 탈진, 가지각색이에요. 아마 과도한 인체 실험 중에 벌어진 게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죽은 시간은 비슷한 듯합니다. 모두 이틀 사이에 죽은 거예요.”

현성은 본인이 말하면서도 말이 안 된다며 이를 갈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도적인 타이밍이었다. 하필 기사단이 오는 날에, 갑자기 실험을 진행해서 이주민 대부분이 떼죽음을 당하게 만든다고? 도저히 우연이라고 할 수 없었다.

“……우선 생존자만 데리고 돌아가죠. PD와 유나는 아까 재단에서 증거가 될 만한 걸 수집해 와. 나머지는 각자 생존들을 들거나 업고, 복귀합니다.”

그때, 진희가 말을 끊고 뒤를 돌아보았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뭐야? 아직 사람이 있는데?”

신전의 복도 건너편에서 한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다섯 명으로 보이는 무리는 진희 일행을 발견하고 각자 무기를 들었다.

가지각색의 무기였지만,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은 A급 이상의 것이었다.

“당신들 누구야!”

“…….”

진희는 말없이 서한을 바라보았다. 서한은 그들의 면면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브리온의 헌터는 아니야.”

서한은 브리온에 소속된 A급 헌터의 인상착의를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한은 저들이 브리온의 헌터가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또한 그들이 무기를 꺼내 들 때, 진희는 그들이 똑같이 생긴 오브를 손에 쥔 걸 보았다.

즉, 모두 비인증 헌터란 이야기다. 이 끔찍한 실험의 결과물들이자, 브리온이 사회에 푼 망나니들이었다.

자세히 봐보니, 그들의 옷차림엔 정체불명의 핏자국들이 묻어 있었다.

“무기 들어.”

진희가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단원들이 즉시 각자의 무기를 손에 쥐었다.

“카온은 생존자와 PD를 지켜. 나머지는 날 따라 친다.”

“이 새끼들아! 내 말 대답 안 해!”

“가장 앞에서 입 터는 녀석만 남겨놔.”

나머지 네 명은 모두 죽이란 뜻이다.

“가.”

진희의 말과 함께, 단원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미, 미친! 막아!”

무리는 다급히 공격을 막아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서한의 검에 목이 날아갔고, 현성의 주먹이 심장이 뚫렸다.

A급과 S급은 천지 차이다. 심지어 S급 중에서도 베테랑으로 통하는 서한과 현성을 신출내기 A급이 당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마력이 A급이라고 해도, 경험이 부족한 그들은 서한과 현성에게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었다.

“아아악!”

전투라고도 할 수 없는 학살은 단 5초 만에 끝났다. 차가운 바닥에 드러누운 동료들의 시체를 보며, 가장 앞에 서 있던 사내는 사색이 된 얼굴로 도망치려 했다.

“어디 가나.”

“허, 허억! 내, 내 팔!”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진희가 짧게 휘두른 검에 왼팔이 잘려 나간 사내가 몸에 균형이 맞지 않아, 땅바닥에 넘어졌다.

“아악! 아, 아파아!”

“엄살 부리지 마.”

진희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서한과 현성은 각자 사내의 양옆을 막아서고 있었다. 땅바닥을 기던 사내가 황급히 몸을 돌려 진희를 바라보았다.

“사, 살려주세요! 뭐, 뭐든 말할 테니까 제발!”

“우선 바로 비굴해지는 건 칭찬할게.”

진희가 현성에게 턱짓했다.

“팔 지져. 과다 출혈로 안 죽게.”

“뭐? 자, 잠깐. 으아아아악!”

현성이 주술을 이용해 불을 일으켜, 사내의 절단된 팔을 지져 버렸다. 일반인이라면 쇼크로 기절했을 테지만, 강력한 마력을 가진 헌터는 그것마저도 불가능했다.

잘려 나간 팔에 지옥과 같은 고통이 일자 사내가 계속해서 땅바닥에서 몸을 굴렸다. 뜨거운 팔을 어떻게든 차갑게 식히려는 노력이었다.

“지금부터 질문하는데, 똑바로 대답해. 다음은 오른팔이야.”

“학, 하악!”

“대답하라고 했어.”

“네, 네!”

침과 눈물을 질질 흘리던 사내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날 수도 없었다. 자신의 동료를 수 초 만에 죽여 버린 사내가 양옆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저질스러운 농담을 주고받던 동료들은, 그저 피만 흘리고 땅바닥에서 초라하게 죽어 있었다. 죽음의 공포가 사내의 눈을 엄습했다.

“여기 원래 있던 연구원들 다 어디 갔어?”

“모, 모르겠습니다.”

“그래?”

“하, 하지만! 다른 연구소로 옮긴다고 드, 들었습니다!”

“거기가 어딘데?”

“브, 브리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브리온이 아닌 연구소라, 진희가 다음 질문을 했다.

“두 번째. 너희 SC 프로젝트 당사자들 맞지?”

“마, 맞습니다.”

“그럼 너희를 A급으로 만들어준 사람은 누구야?”

“브리온입니다.”

사내는 떨리는 눈으로 진희의 뒤편을 바라보았다. 카메라가 있었다. 사내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탐문임과 동시에 취재였다.

“여기 이주민의 시신이 많던데, 너희가 한 거야?”

“아, 아닙니다!”

“이미 이주민들의 증언을 들었는데?”

진희가 사내의 발목을 검집으로 깔아뭉갰다.

“아아아악! 저, 저는 두 명밖에 안 죽였습니다!”

죽였다 이거지. 진희의 눈매가 한층 더 사나워졌다. 물론 그녀는 이주민들에게 증언을 들은 적 없었다. 그저 뻔한 블러핑이었다.

하지만 고통과 죽음의 공포로 이지를 상실한 사내는 쉽게 대답을 하고 말았다.

“성폭행 흔적도 있던데, 너희 짓이냐?”

“죄, 죄송합니다! 안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안 할 테니까아악!”

“안 죽여, 걱정 마.”

진희가 사내의 다른 팔마저 잘라 버렸다.

“지져.”

“아아아악!”

또다시 사나운 비명이 신전을 울렸다. 이주민들의 신음과 달리, 그의 비명엔 일행 누구도 동정의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진희는 PD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 찍었지?”

“네, 네.”

“이 녀석도 업어. 증인으로 삼을 테니까, 돌아가서 고문해서라도 진실을 받아내. 그리고 PD. 영상 편집해. 우리의 말은 없애고, 이 녀석들이 했던 짓만 부각되게.”

진희의 명령은 빠르고 냉정했다. 지금껏 본 적 없었던 진희의 모습에 PD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시체들을 마주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보다 진희의 명령을 따르는 게 우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클로이.”

“네에, 바제트 경.”

“그 역겨운 표정 집어치우고, 연구원들이 어디로 갔는지 찾아내.”

“알겠습니다.”

클로이의 눈은 애정과 존경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뺨이라도 후려칠 기세인 진희에게서 한 걸음 물러난 그녀가 마치 기사처럼 예의를 갖추며 명령을 받았다.

“……돌아간다. 생존자 챙겨.”

던전에 들어설 때와 다른, 한풀 꺾인 목소리로 진희가 명령했다.

던전 공략으로 비유하자면, 진희는 처음으로 던전에서 실패를 경험한 셈이었다.

구하자던 이주민들을 구하지 못했고, 브리온을 몰아세우기 위한 결정적인 단서도 얻지 못했다.

실패의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마치 전쟁에서 뼈아픈 실수를 했던 때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 일행은 아무런 말이 없었고, 진희는 찢어질 것 같은 손아귀를 가만두었다.

* * *

“정신적인 충격이 커.”

어둑한 밤이 돼서야 일행은 보육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주민들은 방으로 옮겨졌다. 신림의 의사를 불러 진찰을 하게 한 후, 경과를 보고받은 서한이 진희에게 말했다.

“한 달이면 상태는 호전될 테지만, 못 일어나는 건 정신 쪽 문제라더군.”

“영혼이 다친 상태예요.”

바르그에게서 이주민의 상태를 보고받은 진희가 서한의 말을 정정했다. 서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창문가에 앉아 가만히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나른한 표정이었지만, 서한은 그녀가 다급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네 탓이 아니야.”

서한은 클로이와 헤어졌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입에 담았다.

“네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

진희가 서한을 돌아보았다. 서한의 굳은 표정을 보고서, 진희는 쓰게 웃었다. 누군가를 위로해 본 적 없는 게 티가 났다.

방엔 서한과 진희 단둘뿐이었다. 현성은 유나와 같이 이주민들을 돌봐주기 위해 방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카온은 아이들을 진정시키려 숙소로 향했다.

심각한 표정의 일행과 피투성이인 이주민들 때문에 아이들이 크게 놀란 탓이다.

“죄책감 안 가져요.”

“…….”

“서한 씨 말마따나, 제 잘못이 아니니까.”

진희는 어디까지나 선의로 구하러 간 것이다. 물론 모든 이주민을 구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저 인원을 구한 것만으로도 도리는 충분히 지킨 것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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